210327. 묵상글 들 ( 사순 5주 토요일 - 살아있는 복음들로.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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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27.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사순 5주 토요일 - 살아있는 복음들로
오늘 독서와 복음의 공통 주제는 흩어진 백성을 모으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지금 백성들이 흩어져 있다는 말씀인 것이고,
관건은 주님께서 어떻게 이 흩어진 백성을 모으시느냐 그 것입니다.
이에 대한 에제키엘 예언서의 예언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의 성전을 영원히 그들 가운데에 두겠다.
이렇게 나의 거처가 그들 사이에 있으면서,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첫째로 주님께서는 당신 성전을 사람들 가운데,
곧 우리들 가운데 두시겠답니다.
이는 우리의 생각이나 예상과 다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성전을 산 꼭데기에 세우고
사람들이 그리로 찾아오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시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하느님의 산에 오를 이 누구인고?
그 손은 깨끗하고 마음 정한 이, 헛 군데에 정신을 아니 쓰는 이로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런 사람들이어서 하느님을 찾아
스스로 산 꼭데기까지 오면 오죽 좋겠습니까?
그랬으면 흩어지지도 않았을 테지요?
문제는 사람들 손이 깨끗하거나 마음이 정하지도 않고,
정신이 헛 군데에 가 있어 그것을 찾아 흩어진 겁니다.
그러니 모이라고 말만 할 것이 아니라 모으기 위해 몸소 찾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에 계시지 않고 이 세상에 오신 이유가 이것이고,
한 곳에 계시지 않고 공생활 내내 돌아다니신 이유가 이것이며,
주님께서 사도들을 파견하신 이유가 이것이고,
프란치스코에게 "가서, 나의 집을 고치라"고 하신 이유도 이것이지요.
오늘 에제키엘서 말씀처럼 찾아가는 교회,
사람들 가운데 있는 성전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칸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프란치스칸 은둔소들이 다른 운둔소들과 달리 마음이 내려다보이는
산 중턱에 위치한다는 것이고, 우리나라는 좀 다르지만, 클라라 수녀원들이
다른 봉쇄 관상 수녀원들과 달리 마을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들고 사람들 가운데로 가는 것이고,
아니, 아예 살아있는 복음들로 사람들에게 가는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을 복음화하는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하느님이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살아있는 복음이 되려면 오늘 복음의 예언처럼
희생양으로 죽어야 한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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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27. 사순 5주간 토요일. 최종훈 토마스 신부님.
오늘의 묵상
세상을 보고 있자면, 분노가 솟구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에만 몰두하여 정의와 공정이라는 필수적 가치를 팽개쳐 버립니다. 많은 사람이 자신의 잘못을 숨기려 거짓으로 일관합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외쳤던 사회는 조금도 변화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목적을 이루고자 작은 희생은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여기며 사람들을 선동합니다.
이천 년 전의 모습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많은 표징과 사랑은 보지 않은 채, 자신들의 이익과 권력에만 몰두하며 희생양을 찾고 있습니다. 그것도 자신들이 가진 권력과 힘으로, 교묘한 술책과 모함으로 사람들을 선동하여 아무런 죄가 없으신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오늘 복음 내용은 사순 시기의 마지막을 보내는 우리를 분노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순 시기를 지내 온 우리 자신에게는 분노하지 않습니다. 나에게만은 관대합니다. 하느님의 가치와 사랑을 외면할 때도 많았습니다. 누군가의 아픔과 고통에 함께해 주지도 못하였습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은 아주 샅샅이 살피면서도 이기심으로 말미암은 나의 행동은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방종하였고 게을렀습니다. 잘못을 숨기고 실수를 그럴듯하게 포장하며, 다른 이들을 탓하면서 핑계를 대었습니다.
복음을 읽으며 분노하였고 세상을 보며 분노하였으니, 이제 스스로를 보며 분노하기 바랍니다. 그래서 결국 더 나은 나로, 더 나은 사회로, 더 나은 신앙으로 거듭나기를 기도해 봅니다. 그리하여 참으로 기쁜 부활을 맞이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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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27. 사순 5주간 토요일. 새벽을 열며. 빠다킹 신부님.
어렸을 때 “커서 **가 될 거야.”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이 ‘**’에는 자신이 되고 싶은 직업이 채워졌지요. 교수, 의사, 판사, 경찰, 소방관, 운동선수 등등….
어렸을 때의 꿈을 이룬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자신의 꿈을 이뤘으니까 행복할까요? 실제로는 꿈을 이뤘음에도 불구하고 행복해하지 않는 사람들이 더 많다고 합니다. 그런 줄 몰랐다면서 말과 함께 행복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50년 이상 살아온 제 경험을 생각해볼 때, 어떤 일이나 다 똑같은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떤 일이나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이 되었을 때는, 그 일이 어렸을 때의 내 꿈이었다 하더라도 똑같이 지겹고 힘들어집니다.
자신의 꿈을 단순히 일로만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세상의 일 안에서는 기쁨과 희망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실 어렸을 때의 꿈은 세상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의미’였습니다. 그래서 나이를 한 살씩 먹어가는 것도 즐거웠습니다. 그만큼 나의 의미와 가까워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일’로 받아들이게 될 때는 ‘의미’가 사라집니다. 그래서 나이 먹는 것이 서럽다고 말하게 됩니다. 꿈을 하나의 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일이 아니라 행복으로 나아가는 ‘의미’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은 세상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단순히 세상 사람들이 하는 일을 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의미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서 세상의 일만 좇은 사람은 예수님을 제대로 알 수 없었고, 예수님에게서 하느님의 의미를 찾은 사람은 굳은 믿음으로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의 일로만 예수님을 마주하니,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권한을 지닌 분과 자신들이 감히 맞설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그분의 권능이 입증되는 것에는 눈을 감아서 알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로마 체제 안에서 유지되는 자기들 나라의 한시적인 권한과 성전에 의지하며, 예수님이 반역을 꾸민다는 터무니없는 고발을 했습니다. 역시 세상의 일로 예수님의 활동을 바라보고 있으므로 그랬습니다.
카야파의 예언 역시 하느님의 의미를 보지 않으면서 했던 것이었습니다. 특별히 그 시대에는 대사제의 직책을 로마인들이 뽑을 정도로 선정 과정이 썩어 있었다고 합니다. 즉, 그는 세상의 일을 하는 사람이지 하느님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부정적으로 예수님을 바라봤던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았을까요? 하느님의 의미를 찾지 못하니 주님께서 주시는 진정한 기쁨과 행복을 나의 것으로 만들지 못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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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모두 무언가 되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 누구도 무언가가 되려고 노력하지는 않는다(괴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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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
인간에게는 3개의 뇌가 있다고 합니다.
제1의 뇌(뇌간). 일명 파충류의 뇌. 생명 유지를 위한 부분.
제2의 뇌(대뇌변연계). 일명 포유류의 뇌. 감정, 식욕, 성욕, 단기기억에 관한 부분을 담당.
제3의 뇌(대뇌피질) 영장류의 뇌. 기획, 충동 조절, 이성적 판단, 행복감을 느낌.
이 중에서 뇌간과 대뇌변연계는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성장합니다. 그러나 제3의 뇌인 대뇌피질은 사춘기부터 시작해서 27~30세쯤에 완성됩니다. 이를 철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남자는 포유류의 뇌가 발달합니다. 생존본능, 종족본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만히 있지를 못해서 계속 움직입니다. 하지만 어른들은 왜 이렇게 정신없냐고 하면서 움직이지 못하게 합니다. 이를 위한 대리만족으로 게임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자는 남자와 달라서 포유류의 뇌가 발달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얌전하고 이 때문에 여성이 남성보다 뛰어난 것처럼 보입니다.
대뇌피질인 영장류의 뇌를 활성화하는 비결은 ‘몰입’입니다. 어린 시절에는 놀이를 통해, 청년 시절에는 사랑을 통해, 장년 시절에는 일을 통해 대뇌피질이 활성화되면서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뇌를 알면 어떻게 교육해야 할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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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27. 사순 5주간 토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수사님.
“온 백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해서 죽는 것이 더 낫다.”
지금 우리는 “사순시기”의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사순시기”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이르는 결정적인 사건인 십자가 사건에서 그 절정을 이루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이 결정적인 사건이 어떻게 해서 벌어지게 되는지 그 단초를 제공해줍니다.
곧 유다 지도자들이 예수님의 죽이기로 결정한 사건을 전해줍니다.
이 일은 예수님께서 유월절을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에 가시던 중에, 채 도달하기도 전에 벌어진 사건입니다.
곧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가까이에 있는 엠마오라는 마을에 다다랐을 때에 생긴 일 때문에 예루살렘에서 생긴 일입니다.
곧 엠마오에서 라자로의 장례식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마지막 일곱 번째의 표징, 곧 죽은 라자로를 살리신 표징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부활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표징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라자로의 장례식에 갔다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이 이를 예루살렘에 있는 유다 지도자들에게 알린 것입니다.
그러자 유다 지도자들은 민심이 동요된 것을 두려워하여 최고 의회 곧 산헤드린을 열고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그것은 백성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곧 메세아가 와서 다윗 왕조를 회복하고 새로운 이스라엘을 재건하리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사실이 로마제국에게는 위협이 되고 당시의 기득권을 갖고 있던 종교도자들에게도 위기가 되었고, 그래서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결정과정이 참으로 묘합니다.
바로 그 결정과정을 통해서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를 드러내주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 해의 대사제였던 가야파가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입을 통해 밝혀줍니다.
“온 백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해서 죽는 것이 더 낫다.”(요한 11,50)
이는 결국 예수님의 죽음이 온 백성을 위한 대속임을 말해줍니다.
곧 의인의 죽음을 말해줍니다,
곧 이는 “예수님께서 민족을 위하여 돌아가시리라는 것과 이 민족만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시리라는 것”(요한 11,52)임을 드러내줍니다.
그런데 이는 “가야파가 자기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 해의 대사재로서 예언한 것”(요한 11, 51)임을 밝혀줍니다.
이토록, 하느님께서는 오묘하게도 기회주의자인 가야파의 입을 통해 그리스도의 죽음의 의미를 밝혀주십니다.
그리하여, 유다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고, 백성들을 예수님의 예루살렘의 입성을 기다리며 파스카를 준비합니다.
오늘 우리도 이 “사순시기”의 막바지에서 예수님의 파스카를 기다립니다.
그리고 <복음>은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는 장면으로 이어집니다. 그분의 죽음과 영광을 준비합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게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준비해야 할까요?
-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요한 11,50)
주님!
겉치레 속에 교묘히 가리고 있는 불신의 껍질을 벗겨 내소서.
신앙의 겉꾸밈 뒤에 감추고 있는 제 허영과 자애심을 끊어내소서.
사랑의 겉모습 뒤에 숨기고 있는 위선을 몰아내소서.
빛을 비추시어 사실을 보지 못하게 하는 어리석음의 어둠을 몰아내소서.
당신의 생명이 자라고 당신의 영이 흐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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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27. 사순 5주간 토요일.<한 사람이 백성을 위해>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사순 5주간 토요일(요한 11,46-56) 14.04.11
좋은 일에는 생색내기를 좋아하고 어려운 일에는 꽁무니를 빼는 것이 우리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어렵고 힘든 일이 나에게 닥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시련으로 말미암아 나에게 불똥이 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또한 간절합니다. 그러다가도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으면 태연하게 “그 일을 위해서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아느냐?”고 말합니다. 정말 속 보이는 일이죠. 그러나 이런 일이 비일비재 한 것은 그만큼 마음이 굳어진 탓입니다.
대사제인 가야파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더 낫다”는 명분을 내세워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왜 예수님입니까? 자기가 온 백성을 위하여 죽으면 안 됩니까? 왜 나는 안 되고 다른 사람이 십자가를 짊어져야 함을 당연하게 생각합니까?
유다인들은 거창한 명분을 내세워 희생양을 선택하였는데 안타깝게도 그들의 구원자 메시아를 제물로 삼았습니다. 그들은 명분을 내세워 자기 자신과 가문을 위하고 자기 실속을 차리려 하였습니다. 자기가 희생하려 하지 않고 명분을 내세워 남을 희생 시키는 잘못을 범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민 이들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의 모습입니다.
때때로 나의 명분과 이익을 위해서 다른 사람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생각을 지니게 되는데 바로 그 순간이 메시아를 희생양으로 삼는 때가 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명분에 앞서 나의 진심을 볼 수 있는 지혜를 간직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나의 희생봉헌이 다른 사람에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됩니다. 구원을 가져옵니다. 희생은 주님 사랑의 징표입니다. 따라서 누구의 희생이 아니라 바로 나를 통해서 구원이 온다고 생각하면 한 순간순간이 소중하게 다가올 것입니다.
예수의 성녀 데레사와 함께 기도합니다. “주님, 저는 황홀한 환시보다도 숨은 희생의 단조로움을 선택하렵니다. 희생과 사랑으로 작은 핀 한 개를 줍는 것이 한 영혼을 구하고 회개 시킬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나 자신과 공동체를 위해 희생을 바칠 수 있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을 담아 행하였다면 그 자체가 보상이고 기쁨입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 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 놓아야 합니다.”(1요한3,16)
‘우물쭈물’, ‘어영부영’, ‘할까말까’ 망설임 없이 사랑합시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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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27. 사순 5주간 토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1,45-56: 그들은 예수를 죽일 음모를 꾸미기 시작하였다.
죽은 라자로를 예수께서 다시 살리신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고 그 소문이 퍼지자 대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의회를 소집한다. “저 사람이 저렇게 많은 표징을 일으키고 있으니,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소? 저자를 그대로 내버려 두면 모두 그를 믿을 것이고, 또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의 이 거룩한 곳과 우리 민족을 짓밟고 말 것이요.”(47-48절). 그들은 세상의 것을 잃을까 봐 두려워했다. 지금까지 누리고 있던 기득권을 잃을까 두려워 주님을 제거할 음모를 꾸민다. 대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정말 성전과 백성을 걱정해서 이런 회의를 소집했던 것이 아니다.
이것은 정치적인 문제로 가능한 이야기이다. 그들의 염려는 예수님을 따르는 많은 군중이 민중봉기라도 하게 되면 로마의 진압을 받게 되고, 성전은 파괴되며, 유다민족은 완전히 지배를 당하리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이렇게 정치적으로도 생각하였겠지만,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죽은 라자로를 살리시는 기적을 사람들이 보았고 많은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자, 예수님을 견제하기 위해, 그 사태를 수습하려고 의회를 소집하였다.
이때 대사제 가야파가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49-50절)하고 말하였다. 이것은 대사제로서 예언한 것이며, 예수님의 죽음이 유대인뿐 아니라, 흩어져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한데 모으기 위해서 죽는다는 예언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따른 것이었다. 그분의 죽음은 이스라엘 백성들만을 위한 죽음이 아니라, 모든 인류를 위한 구원의 행위로서의 의미가 있다. 이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이 태어날 것이다.
하여간에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이해 때문에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다. 그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려고도 하지 않았고, 자신들의 행위가 하느님의 뜻에 맞는지 맞지 않는지도 성찰해 보지도 않았다. 오직 자신의 안전과 자신의 지위를 보존하는 것에만 집착하고 있는 모습이다. 여기에 장애가 된다고 보고 있는 예수라는 존재를 없애야 한다는 결정이 나도록 당시의 상황을 몰고 갔던 것이다. 그들은 그분을 죽일 방법만 찾았고 이제는 그렇게 하기로 결의하고, 계획을 행동으로 옮기는 일에 들어간다.
우리는 우리의 판단 기준을 어디에 두고 살아가고 있는가? 하느님의 뜻을 생각하며 진위를 가리고 있는가? 아니면 나 자신의 명예나 안위에 우선을 두고 세상의 다른 모든 것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이기적인 판단의 기준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래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오늘을 사는 다른 무죄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려 하고 있지나 않은가를 성찰해 보아야 할 것이다. 오늘 복음의 유다 지도자들을 보면서 나를 반성하며, 잘못된 판단으로 그들의 잘못을 범하지 않고,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자 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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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27. 사순 5주간 토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요한 11, 50)
소중한
한 사람을
희생양으로
만드는 악순환은
이제 멈추어야
한다.
삐그덕거릴때마다
희생양을 만들면
남아있을 사람
하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역사로부터
많은 것을
배운다.
거꾸로
뒤집으면
역사는
우리자신을
향하는
이야기이다.
잘되면
자기노력
못되면
조상 탓으로
돌리는
우리들 나쁜
습관이다.
자기중심적인
관계에서
벗어나는 것이
건강한 관계이다.
여전히 어리석고
여전히 이기적인
우리들 마음이다.
관계를
오염시키고
훼손시키는
당사자는 바로
우리자신이다.
우리의 발목을
잡는 것도
우리자신이다.
소중한 것을
놓치며 우리는
살고있다.
보여주기 위한
삶이 아니라
성장을 위한
삶이 되어야 한다.
성장을 위한
삶은 우리
내면에서
시작한다.
어려움을
피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십자가는
희생양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참된 사랑이다.
우리 삶을
지탱해주는
버팀목이다.
관점을 바꾸는
은총의 시간이다.
십자가의
관점으로
바라보면
모든 사람은
사랑의
대상이 된다.
십자가를 통한
관점의 전환이
필요한 시간이다.
이기적인 삶과
자기중심적인
관계를
바꾸게 하는
십자가의
참된 사랑이다.
사랑은
희생양이
아닌
십자가와
함께하는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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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27. 사순 5주간 토요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백성을 한데 모으시리라
사순 시기가 막바지에 접어들면서, 전례에서 들려오는 하느님 말씀에
담긴 이스라엘의 상황과 예수님의 생애가 점점 더 극적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주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한 민족으로 만드시고,
그들과 새로이 평화의 계약을 맺으시리라고 예언하였습니다(에제 37,26).
또한 카야파 대사제도 본의 아니게 예언을 한 바 되었으니,
그것은 자기네 민족 전체가 멸망하는 것보다 예수 한 사람이 민족을 위하여
죽는 것이 낫다고 강변하면서 예수를 죽이기로 선동한 발언에서 나왔습니다.
이로써 카야파는 이스라엘을 위해 그런 발언을 했겠지만 그의 본 의도와는 상관없이,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대적한 옛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라 그 민족 가운데에서
당신께 대한 믿음을 고백한 소수 아나빔들을 모체로 모든 민족들에게 열린 새 이스라엘로써
새로운 하느님 백성을 모으시기 위하여 당신의 목숨을 바치는 계기를 얻으시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독서와 복음 말씀 모두, 막장으로 치닫는 이스라엘 민족의 불행한 최후와 함께,
하느님께서 새로이 불러 모으시고 계약을 맺으실 새 하느님 백성을 준비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에제키엘의 예언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몇 단계의 희망이 성취되어야 했습니다.
우선, 바빌론 유배에서 풀려나서 조국으로 귀환하는 일입니다.
“나 이제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나가 사는 민족들 사이에서 그들을 데려오고,
그들을 사방에서 모아다가, 그들의 땅으로 데려가겠다.”(에제 37.21)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두 번째는 분열되었던 민족을 다시 하나로 통합하는 일입니다.
“그들을 그 땅에서, 이스라엘의 산악 지방에서 한 민족으로 만들고,
한 임금이 그들 모두의 임금이 되게 하겠다.”(에제 37,22)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세 번째는 우상을 숭배하던 풍습으로부터 정화시키는 일입니다. “
그들이 다시는 자기들의 우상들과 혐오스러운 것들과
온갖 죄악으로 자신을 부정하게 만들지도 않을 것이다.
그들이 저지른 모든 배신에서 내가 그들을 구원하여
정결하게 해 주리라.”(에제 37,23) 하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기까지, 첫 두 가지 과제는 이루어졌지만
세 번째 우상숭배의 과제는 미해결된 채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하셔야 했던 것이고,
그 자리에서 그분은 사흘만에 부활하신 당신의 몸이야말로 새로운 성전임을 선언하셨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성령의 이끄심을 따라서
부활 신앙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새로운 하느님 백성을 이루게 될 섭리를 예언하셨습니다.
사실은 카야파만이 아니라 예수 죽음에 가담한 이들 가운데,
밀고한 제자 이스카리옷 유다, 직무를 저버린 빌라도 모두 예수님께서 구세주로서
하느님의 섭리에 순명하도록 하는 운명의 악역으로 하느님께서 쓰셨습니다.
하지만 그들 악인들이 연출해 낸 역사의 무대가 전부가 아니었고,
예수님께서는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이나 하느님의 부르심에 반역한 이스라엘을
당신 죽음으로 심판하시려는 하느님의 뜻을 깨달으셨고,
이 뜻에 담긴 거룩한 분노를 반영하여 저항 없이 죽음을 받아들이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이를 자기비허(自己卑虛)의 계시라 합니다.
사탄의 계략 안에는 이런 방식의 대응에 대비한 계책이 없었습니다.
사탄의 꼬임에 빠져서 죄악을 저지르는 자들은
이런 방식의 가치는 물론 그 영적인 효용도 알지도 못합니다.
제3자가 보기에는 무기력하기 짝이 없는 대응 방식이었겠으나,
예수님으로서는 최선의 방책이었습니다.
당신은 육신으로 죽지만, 적대세력들은 영적으로 소멸하는 작전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당연히, 하느님께서는 육신으로 죽은 예수를 부활시키실 것이었습니다.
이 부활까지가 자기비허의 계시 안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성모 영보의 연장선 상에서 천지창조를 능가하는 하느님의 창조 업적입니다.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홀로 부활하신 그분은 아예 죄악으로 가득 차 버린
이 세상을 영적으로 심판하실 작정을 하시고, 당신을 믿는 이들을
새로운 당신 백성으로 삼아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려는 작전을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이 구원 작전은 현재 진행 중입니다. 그래서 예수 부활을 믿고 살아가는
믿는 이들이 부활한 삶을 예수님의 성전으로 삼아서 새로운 창조가 이룩되고 있는 중입니다.
이 창조 과업에 있어서도 에제키엘이 내다본 세 가지 선결과제가 아직 유효할 것입니다.
그러자면 이 땅에서 부활 신앙을 중심으로 모인 새 하느님 백성의 향후
사회적 실체와 전망이 나타나야 할 것인데, 이 꿈은 111년 전 어제
순국하신 안중근 토마스가 이미 밑자락을 깔아 놓은 바 있습니다.
그는 이토 히로부미의 위선적인 극동평화론이 한국과 청나라를 물론
일본의 장래까지도 망쳐 놓으리라고 내다보고서,
자신만의 동양평화론을 가톨릭 신앙에 입각하여 전개한 바 있습니다.
안중근 토마스가 자신의 목숨과 맞바꾼
동북아시아의 평화의 꿈이 우리 앞에 펼쳐져야 할 시점입니다.
그간의 정세변화를 감안한 신동양평화론 내지 동북아시아 평화의 꿈이
나와야 하겠으나, 일단 지금 시점에서 바라보건대, 부활 신앙에 투철한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부활 신앙을 사회적으로 증거하는 일이 먼저일 것이고,
이들이 알짜배기 새로운 교회가 되어서 최고선과 공동선이 구현된
민주 대한민국을 만들고 그리고 거기서 발산되는 매력으로
주변 민족들을 변화시키는 하느님의 작전이 나올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도 당신의 평화를 실현하는 당신의 백성이 반드시 필요하시기 때문에,
그 옛날 이집트나 바빌론에서처럼 당신의 경륜을 드러내실 것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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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27. 사순 5주간 토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미국의 화성 탐사선 ‘퍼시비어런스’호가 화성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지구에서 화성까지 4억 7천만 킬로미터를 7개월 동안 날아갔다고 합니다. 지금의 화성은 생명이 살기에는 척박한 환경이라고 합니다. 영하 60도에서 영하 166도의 기온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화성을 지구와 같은 환경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Terraforming)을 찾고 있다고 합니다. 화성과 태양 사이에 거대한 반사경을 세우면 화성의 온도가 올라 갈 수 있다고 합니다. 화성에 대기를 만드는 방법이 있다고 합니다. 화성에 고체로 있는 이산화탄소를 방출시키면 대기가 생길 수 있다고 합니다. 화성과 태양 사이에 인공자기장을 만든다고 합니다. 화성에 자기장이 생기면 태양풍을 막을 수 있다고 합니다. 물론 기술과 자본의 도움이 있어야 합니다.
문득 생각합니다. 지구의 환경을 잘 보존하고, 가꾸면 충분히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과학자들은 왜 화성으로 탐사선을 보내고, 화성의 환경을 지구와 비슷하게 만들려고 할까요? 인류가 화성에 탐사선을 보내고, 화성의 환경을 지구처럼 만들려는 것은 인류에게 ‘꿈’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꿈을 이루는 과정에서 새로운 기술이 만들어 질 것입니다. 꿈을 이루는 과정에서 생각의 지평이 넓어질 것입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이 있었습니다. 33년 전의 일입니다. 그런데 지금도 기억나는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어린이가 굴렁쇠를 굴리면서 운동장으로 달려가는 모습입니다. 찬란한 역사가 미래를 향해서 굴러가는 것 같았습니다. 언젠가 화성으로 휴가를 가는 날이 올지 모르겠습니다.
인류는 또 다른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꿈은 아브라함이 정든 고향을 떠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꿈은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 바다를 건너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꿈은 갈릴래아의 어부들이 그물을 버리고, 배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가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새로운 ‘꿈’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꿈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나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꿈을 말씀과 표징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새로운 권위가 있었습니다. 기존의 질서와 계명을 뛰어넘는 권위입니다. 안식일이 사람의 주인이 아니라, 사람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셨습니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가야파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가야파는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가야파는 어떤 사람일까요? 힘과 능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 힘과 능력을 자신을 위해서,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조직을 키우기 위해서 사용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힘과 능력을 이용해서 약한 사람들을 괴롭히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힘과 능력을 이용해서 가난한 이들의 것을 빼앗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요즘 이런 가야파를 다양한 모습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종교, 영화, 연극, 대학, 병원, 정치, 검찰, 군에도 가야파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십자가의 길 5처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간 키레네 사람 시몬을 묵상하게 됩니다. 키레네 사람 시몬은 어떤 사람일까요?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 이웃의 아픔에 동참하는 사람입니다. 불의에 대항하고, 정의를 위해서 투신하는 사람입니다. 소유하기보다는 존재하는 것에 의미를 두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런 키레네 사람 시몬을 다양한 모습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지진으로 피해를 입고 있는 현장에서, 내전으로 사람들이 죽어가는 현장에서, 굶주림에 지친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우리는 키레네 사람 시몬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식과 능력을 이웃을 위해서 사용합니다. 기꺼이 타인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제1 독서는 새로운 세상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 이제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나가 사는 민족들 사이에서 그들을 데려오고, 그들을 사방에서 모아다가, 그들의 땅으로 데려가겠다. 내가 그들을 구원하여 정결하게 해 주고 나면,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될 것이다. 나의 성전이 그들 한가운데에 영원히 있게 되면, 그제야 민족들은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처녀가 춤추며 기뻐하고, 젊은이도 노인도 함께 즐기리라. 나는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고 위로하리라. 그들의 근심을 거두고 즐거움을 주리라.”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있을까요?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과 함께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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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27. 사순 5주간 토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의 뜻
- 모두가 하느님의 섭리다 -
“하늘에 계신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하루에도 수없이 외우는 ‘주님의 기도’ 서두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예수님의 삶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기도입니다. 믿는 이들에게 우연은 없습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느님의 뜻은 아니라 해도 하느님의 허락없이 일어나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사謀事는 재인在人이요 성사成事는 재천在天이란 말도 생각납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뜻을 찾아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본질적인 일일지 깨닫습니다.
어제 교황청의 전속 설교가이신 칸타라메싸 추기경의 4차 사순시기 강론 역시 은혜로웠습니다. 교황님을 위시한 모든 고위 성직자들이 앉아 강론을 경청하는 모습도 경건하고 아름다웠습니다.
“모든 신학적이고 교의적인 토론을 넘어 예수님과의 진정한 사랑의 관계가 무엇을 뜻하는가? 인간 정신에 가장 위대하고 불가해한 신비는 하느님은 한분이시며 삼위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는 것이다. 그분은 불쌍하고 감사할줄 모르는 피조물인 나를 위해 자신을 바치신 분이다. 그리스도는 이념도 성격도 아닌 살아 있는 인격이다. ‘나’와 그분과의 ‘너’와의 인격적 관계로 들어가지 않으면, 예수님은 인격으로 알려질 수 없다.”는 요지의 강론이었습니다.
예수님과 우리의 인격적 관계가 얼마나 본질적인지 깨닫습니다. 예수님과의 깊어지는 일치와 더불어 하느님의 뜻도 선명히 드러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최고 의회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는 장면입니다. 하느님의 깊고 넓은 시야로 보면 이 또한 하느님의 섭리임을 봅니다. 결코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라자로를 다시 살리신 일이 예수님의 죽음에 직결됩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가야파 대사제가 하느님의 뜻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결국 자기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해의 대사제로서 예언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 군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그러니 이스라엘 민족만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시리라는 예언입니다. 누가 하느님의 이런 깊은 뜻을 헤아릴 수 있겠는지요! 사실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의 교회를 통해 서서히 실현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대로 다음 에제키엘 예언의 실현입니다.
“나는 그들과 평화의 계약을 맺으리니, 그것이 그들과 맺은 영원한 계약이 될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복을 내리고 그들을 불어나게 하며, 나의 성전을 그들 가운데에 두겠다. 이렇게 나의 거처가 그들 사이에 있으면서, 나는 그들의 하느님의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파스카의 예수님 자체가 영원한 평화의 계약이 되고 우리 가운데에 있는 살아 있는 성전이 됩니다. 참으로 파스카의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 아버지와 우리의 일치의 관계가 이루어집니다. 그러니 예수님과 우리의 인격적 관계가 얼마나 본질적인지 깨닫습니다. 제 졸시 ‘하늘과 산’이 바로 이런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를 잘 보여줍니다.
-“하늘 있어 산이 좋고
산이 있어 하늘이 좋다
하늘은 산에 신비를 더하고
산은 하늘에 깊이를 더한다
이런 사이가 되고 싶다
이런 사랑을 하고 싶다.”-
하늘이 예수님이라면 우리는 산입니다. 과연 날로 주님과 깊어지는 일치의 ‘예닮의 여정’인지 자문하게 됩니다. 어제의 새삼스런 깨달음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입니다. 이제 외로움은 그리움은 사라지고 함께 계신 주님의 현존감에서 오는 편안함, 기쁨과 감사가 저를 채우고 있다는 자각입니다. 텅 빈 허무나 공허가 아닌 텅 빈 충만입니다. 하여 요즘의 시에는 외로움이나 그리움이란 말마디나 내용이 거의 보이지 않는가 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과 우정의 사랑을 날로 깊이해 주십니다. ‘예닮기도’중 한 연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예수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선물의 하루이옵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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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27. 사순 5주간 토요일.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예수님의 사명이 보다 명확히 드러납니다.
"저 사람이 저렇게 많은 표징을 일으키고 있으니,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소?"(요한 11,47)
라자로를 살리신 기적에 대해 들은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걱정합니다. 예수님께 표징을 일으켜 보라고 요구하던 이들이 이제 와서 표징 때문에 두려움을 느끼니 아이러니합니다.
"예수님께서 민족을 위하여 돌아가시리라는 것과, 이 민족만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시리라는 것이다."(요한 11,51-52)
요한 복음사가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해 죽는 것이 낫다'는 그 해의 대사제 카야파의 이야기를 이렇게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이스라엘 민족이 무사할 것은 물론, 온 인류가 죄에서 해방되어 진정한 생명을 얻을 것이며, 주님의 죽음을 통해 인종과 언어와 민족과 문화를 달리하는 모든 이들이 하느님의 자녀로 모일 것이라는 신학적 해석입니다.
하느님의 숨을 받아 그분 모상으로 창조된 모든 인간은 한 아버지의 한 형제입니다. 예수님 십자가 아래로 모여든 인류는 이 형제애를 회복하여 하나의 민족이 됩니다.
제1독서에서는 흩어진 이스라엘을 다시 모아 한 민족을 만드신다는 주님의 뜻이 선포됩니다.
"한 민족으로 만들고, 한 임금이 그들 모두의 임금이 되게 하겠다."(에제 37,22)
"나의 종 다윗이 그들을 다스리는 임금으로서, 그들 모두를 위한 유일한 목자가 될 것이다."(에제 37,24)
이 예언은 비단 이스라엘에게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이는 다윗 집안에서 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흩어져 살던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의 사랑으로 다시 모으시어 한 민족이 되게 해 주신다는 의미 또한 포함하고 있지요. 온 인류는 한 아버지의 한 형제, 한 임금의 한 백성, 한 목자의 양떼로서 하나가 될 것입니다.
"나의 성전을 영원히 그들 가운데에 두겠다."(에제 37,26)
성전이신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어 구심점이 되어 주십니다. 하느님의 거처 주위로 모여든 우리는 영원히 그분의 백성입니다. "영원"이라는 말씀은 이 하느님 현존이 지상에서 천상으로 이어질 축복임을 확증해 줍니다. 우리는 이 땅 위에서도 주님을 중심으로 모인 한 형제, 한 백성이고,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서도 그러할 것입니다.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그리스도 죽음에 넘겨지셨네."(영성체송)
성주간을 시작하기에 앞서 말씀께서 예수님의 사명을 우리에게 각인시켜 주십니다. 이 기억을 붙잡고 당신과 함께 수난과 죽음의 길을 걷자고 초대하시는 동시에, 그러니 너무 슬퍼하지도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다독이시는 겁니다.
성주간을 하루 앞두고 몸과 마음과 영혼을 준비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길은 온전히 우리를 위한 사랑의 길이니 우리도 사랑을 다해 주님 곁에 머물 수 있는 은총을 청합시다. 이 말씀 묵상을 중심으로 연결된 우리 서로를 위해 기도하며 함께 나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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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27. 사순 제5주간 토요일. 이병우 루카 신부님.
"이렇게 하여 그날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요한11,53)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의회를 소집합니다.
그래서 많은 표징을 일으키고 계시는 예수님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에 대해 논의합니다.
그들이 그러고 있을 때, 그해의 대사제였던 가야파가 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해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요한11,49)
가야파의 이 말은 "예수님께서 민족을 위하여 돌아가시리라는 것과, 이 민족만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시리라는 것"에 대한 예언이 되었고, 그들은 가야파가 예언한 대로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합니다.
이 결의로 모두의 구원이라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기 위한 예수님의 본격적인 십자가 죽음의 여정이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많은 표징들은 우리를 살리기 위한, 우리를 회개로 이끌기 위한 표징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많은 표징들 가운데 하나이자, 그 마지막 결정체입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살리시려고 죽으셨습니다. 이렇게 우리를 위한 '희생양'이 되셨습니다.
하느님의 이 큰 사랑, 이 극진한 사랑을 기억하는 것이 '기도'이고, 이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리고 이 큰 사랑에 보답하는 길이 바로 '회개'입니다.
'회개'는 정말 어렵고 힘든 일입니다.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이 있어야 가능하고, 하느님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큰 사랑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미사 때 복음을 듣기 전 이렇게 환호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너희가 지은 모든 죄악을 떨쳐 버리고 새 마음과 새 영을 갖추어라."
너를 살리기 위한 예수님 십자가 죽음의 여정에 우리도 동참합시다! 그 동참이 바로 '나의 회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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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27. 사순 5주간 토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 앞에서도
의연히 당신의 길을 걸어가시는 예수님!
베타니아에서 일어났던 라자로 소생 사건을 목격한 사람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눠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조차도 지배하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의 아들 메시아라는 사실을 더 확고히 믿게 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 엄청난 기적 사건이 큰 두려움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들은 즉시 바리사이들에게 가서 베타니아에서 일어난 일을 낱낱이 보고했습니다.
베타니아의 기적 사건에 대한 보고를 들은 대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즉시 산헤드린,
즉 유다 최고 의회를 소집하였습니다.
산헤드린은 마카베오 시대부터 존속해오던 유다 백성의 통치를 맡은 최고의회였습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산헤드린은 하층 귀족을 대표하던 원로들, 전직 대사제들, 대사제를 배출한 가족의 일원인 대제사장들, 그리고 대부분 바리사이에 속해있던 율법학자들로 구성되었습니다.
로마 제국의 식민 지배 하에서 산헤드린은 유다인들을 다스리는 최고 기관이었습니다.
종교 문제와 관련해서는 로마 제국의 간섭을 받지 않고 관할했지만, 백성을 다스리는 제반 사항에 대해서는
제한된 권한을 지녔습니다.
예를 들면 산헤드린에서 죄수들에게 사형선고를 내릴 수는 있었지만 사형 집행과 관련해서는 로마 총독에게
일임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나름 당시 유다 사회 안에서 최고 엘리트들의 집합체였으니, 거기에 소속된 일원이라 한다면 다들 어깨에 힘 꽤나 주고 다니곤 했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소집된 산헤드린에서 다뤄졌던 구체적인 내용이 공관복음에는 정확히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해방절 이틀전에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이 군중들의 동요를 최소화하기 위해 예수님을 쥐도 새도 모르게 체포하자. 그리고 초스피드로 그를 제거하는 방법을 강구하자는 요지의 내용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단 요한 복음사가는 예수님을 올가미 속으로 밀어넣는 결정적인 사건으로 베타니아 기적 사건을 선택함에 대해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베타니아 사건은 백성들뿐만 아니라, 당시 유다 권력자들에게도 강력한 임팩트를 안겨준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산헤드린 구성원들은 전례없이 긴장하는 동시에 분노를 느끼며 예수님이라는 존재에 대한 큰 적개심을 품게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전보다 더 노골적이고 직접적으로 스스로의 신원에 대해 밝히고 있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숫자가 점점 더 늘어나고 있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으로 인해 유다인들은 믿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로 점점 분열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점을 산헤드린은 크게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만일 이러한 내분 상황이 로마 당국에 알려지게 될때 감당해야 할 고초도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그해의 대사제인 카야파는 자신도 잘 인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예수님의 운명에 대한 예언을 하게 됩니다.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요한 복음 11장 49절)
카야파는 자신도 모르게 앞으로 일어날 사건을 정확하게 선포하였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내려질 사형선고를 막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에게 사형선고를 내리는 것이었음을 선포한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 한 사람의 죽음이 이스라엘 전체 뿐만이 아니라 온 세상에 구원을 가져다 줄것임을 예언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죽음을 통해 가져온 생명은 이스라엘 백성뿐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민족들에게 선물로 주어진 것입니다.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 앞에서도 외면하거나 회피하지 않으시고 의연히 예정된 당신의 길을 걸어가시는 예수님을 우리도 기꺼이 따라나서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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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27. 전삼용 요셉 신부님. [사순 제5주간 토요일]
오늘 복음은 유다 지도자들이 의회에 모여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는 내용입니다.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분을 믿게 되면 로마인들이 자신의 나라를 짓밟게 되리라는 이유 때문입니다.
하지만 결국 그들이 멸망하게 만든 것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한 오늘의 회의 때문이었습니다.
살자고 한 회의가 멸망으로 이끈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렇다고 그 안에 성령께서 좋은 의견을 주시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회의 의장인 가야파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라고 말합니다.
요한은 “이 말은 카야파가 자기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해의 대사제로서 예언한 셈이다.”라고 평가합니다.
다시 말해 아무리 성령께서 도와주시려 해도 멸망의 길로 가는 잘못된 결정을 내리게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수없이 많은 회의를 합니다. 회의는 모두가 잘되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회의들이 결국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하는 탁상공론으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가정에서도 회의하고, 본당에서도 하고, 직장에서도 하고, 나라에서도 하는 게 회의인데 이 회의가 좋은 결정으로 이어지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가장 절실한 준비가 무엇일까요?
바로 ‘좋은 분위기’입니다.
그렇다면 좋은 분위기를 망치는 요인은 무엇일까요? ‘긴’ 회의입니다.
긴 회의 안에는 교만이란 것이 녹아있습니다.
길게 회의하면 더 좋은 결과를 내리라는 인본주의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회의가 길어지면 분위기는 나빠집니다. 기분이 좋을 때 빨리 끝내야 합니다.
알렉산더 대왕(Alexander)과 관련해 전해 내려오는 ‘고르디아스의 매듭’이란 이야기가 있습니다.
소아시아의 고대 국가 프리기아(Phrygia)의 고르디아스왕은 자신의 전차에 아주 복잡한 매듭을 묶어 두었습니다.
그리고 그 매듭을 푸는 자가 세계를 정복하게 되리라는 예언을 남겼습니다.
수백 년 동안 많은 사람이 매듭을 풀기 위해 애를 썼지만, 너무 복잡하게 묶인 매듭을 푸는 자는 없었습니다.
이후 알렉산더는 페르시아를 정복한 여세를 몰아 소아시아 지역까지 정복하며 고르디움에 이르렀고,
매듭에 대한 소문을 듣고는 단숨에 전차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몇 차례 매듭을 풀려고 했지만 쉽게 풀리지 않았습니다.
기분이 나빠지려는 찰라, 알렉산더는 갑자기 칼을 꺼내서 전차에 묶인 매듭을 단숨에 잘라 버렸습니다.
매듭은 전차에서 풀리게 되었고, 고르디아스의 예언처럼 훗날 알렉산더는 세계를 정복하는 왕이 되었습니다.
장차 ‘리더’가 될 사람이라면 자신의 기분을 잘 조절할 줄 알아야 합니다.
리더가 기분이 나쁘면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이 그 기분을 받아 모두 기분이 나빠지고 우울해집니다.
오늘의 회의 분위기가 그랬습니다.
두려움과 걱정, 그리고 근심과 미움이 뒤섞여 있었고 카야파는 그런 안 좋은 기분을 끌어올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죽이기로 함으로써 이스라엘의 멸망을 가져오는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회사에서 회의에 관한 이런 유명한 연구가 있다고 합니다.
돈을 잘 버는 팀은 회의를 잘 운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회의를 어떻게 잘 운영했다는 말일까요?
운영자의 능력도 있겠지만, 잘 운영되는 회의는 부정적인 언어보다 긍정적인 언어가
최소한 3배 이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긍정의 언어란 칭찬과 이해, 공감을 위한 질문과 같은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회의는 분위기도 좋고 결국엔 돈도 잘 버는 결정을 내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국회의 회의 장면을 보면 ‘저런 분위기에서는 좋은 판단이 나올 수 없겠다.’라는 생각이 저절로 듭니다.
그 이유는 오늘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한 유다 지도자들의 회의 분위기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안 좋은 분위기에서 좋은 결정이 나올 수는 없는 일입니다.
좋은 판단은 좋은 기분에서 나옵니다. 중요한 것은 회의는 ‘짧아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을 오래 할수록 좋은 결과를 내나요? ‘장고 끝에 악수 둔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10년 연애를 하고 재고 잰 끝에 결혼하여 1년 뒤 이혼하기도 합니다.
혹은 만난 지 3개월 만에 결혼하였는데, 의외로 잘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생각을 오래 하지 않는 것이 겸손입니다.
생각을 많이 할수록 기분이 안 좋아지고 그러면 잘 되자고 한 회의가 멸망으로 이끄는 결정을 내릴 가능성이 커집니다.
기분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하와가 뱀과 대화할수록 기분이 좋아졌나요?
‘왜 다 주시지 선악과는 바치라고 하셨나?’라며 기분이 나빠졌습니다.
그래서 안 좋은 결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그들을 멸망으로 이끌었습니다.
자기 생각에 신뢰를 두는 행위는 하느님을 덜 믿는 행위입니다.
마지막으로 생각을 많이 하면 왜 기분이 좋아질 수 없는지를 말하겠습니다.
인간의 미래는 자신들이 하는 지금의 판단에 달렸습니다.
판단은 기분에 좌지우지됩니다.
그런데 기분은 욕구에 달려있습니다.
욕구가 생기면 기분이 안 좋아집니다. 두려움이 커집니다.
내가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잃게 될 두려움부터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하는 판단들은 잘못되게 되어있습니다. 생각은 이 욕구들을 성장시킵니다.
하와가 뱀과 대화할수록 잘못된 결정을 내릴 가능성이 커진 것과 같습니다.
기도하고 단순하게 결정합시다. 기도는 오래 하고 결정은 빨리 내립시다.
이것은 개인에게도 해당하고 공동체의 회의에도 해당합니다.
기도를 자주, 그리고 오래 하면서 하느님의 능력에 맡기기보다는 인간의 능력에 집착하는 교만에 빠지면 안 됩니다.
그렇게 해서 잘 될 리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예수님을 죽이기로 한 오늘 복음의
산헤드린 회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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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27. 사순 5주간 토요일.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기도와 사랑, 그리고 침묵….
당나라 시인 백거이의 시 “비파행”에 나오는 한 구절입니다.
“이 순간 소리가 없음이 세상의 모든 소리를 이기네.”
즉 세상의 모든 소리를 이겨내는 것은 침묵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침묵 중에 가장 아름다운 침묵은 예수님의 침묵입니다.
마치 예수님의 침묵은 “털 깎는 사람 앞에서 서 있는 양처럼 아무 말 없이 십자가를 지셨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침묵에 소리는 저희를 살리시기 위해 아무 말 없이 짊어지고 가시는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구약 성경 이사야서 53장 7절 말씀입니다.
“학대받고 천대받았지만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털 깎는 사람 앞에 잠자코 서 있는 어미 양처럼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오늘 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본 유다인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들 가운데에서 몇 사람은 바리사이들에게 가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알렸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어떤 일이겠습니까?”
“죽은 라자로를 살리시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찍이 라자로가 병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이 병이 죽을병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그 병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뜻은? 당신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이시고, 무덤 속에 있는 라자로를 살리시는 일이었습니다.
즉, 라자로의 부활과 예수님의 죽음을 서로 바꾸어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분명히 하느님의 뜻인 십자가의 예수님께서 지금 저희와 함께 계신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는 믿음으로, 십자가의 예수님을 심중에 담아놓은 믿음으로 살아갈 때, 그 자체가 하느님의 선물이고, 하느님의 은총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을 믿으면서도 죽은 라자로를 살리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은 유대인들이 있는 것처럼, 세례를 받고 믿음은 가졌지만. 어떤 이유가 있어서인지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고, 십자가의 예수님을 자신의 심중에 담아놓지 않고 자기 뜻대로만, 자신의 눈 잣대로만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고운님들!
이제 우리는 죽은 라자로를 살리신 예수님이 왜, 죽으시는지 물어야 합니다.
썩어서 냄새나는 라자로를 살리신 예수님이 왜, 죽음을 받아들이시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그 주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시는 것입니다.
그 죽음을 믿는 것이 기적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어 이루어지는 선물입니다.
그래서 저희는 기적으로 살지 말고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침묵으로 내려가고, 져주고, 내 성질과 욕심을 죽이는 것만이 저 자신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침묵하는 소리로 살아가셨습니다. 침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행복할 때에도, 그리고 극도로 억눌렸을 때 우리 영혼이 마지막으로 의지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저 두레박 사제도 사순시기 내내 저 자신에게 묻었습니다.
“너, 잘살고 있는가?” “너, 잘 믿고 있는가?”
답을 얻을 수가 없었지요. 힘이 빠졌습니다.
어제 오후에 묵주 기도와 성체 조배를 하고 난 후 영적 일기를 준비하고, 시편도 공부하면서 물었습니다.
“잘살고 있는가?” “잘 믿고 있는가?”
그러면서 저에게 돌아오는 말씀은 “침묵하는 소리” 이었습니다.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께서 답을 주셨는데 제가 못 알아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잘살고 있는가?” “잘 믿고 있는가?”라는 답이 “침묵하라.”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을 믿어 제가 원하는 것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제가 믿는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하여 그분이 원하시는 것을 이루어드리는 것이 “침묵하는 소리” 임을 깨달았습니다.
저 두레박 사제도 침묵하는 소리로 주님의 말씀과 뜻을 잘 받들어 살고 믿으면서 몸과 마음이 아픈 고운님들과 간호하는 고운님들, 그리고 고운님들의 자녀에게 주님의 치유와 회복의 은총이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영적일기를 마무리하면서….
성 주간을 앞두고 저희를 살리시기 위해 아무 말 없이 짊어지고 가시는 십자가 앞에서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사랑하고 또 사랑하고, 그리고 침묵하고 또 침묵하면서 고운님들이 예수님과 함께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는 치유와 회복의 은총을 누리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 성자와 성령께서는 고운님들에게 강복하시어 길이 머물게 하소서.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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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27. 사순 5주간 토요일 복음. 강만연 형제님.
동서고금의 역사를 보더라도 인간은 권력이라든지 통치권 때문에 자기에게 도전적인 인물이 있으면 숙청을 과감하게 자행하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백성을 학살도 하곤 합니다. 세상에서 권력이라는 것은 이상적인 현실에서는 매력적일 수가 있지만 실제 그 현실을 들여다보면 권모술수가 난무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마음에 평화도 없을 때가 많습니다. 절대 권력으로 통치를 한다고 하더라도 언제 반대파 세력으로부터 숙청을 당할지 마음이 살얼음판을 걸을 정도로 위태위태한 모습으로 살 수도 있습니다. 권력욕에 빠진 사람들은 그렇게 해서라도 권력을 잡고 싶어 합니다.
사람마다 가치관이 다 다르기 때문에 뭐라고 일률적으로 단정을 할 수는 없겠지만 행복이라는 기준에서 봤을 때 그들은 그게 행복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행복은 마음에 평화가 있고 자기의 삶에 만족하는 삶이 주어질 때 행복을 느낄 수가 있는데 과연 그렇게 사는 게 진정으로 행복한 삶일지 의문이 들 때도 있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이 길다면 길 수가 있고 또 짧다면 아주 짧은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평균 80년의 삶을 산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수면으로 보내는 시간이 거의 삼분의 일이 됩니다. 나머지 시간 중에서 학업으로 보내는 시간을 빼고 나면 실제 인간의 삶은 불과 얼마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한 사람의 인생을 인간적인 관점에서 결산을 한다고 하더라도 자기의 개인적인 인생에서도 어떻게 한평생을 가치 있는 삶을 살았는가에 따라 훌륭한 삶을 살았는지 판가름할 수가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한 번쯤은 권력이 되었든지 굳이 권력이 아니더라도 남을 통솔할 수 있는 위치에 올라가고 싶어 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지금까지 한국 현대사에 한 획을 그은 사람들의 평전을 대학 다닐 때부터 봐왔습니다만 모든 사람이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런 인물들이 마지막에 자기 삶을 되돌아봤을 때 한 가지 후회까지는 아니지만 많이 아쉬워하는 공통된 부분이 있다는 걸 느꼈습니다. 외부적으로 드러나는 부와 권력, 명예도 중요하지만 이런 것을 얻으려고 치열하게 어떤 대상과 끊임없이 싸워서 그런 위치에 올라갔다고 해도 막상 죽음을 앞두고 자기의 삶을 회고해봤을 때 한편으로는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인데 굳이 그렇게까지 인생을 살 필요가 있었나 하고 아쉬워하는 모습을 봤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느낀 게 사람은 살면서 어떤 인생관을 가지고 사는가도 행복의 기준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세상적인 기준으로 봤을 때는 그런 사람이 상당히 행복할 것처럼 보이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면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최고의회를 소집해서 예수님을 해하려고 모의를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이유는 예수님으로 인하여 그들의 안위에 위협이 될 것이라는 이유 때문입니다. 신앙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수석 사제들과 바이사이들처럼 예수님이 설사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라고 한다해도 자기들의 안위 때문에 세상적인 기준으로 보면 얼마나 좋은 일도 많이 하시고 했는데 그렇게까지 박해를 하면서 심지어는 죽음으로까지 몰고 가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인간이 얼마나 무지하고 잔혹한지 절실히 느낍니다.
천년만년 사는 인생도 아니고 잠시 인간의 옷을 입고 살다가 가는 인생인데 이왕 사람으로 태어난 인생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인데 신앙 안에서 하느님을 바라보다가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보려고 노력하는 삶을 사는 인생이 행복한 인생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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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27. 사순 5주간 토요일. 김 로마노 형제님.
사순 제5주간 토요일 제1독서(에제37,21ㄴ~28)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나가 사는 민족들 사이에서 그들을 데려오고, 그들을 사방에서 모아다가, 그들의 땅으로 데려가겠다. 그들을 그 땅에서, 이스라엘의 산악 지방에서 한 민족으로 만들고, 한 임금이 그들 모두의 임금이 되게 하겠다. 그리하여 다시는 두 민족이 되지 않고, 다시는 결코 두 왕국으로 갈라지지 않을 것이다." (21ㄴ~22)
에제키엘서 37장 21ㄴ절, 22절은 남북 선민의 본토 귀환과 통일 국가 형성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그중 37장 21ㄴ절은 하느님께서 남부 유다 백성들을 바빌론에서 구원하시고 그들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실 것이라는 내용이다.
그런데 에제키엘서 37장 21ㄴ절은 에제키엘서 36장 24절에서 언급된 것과 동일한 동사가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외의 단어들도 거의 비슷하게 다시 사용하고 있다.
에제키엘서 36장 24절은 하느님께서 에제키엘에게 직접 말씀하신 내용을 그대로 기록한 것이고, 에제키엘서 37장 21ㄴ절은 하느님께서 바빌론 유다 공동체에게 어떻게 말할 지를 가르쳐 주신 내용이기 때문에 주어와 목적어의 인칭만 바뀌었다고 볼 수 있다.
'나는 너희를 민족들에게서 데려오고 모든 나라에서 모아다가, 너희 땅으로 데리고 들어가겠다.' (에제36,24)
또한 회복된 남부 유다 백성을 우상 숭배 등의 죄에서 정결하게 할 것이라는 에제키엘서 36장 25절의 내용이 에제키엘서 37장 23절에 거의 동일하게 사용된다. '그리고 너희에게 정결한 물을 뿌려, 너희를 정결하게 하겠다. 너희의 모든 부정과 우상에게서 너희를 정결하게 하겠다.'(에제36,25)
이러한 유사성은 여기서 거듭 제시되는 내용이 반드시 성취될 것임을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에제키엘서 37장 21ㄴ절에서 사용되는 주어는 '주 하느님'으로 되어 있는데, 관심을 촉구하는 표현 '힌네'(hinne; behold; '보라')로 시작할 뿐만 아니라 주어를 특별히 강조하는 1인칭 대명사를 '아니'(ani; '내가')가 사용되고 있다.
즉 인도하고 모으고 돌아가게 하시는 일을 이루시는 분이 바로 전능하신 주 하느님이심을 강조하면서 이 일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본절에서 사용된 표현들 중에서 '떠나가 사는 민족들 사이에서', '사방에서'라는 표현은 선민이 처한 현재의 암울한 상황을 나타내는데, 이것은 선민이 마땅히 있어야 할 삶의 자리를 잃어버렸음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그들의 땅으로'에 해당하는 '아드마탐'(admatham; their own land)은 문자적으로 '그들의 땅'(그들이 소유한 땅)이라는 의미로서 그들이 마땅히 차지하고 있어야 할 곳이라는 뉘앙스를 전달한다.
결국 이러한 표현은 한편으로 그들이 본래 있어야 할 삶의 자리에서 쫓겨났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면서, 하느님의 절대적 구원으로 다시 본래의 삶의 자리로 돌아오게 된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이것은 그들이 쫓겨나게 된 원인을 상기시키는데, 이어지는 에제키엘서 37장 23절에서 이렇게 선민의 삶의 자리에서 쫓겨나게 하는 근본적인 원인이 없어지는 것을 나타내는 정결 회복과 하느님과의 관계 회복이 예언된다.
에제키엘서 37장 22절에서는 단순히 고국에 돌아가게 되는 것만이 아니라 과거의 잘못된 역사가 바로 잡아져서 통일 왕국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이 예언된다. 즉 하느님께서 선민에게 베푸실 회복은 단순히 과거에로의 회귀가 아니라 그 이상의 완전하고도 궁극적인 것이 될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회복의 면모는 에제키엘서 37장 25절의 '자자손손이 영원히', '영원히', 에제키엘서 37장 26절의 '영원한 계약', 에제키엘서 37장 28절의 '영원히'라는 표현에서도 거듭 강조된다.
'그들을 그 땅에서, 이스라엘의 산악 지방에서 한 민족으로 만들고, 한 임금이 그들 모두의 임금이 되게 하겠다. 그리하여 다시는 두 민족이 되지 않고, 다시는 결코 두 왕국으로 갈라지지 않을 것이다'(22)
에제키엘서 37장 21ㄴ절에서 흩어진 남부 유다 백성이 바빌론으로부터 해방되어 고국 땅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내용을 다룬데 반해서, 에제키엘서 37장 22절은 그들이 고국 땅에서 북부 이스라엘과 남부 유다로 나뉘지 않고 한 민족, 한 나라를 유지할 것이라는 내용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에제키엘은 한 민족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한 임금에 대해서도 강조하는데, 이것은 에제키엘서 37장 24절 이하의 내용에서 나오는 다윗 왕으로 상징되는 왕, 즉 메시야가 다스리는 메시야 왕국으로 회복되어야 한다는 내용에서도 언급된다.
에제키엘은 이러한 온전한 하느님 나라의 회복을 강조하기 위해 에제키엘서 37장 22절 상반절에서 이스라엘이 한 민족으로 세워지고 한 임금이 다스리게 될 것임을 언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후반절에서 절대로 두 민족으로 나뉘거나 두 왕국으로 갈라지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강조한다. 즉 같은 의미의 내용을 긍정문과 부정문으로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본문에서 '그들을 ~ 만들고'에 해당하는 '웨아시티 오탐'(weasithi otham)을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그리고 내가 그들을 ~으로 만들 것이다' (and I will make them)가 된다. 즉 하느님이 주어이고 선민들이 목적어가 되어 하느님께서 주도적으로 역사하시는 측면이 보다 강조되어 있는 표현이다.
그리고 본문에서 '그 땅에서, 이스라엘의 산악 지방에서'라는 표현이 사용되고 있는데, 여기서 '산악 지방에서'로 번역된 '뻬하레'(behare; on the mountains of)의 의미를 찾아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산'은 공권력이 잘 미치지 못하는 곳이며 우상 숭배의 자리로 언급되는 곳이고, 북부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가 바로 '산'으로 언급되기도 한다.
따라서 여기서 원문상 복수로 되어 있는 '모든 산에서'에 해당하는 표현은 결국 이스라엘의 구석 구석까지 조금도 반역의 기운을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완전하고도 철저한 신정(神政)통치가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완전한 신정(神政)왕국이 세워졌던 때가 이스라엘 역사에 결코 없었지만, 그때 가장 근접하다고 할 수 있는 때가 다윗 임금의 통일 왕국 시대라고 볼 수 있다.
그 당시가 온 이스라엘이 다윗의 영토 아래 통일 국가를 이루어서 우상 숭배를 하지 않고 하느님을 진정한 왕국의 통치자로 섬기던 때였다. 따라서 회복된 새로운 시대의 왕을 다윗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에제37,24).
사순 제5주간 토요일
인간의 지혜로 쌓는 신앙, 부서질 바벨탑입니다.
(요한11,45-56)
45 마리아에게 갔다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본 유다인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 죽은 라자로를 살리신 일입니다. 육에서 잠시 살아난 것을 믿은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대속으로 죽으시고 부활하시어 우리의 생명이 되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을 믿으면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믿으면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을 믿는 것입니다.(요한11,25~)
46 그러나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은 바리사이들에게 가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알렸다. 47 그리하여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의회를 소집하고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저렇게 많은 표징을 일으키고 있으니,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소?
= 구원의 말씀 양식인 그 표징의 의미를 깨달았다면 기뻐했을 것입니다.
48 저자를 그대로 내버려 두면 모두 그를 믿을 것이고, 또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의 이 거룩한 곳과 우리 민족을 짓밟고 말 것이오.”
= 사제, 바리사인들은 예수님을 믿게 될 것을 두려워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사와 윤리의 그들의 그 의로움을 부인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가르침이 거짓, 위선이라 하셨기 때문입니다.(루가12,1)
(요한8,44-45.47) 44 너희는 너희 아비인 악마에게서 났고, 너희 아비의 욕망대로 하기를 원한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로서, 진리 편에 서 본 적이 없다. 그 안에 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가 거짓을 말할 때에는 본성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가 거짓말쟁이며 거짓의 아비기 때문이다. 45 내가 진리를 말하기 때문에 너희는 나를 믿지 않는다. 47 하느님에게서 난 이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은, 너희가 하느님에게서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 자신들의 의로움, 제사와 윤리 그 법을 지키기 위해 예수님을 죽이려 합니다. 그 자신의 것을 버리고 따라라 하셨던 예수님 입니다.(마태16,24) 그러나 제자들 역시 끝까지 버리지 못하고 양다리 신앙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 결과 가 베드로는 세 번이나 예수님을 배반합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입니다.
미사를 드리지 못하니 안절부절하며 걱정들 합니다. 예수님 때문이 아닙니다. 혹여 미사를 드리지 못하면 내 것을 지키지 못할까 두려운 것입니다.
(요한4,21.23) 21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아, 내 말을 믿어라. 너희가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닌 곳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23 그러나 진실한 예배자들이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사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이들을 찾으신다.
= 말씀이 예수님 입니다.(요한1,14) 그 예수님께서 영으로 내 안에 계신 내가 성전입니다.(1코린6,19)
그러면 성령 안에서 말씀을 하느님의 뜻으로 깨닫게 된다면 그것이 하느님께서 찾으시는 완전한 예배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 없으니까 미사를 드리러 성당에 가지 않으면, 그 내 행위를 하지 않으면 불안한 것입니다. 성경을 모르고 사람의 규정과 교리로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입니다. 아닌가요?
(로마10,3) 하느님에게서 오는 의로움을 알지 못한 채 자기의 의로움을 내세우려고 힘을 쓰면서, 하느님의 의로움에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49 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그해의 대사제인 카야파가 말하였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50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51 이 말은 카야파가 자기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해의 대사제로서 예언한 셈이다. 곧 예수님께서 민족을 위하여 돌아가시리라는 것과, 52 이 민족만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시리라는 것이다.
= 이 부분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한 하느님의 뜻입니다.(에제37,21) 하느님의 뜻은 깨닫지 못하고 제사 행위와 절기 기념일 축제일 안식일 까지 행위로 하는 그 죄를 지었기에 흩으셨던 그들을 다시 데려 오신다는 말씀입니다.(이사1,2-14참조) 물론 그들이 잘해서 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새 계약, 그 사랑으로 입니다.(예레31,31~참조)
53 이렇게 하여 그날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
= 우리에게 일어나는 사건들을 맞이할 때, 나는 예수님을 죽이기로 작정한 적은 없는지, 곧 내뜻을 지키기 위해 예수님의 뜻을 무시해 버린적은 없는지~ 솔직히 우리는 매 순간 예수님의 뜻을, 말씀을 배반하고 죽이며 살아갑니다.
사도 바오로의 고백입니다.
(로마7,18-24) 18 사실 내 안에, 곧 내 육 안에 선이 자리 잡고 있지 않음을 나는 압니다. 나에게 원의가 있기는 하지만 그 좋은 것을 하지는 못합니다. 19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 20 그래서 내가 바라지 않는 것을 하면, 그 일을 하는 것은 더 이상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자리 잡은 죄입니다. 21 여기에서 나는 법칙을 발견합니다. 내가 좋은 것을 하기를 바라는데도 악이 바로 내 곁에 있다는 것입니다. 22 나의 내적 인간은 하느님의 법을 두고 기뻐합니다. 23 그러나 내 지체 안에는 다른 법이 있어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고 있음을 나는 봅니다. 그 다른 법이 나를 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24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 죽음에 빠진 몸, 당시에 사형 당해 죽은 사람과 함께 묶는 형벌이 죽음에 빠진 몸 이랍니다.
지금 사도와 달리 죄인이 아닌 사람이 있습니까? 성경도 여러 곳에서 사람은 모두가 죄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로마7,25)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나 자신이 이성으로는 하느님의 법을 섬기지만, 육으로는 죄의 법을 섬깁니다.
= 그 죄, 불의를 용서하시기 위해 그 불의가 되시어 죽으신 그 예수님을 믿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종교행위로 때우려 했던 잘못, 위선의 모습을 깨닫고 말씀 속에 숨겨진 하느님의 뜻, 불의를 용서하시기 위해 당신의 외아들 예수를 속죄 제물로 십자가에서 죽게하신~ 우리의 지각으로는 깨달을 수 없는 그 사랑을 받읍시다.
그리고 그 사랑에 감사드리는 신앙을 삽시다. 그것이 참 신앙, 참 예배입니다.
지금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로 ‘그때’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아닌 사람들의 뜻으로 쌓고있는 바벨탑을, 카파르나움을 부수고 계심을 깨달읍시다. 아멘.
사순 제5주간 토요일 복음(요한11,45~56)
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그해의 대사제인 카야파가 말하였다. "여러분은 아무 것도 모르는군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이 말은 카야파가 자기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 해의 대사제로서 예언한 셈이다. 곧 예수님께서 민족을 위하여 돌아가시리라는 것과, 이 민족만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시리라는 것이다."(49~52)
요한 복음 11장 49절과 52절은 '그해의 대사제', 즉 예수님의 처형이 논의되었던 그 시점의 대사제인 카야파가 산헤드린 최고의회의 의원들에게 한 말이다.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과 같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간의 의논은 분분하지만, 어떤 구체적인 해결책도 제시되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카야파가 나선 것이다.
카야파는 먼저 그들이 아무것도 지각하지 못하고 있음을 질책하였다. '여러분은 아무 것도 모르는군요."(You know nothing at all)라는 그의 말에 최고 의회 의원들 가운데 적지 않은 이들이 모욕을 느꼈을 것이다.
그들은 이스라엘에서 내노라하는 지성인들인데, 이와 같이 '무식하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카야파는 현안 문제를 일사분란하게 처리하지 못하는 최고 의회 의원들에게 답답함을 느끼고, 해결책을 제시하기에 앞서서 그들의 정책적 대안 부재를 질책했던 것이다.
전임 대사제 안나스의 사위이자 후계자로서 18년 동안(A.D.18~36년) 대사제 직책을 행한 카야파가 예수님을 제거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려하는 사태가 발생할 경우에 가장 큰 타격을 입게 될 사람이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그는 자신이 누리고 있는 지위와 특권을 잃고 싶지 않았고, 설사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할지라도 그는 따르고자 하지 않았다. 종교든, 국민이나 국가를 빙자하든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본질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
이렇게 해서 사두가이의 수장인 대사제가, 3년 내내 주로 예수님과 첨예하게 대립했던 바리사이들을 대신하여 서서히 최종적인 박해의 주체로 나타난다.
대사제 카야파는 왜 시원한 대안이 제시되지 못하는지 그 문제점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당시 예수님은 백성들에게 유익하고 반드시 필요한 존재였다.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이 포도주로 변하고, 태생 소경이 치유되며, 죽은지 나흘이 되어 냄새가 퀄퀄나는 나자로를 살려내시는 예수님께서는 어느 누구보다 백성들에게 필요하고 유익한 존재였다.
하지만 백성들에게 유익할수록 상대적으로는 산헤드린 최고 의회에게는 불리한 존재였다. 예수님의 존재는 자신들의 지배와 기득권적 지위, 가르침과 권위 등 그들이 누리고 있는 기반을 총체적으로 위협하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을 제거할 생각을 하니 명분이 없고, 예수님 편에 서서 명분을 존중하자니 자신들의 재 기반이 위험했다. 이것인 당시 산헤드린 최고 의회의 딜레마였다.
이에 대해 대사제 가야파가 나름대로의 처방을 내린 것이다.
첫째, 그가 내린 처방의 요지는 철저하게 산헤드린 최고 의회의 유익만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최고 의회는 백성들의 유익이나 필요를 고려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으며, 또한 무죄하신 예수님을 희생시켜야 하는 데 따르는 양심의 가책을 고려할 필요도 없었다.
둘째,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희생이 불가피한데, 그것은 의외로 간단해서 그럴듯한 명분을 만들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당장에는 백성들에게 큰 호응으로 받아들여질지 모르지만, 이러한 백성들의 절대적인 지지와 호응은 결국 로마인들을 자극하여 민족적 멸망을 자초하게 될 위험한 인물이다.
예수님깨 대해서는 이렇게 치부만 하면 그만이고, 그렇게 하고 나면 다음의 일들은 쉽게 진전될 수 있는 것이다.
요한 복음 11장 50절의 '위하여'로 번역된 전치사 '휘페르'(hyper; for)가 소유격을 지배할 때는 '위하여'라는 뜻도 있지만, '~대신에'(instead of), '~의 이름으로'(in the name of), '때문에'(for the sake of) 등의 의미로 쓰인다.
그래서 이것을 '백성 앞에', '백성 대신에', '백성을 위하여'로 번역할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라면, 적당한 명분을 내세워 얼마든지 다른 사람을 희생시킬 줄 있음을 보여 주는 표현이다.
또한 '멸망하는 것보다'에 해당하는 '메 ~ 아폴레타이'(me ~ apoletai; not~ perish)에서 '아폴레타이'(apoletai)는 '아폴뤼미'(apollymi)의 부정 과거 가정법 중간태이다.
'아폴뤼미'(apollymi)의 기본적인 뜻은 '파괴되다', '멸망하다', '죽다' 등인데, 부정어 '메'(me; not)와 함께 쓰여서 이것을 부정한다. 즉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처형이 불가피하다는 주장이다.
70인역 (LXX)에서 이 동사는 히브리어 '아바드'(abad)의 역어로 자주 쓰였는데, '아바드'(abad)역시 '잃어버리다', '멸망하다', '파괴되다'는 뜻으로 쓰인다.
유대교를 상징하는 최고 의회의 지도자의 입에서 나온 이 말은 당시 유대교의 도덕성이 얼마나 형편없는지를 보여 주며,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러한 대사제의 발언이 거의 비판없이 산헤드린 최고 의회에서 받아들여지고, 이것을 기점으로 예수님을 죽이려는 모의가 급물살을 타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카야파는 역사상 유래를 찾기 어려운 불경건하고 의롭지 못한 사람이었지만, 대사제인 그를 통해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는 사실은 놀랍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과 당신의 백성을 중재하는 임무를 지닌 대사제의 말을 사용하여 유일 중재자요 중보자이신 예수님의 사명을 밝히는 놀라운 예언을 하도록 하신 것이다.
카야파는 실제로 자신의 정치적 입지의 위협을 막고자 예수님을 희생양으로 삼자는 의미로 말했다. 하지만 그 말 속에는 자신도 깨닫지 못한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역사의 주관자이신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가장 합당하지 않은 사람을 통해서도 말씀하실 수 있는 분임과 악한 자의 말까지도 구속 사업의 의미를 나타내는 데 유용하게 쓰실 수 있는 분임을 발견하게 된다.
하느님께서는 필요에 따라 하느님을 찾지 않는 사람들도 당신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 도구로 자주 사용하신다(판관3,8.12.13; 4,1~3; 6,1~6; 10,7~9; 13,1; 이사41참조).
카야파는 우리가 아는 대로 예언자가 아님은 물론이고, 경건하고 의로운 사람도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입술이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미래의 일을 예언하는 도구가 되었던 것이다(사도23,3~5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