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912. 묵상글 들 ( 연중 제24주일. -그리스도적인 사람과 사탄적인 사람.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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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12. 연중 제24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그리스도적인 사람과 사탄적인 사람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야 한다."
연중 제24주일은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가?'가 주제입니다.
그리고 이에 대해 이사야서는 하느님 말씀을 거역하지 않는 자,
"주 하느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시니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수난을 피하거나 거부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수난을 각오하는 자,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수치를 당하지 않는 자라고 얘기합니다.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는 우선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분입니다.
여기서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단지 물리적인 귀를 닫지 않고 열어놓는
그 정도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실천하는 것 곧 순종하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는 정면으로 거부하거나 수락하기 어려울 때 못 들은 척 하는데
그리스도는 귀를 활짝 열고 하느님 말씀과 뜻을 적극 수용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하느님 뜻의 수용은 모욕과 수모와 고통의 수용입니다.
이에 대해 우리는 반감이 들고 반발이나 반박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꼭 이렇게 죽어야 하고 모욕당해야 하고
고통당해야 하는 우울한 거냐고. 즐겁고 유쾌할 수는 없냐고.
그렇습니다.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참행복을 위해서라면 죽음도 모욕도 고통도
수용할 수 있어야 하고 편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제가 자주 주장하지요.
참행복은 무조건이어야 한다고, 돈이 있어도 행복, 없어도 행복,
웃어도 행복, 울어도 행복, 모욕을 받아도 행복, 칭찬을 들어도 행복해야지
돈과 웃음과 칭찬만 있어야 행복하고 가난과 슬픔과 모욕은 없어야 한다면
그것은 조건이 있는 행복이요 쉽게 무너지는 행복이니 참행복이 아니지요.
그뿐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칭찬과 즐거움만 있기를 바라는 것은 천상 지향적이지 않고
이 세상에서 받을 상을 다 받는 것이고 그래서 육적입니다.
프란치스코는 육의 영과 주님의 영의 이끌림 차이를 이렇게 얘기합니다.
"육의 영은 사람들에게 겉으로 드러나는 신앙심과 성덕을 원하고 열망하는데
이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습니다. 이와 반대로 주님의 영은 육이
혹독한 단련과 모욕을 당하기를 원하며, 멸시받고 수치당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항상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신성한.....사랑을 얻기를 갈망합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이렇게 주님의 영으로 수난을 각오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처럼 수치와 모욕을 줘도 수치와 모욕을 당하지 않습니다.
당하는 것은 원하지 않을 때 당하는 것이지
스스로 원하면 당하지 않고, 더 나아가 사랑으로 원하면 사랑을 받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적인 사람인데 수난을 거부하는 사랑을 하면
오늘 베드로 사도처럼 사탄적인 사람이 됩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는 스승 예수를 사랑하였지만
수난의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음으로써 사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그리스도적인 사람과 사탄적인 사람 중에
나는 어떤 사람인지 돌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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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12. 연중 제24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은 연중 제24주일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우리 자신의 정체성에 따른 행동과 결단을 요구합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은 초대 은수자와 수도자들이 근본적으로 자신에게 던졌던 질문입니다. 참된 나의 정체성을 지니기 위해서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겸허한 질문과 아울러 다른 사람들의 판단의 노예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많은사람들은 ‘자기는 누구인가’에 대한 자기 자신에 대해 겸허히 바라보기 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자기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에만 관심을 갖습니다. 이렇게 될 때 자신의 도덕과 선행은 다른 사람들의 눈에 아름답고 착하고 정직하고 종교적인 사람으로 보이기 위한 장식물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종교적으로 보인다 하더라도 그것이 참된 신앙인으로 이끌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행복하다고 생각하다고 생각하더라도 그것으로 자신이 행복해 질 수 없습니다. 다른 이들의 판단에 좌우되면 자신의 모든 삶을 잃게 될지도 모릅니다. 행복하다고 생각되는 것보다는 행복에 주의를 기울이고, 아름답다고 생각하기 보다는 아름다움을 바라다 보아야 합니다.
푀멘 교부가 어느 날 요셉 교부에게 “수도자가 되는 길을 일러 주십시오.”하고 청합니다. 요셉 교부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곳에서나 저 위에서 안식을 누리고 싶다면, 어떤 상황에서든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서만 묵상하고 남을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무엇보다도 겸손에서 비롯됩니다. 겸손은 하느님께서 누구이시고 하느님 앞에서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완전히 깨달을 수 있도록 인간을 이끌어 줍니다. 겸손은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해주기 때문에 타인에 대한 판단을 하지 않습니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참된 자신의 정체성을 묻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아는 사람이며 다른 이들의 잘못을 탓하지 않습니다. 남에 대한 판단은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는 표지입니다. 자신의 죄를 겸허히 바라보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죄를 바라보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의 참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인정할 수 있는 사람만이 영혼의 평안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상처를 통해서 내가 참으로 누구인가를 알게됩니다. 바로 그곳에서 나의 마음을 만날 수 있으며 좀더 활동적이 되고 숨겨진 보물인 나의 참된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상처를 통해서 내가 스스로 덮어쓴 가면들을 부수어 그 안에 있는 참된 모습이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버리라’는 의미는 자기를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나아가 ‘대단한 사람’이라든가 훌륭한 신앙인이 되어보겠다는 생각마저 포기하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 다시말해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에 대해 언제나 묵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을 따르기 위한 완전한 자아포기입니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 “나는 아무것도 아니며, 내 안에는 예수님이 계실 뿐이다”는 바로 이러한 겸헌한 대답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깨닫고 일상에서 실천으로 드러나기를 오늘 복음은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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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12. 연중 제24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우리는 오늘도 길을 걷습니다. 누군가의 뒤를 따라 걷고 있으며, 단지 뒤를 따라 걷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분과 동행하여 걷고 있습니다. 또한 홀로서 그분을 따라 걷고 있는 것이 아니라, 동료들과 더불어 그분을 따라 걷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그 길을 동행하여 걸으면서 스승이 제자들에게 “스승을 따르는 길”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줍니다. 곧 ‘당신이 가는 길’과 ‘참된 제자의 길’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줍니다. 더구나 이 가르침은 스승께서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죽음의 행진을 막 시작하면서 말씀하고 계시기에, 그 간절함이 베여있는 가르침입니다.
오늘 <말씀전례>의 주제는 메시아의 고난에 대한 말씀입니다.
<제1 독서>는 이사야 예언자의 입을 통해 들려준 ‘주님의 종의 노래’로, 메시아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이들에게 뺨을 내주고, 모욕과 수모를 받으면서도 얼굴을 가리지 않을 것이나, 주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수치를 당하지 않으리라고 전합니다.
<제2 독서>는 그분을 믿는 이들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지녀야 할 ‘믿음의 실천’에 대한 야고보 사도의 권고입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시기 전에 제자들을 미리 준비시키시는 장면인데, 내용상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곧 예수님께 대한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예수님의 수난예고와 그분을 따르는 제자들이 받아야 할 고난입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신원에 대한 군중들의 여론을 물으십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르 8,27). 그리고는 이내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르 8,29).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마르 8,29)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가르쳐주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원로들과 수석사제들과 율 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명백히 하셨다.”(마르 8,31-32)
여기서, 우리는 “반드시”(Dei)라는 말과 ‘명백히’(parresia)라는 단어에 주의를 기울여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 길을, “반드시” 걸어야 하는 길로, ‘명백히’(parresia) 가르치시기 때문입니다.
“반드시”라는 단어는 세 가지 뜻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의무와 책임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곧 예수님께서 고난과 배척을 겪고 죽임을 당하시는 일은 해도 되고 안 해도 괜찮은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자녀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야 하는 사랑의 의무이며 책임에 해당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두 번째>는 하느님의 약속을 실현하겠다는 뜻을 나타내줍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예언을 이루시려면 ‘반드시’ 고난과 배척을 받으시고 죽임을 당하셔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십니다. <세 번째>는 아버지의 뜻에 절대 복종하시는 예수님의 마음가짐을 말해줍니다. 곧 아버지의 뜻과 자신의 사명에 대해서 ‘반드시’ 해내고 말리라는 투철한 사명감과 각오를 말해줍니다. 따라서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에서 피해서도 안 되고, 거부할 수도 없는 ‘반드시’ 걸어야 하고, ‘반드시’ 실행해야 하는 일이라는 말씀이 됩니다.
그리고 ‘명백히’(parresia)라는 단어는 공관복음에서 유일하게 여기에서만 한 번 쓰인 단어로, ‘자유를 가지고 용기 있게 그리고 분명하게’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이는 어렴풋이 알아듣거나 대충 알아들어서는 안 되는 그야말로 명백하게 알아들어야 할 내용임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이 길은 우리가 ‘명백히’ 알고 분명하게 따라가야 하는 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명백히” 가르치신 우리가 “반드시” 가야하는 이 길은 대체 어떤 길인가? 그것은 세 가지입니다. 곧 <첫째>는 한두 가지나 혹은 몇 가지의 고난이 아니라 ‘많은 고난을 겪는 일’이요, <둘째>는 단지 배척과 거부를 당하는 것만이 아니라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는 일’ 이요, <셋째>는 그리하여 ‘다시 살아나는 일’ 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가 걸어야 하는 길, 곧 ‘많은 고난을 겪고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는 일’은 능동태가 아닌 수동태로 이루어지는 길임을 밝혀줍니다. 곧 스스로 만들어 걸어가는 길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을 묵묵히 수행해 가는 길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들에게 이러한 내용은 너무도 큰 충격이었습니다. 사실, 그들도 당시의 다른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영광스럽게 개선하는 ‘왕’ 메시아에 대한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메시아가 고난을 받고 죽음을 당한다는 사실을 상상할 수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천부당만부당한 일로 여겼던 것입니다. 또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사실에 당혹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나서서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고, 이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르 8,33)
그는 사막에서의 유혹자처럼,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위해 마련해 놓은 계획과는 다른 사람들의 방식으로 구원자가 되라고 반박한 것입니다.
사실, 오늘도 이렇게 하느님의 일이 아닌 사람의 일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사람의 방식으로 일을 처리하려고 하는 우리를 예수님께서는 가까이 부르시어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 아멘.
-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마르 8,31)
주님!
배척을 받는 고통을 받을 줄 알게 하소서.
몰이해와 곡해, 오해를 받아 견딜 줄 알게 하소서.
사랑하는 이로부터도 배척받고 거부됨을 받아들일 줄 알게 하소서.
마침내는 죽임을 당하는 일까지도 받아들일 줄 알게 하소서.
순명으로, 아버지의 뜻에 따라 가야하는 길이기에
사랑으로, 흔연히 배척받을 줄 알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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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12. 연중 제24주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 나의 신앙고백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용서하시고 자비를 베푸시며 구원하십니다. 우리를 영원히 살게 해 주십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래서 나의 구세주이십니다. 이 시간 예수님을 구세주로 모시고 있음을 기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르8,27)하고 물으셨습니다. 바깥 떠도는 소리, 여론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물으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사람들이 1)세례자 요한. 2)구약의 예언자 엘리야. 3)다른 예언자와 같은 인물로 여긴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하고 물으셨습니다. 다른 사람의 얘기는 그것으로 하고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말하라는 것입니다. 나의 소신과 확신에 찬 대답을 원하시는 것이지요. 나의 신앙과 다른 사람의 신앙은 확실히 구별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나서서 대답하였습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전에는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유령이라고 소리쳤었는데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면 영적성장을 이루었나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스도’는 1). 그리스어로는 ‘구세주’ ‘구원자’라는 뜻인데 2). 히브리어로는 ‘메시아’입니다. 3). 메시아는 ‘기름부음 받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왜 ‘기름부음 받은 사람’이란 말이 ‘구세주’라는 의미를 지니게 되었을까?
메시아라는 말은 이스라엘의 역사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는 강대국이었지만 그 후에는 쇠퇴의 길을 걷다가 마침내 기원전 587년 바빌론의 침공을 받아 멸망합니다. 그리고 왕족, 사제, 백성들이 바빌론 유배를 가게 됩니다. 약 50년 후 유배가 끝나자 이스라엘 백성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국가를 재건하지만 많은 어려움이 있었고 주변 강대국의 속박으로 겨우 명맥을 이어갔습니다. 이런 와중에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희망을 두면서 그분께서 언젠가는 구세주를 보내주시어 선택받은 자신들을 구원해 주리라고 믿었습니다.
이러한 기대를 하면서 미래의 구원자를 상상하게 되었는데 어떤 이들은 1). 다윗과 같은 강력한 임금으로. 어떤 이들은 2). 사제와 같은 인물로 3). 위대한 예언자와 같은 인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임금, 사제, 예언자는 머리에 기름을 부어 임명되었고, 이런 공통점에 근거해서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보내주실 미래의 구원자를 “기름부음 받은 사람, 곧 메시아”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유다인들은 장차 하느님이 보내주실 메시아를 1). 다윗이나 솔로몬처럼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강력하길 원했고, 2). 사제처럼 율법에 충실하며 3). 예언자들처럼 죄인을 단죄하는 인물로 상상을 했습니다. 그래서 1). 이 메시아가 압제세력인 로마인들을 무력으로 쫓아내고 2). 원수를 철저히 응징하며 3). 율법을 어기는 죄인을 엄하게 벌주기를 고대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분이 아니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폭력이 아니라 비폭력으로 세상을 변화시키고 원수의 죽음이 아니라 회개를 원하시며 죄인에게는 처벌보다는 용서와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을 대하시는 방법은 지배가 아니라 봉사였습니다. 그분은 하느님의 진리(아버지의 말씀이 곧 진리입니다(요한17,17).를 줄기차게 선포하였고 그 진리의 이름으로 그 진리를 위해 당신의 목숨을 내 놓았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은 유다인들이 기대하던 메시아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습니다. 유다인들이 사용하던 메시아 칭호는 예수님의 사명을 올바로 표현하기에는 불충분하고 그래서 오해의 소지기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메시아, 구세주이시지만 권력을 휘두르는 군주적 메시아가 아니라 인간을 위해서 스스로 고난까지 감수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우리도 그분의 삶을 본받고 더 큰 희생과 사랑을 감당해야 하겠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의 물음은 결국 너희에게 있어서 내가 어떤 존재냐? 고 묻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의 구세주이십니다.. 나를 살려주시는 분이십니다.”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나는 당신의 무엇입니다.’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께서는 “나는 주님의 손에 들린 몽당연필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분 손에 들려있으니 연필을 사용하고 안 하고는 그분 뜻에 달려 있습니다. 혹 부러져도 그분께서 필요하다면 깎아 쓰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자신을 온전히 맡겨드리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내 뜻을 관철시키며 사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뜻에 나를 맞추는 삶이 신앙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소크라테스나 석가모니, 공자와 같이 4대성현 중 한 분으로 생각하시는 것은 아닌지요?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잊고 훌륭한 분으로만 여기는 것은 아닌지요? 나를 살리시는 분, 나의 주인으로 확실하게 모실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합니다. 그분이 주인이시면 나는 분명 종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베드로의 믿음고백에 이어 예수님의 첫 번째 ‘수난예고’가 이어졌습니다. 많은 고난을 겪고 배척을 받고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말씀은 제자들에게 충격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승리와 성공의 메시아관을 갖고 있었는데 그것이 다 무너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급기야 베드로는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였습니다. 결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구나.”였습니다.
성경에서 사탄이란? ‘진리를 왜곡하는 사람이며, 진리의 길을 가려는 이를 가지 못하게 막거나 방해하는 이’를 말합니다. 그리고 진리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말씀에 대해 무지하거나 말씀을 잘못 알아들어서 말씀과는 다른 삶을 살 때, 또는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이를 비웃거나 방해함으로써 말씀대로 살려는 의지를 잃게 될 때 사탄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방식대로가 아니라 나의 방식을 고집할 때, 하느님의 일보다 사람의 일을 먼저 내세우고 행하게 될 때, 영적인 것보다 육적이 것에 더 관심을 두고 더 중요하게 생각할 때 사탄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광야에서 사탄의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사탄은 돈과 재물, 권력과 명예, 그리고 하느님을 이용한 자기 과시를 통해 백성을 휘어잡으라고 유혹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방패삼아 사탄의 유혹을 이겨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승리와 성공의 메시아상을 고집하면서 수난을 거부하는 베드로의 모습을 사탄의 유혹과 동일하게 여기시고 단호하게 내치십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가 이 순간은 스승에게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유혹은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서 올 수 있습니다. 우리도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본이 아니게 사탄이 되고 맙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합니다. 자신을 버린다는 말과 십자가를 진다는 말은 같은 뜻을 되풀이 강조한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는 말씀은 힘들게 고생하며 따라오라는 말씀이 아니라 순간마다 자신의 뜻을 비우면서 따라오라는 말씀입니다. 자기라는 울타리에 갇혀있지 말고 더 크고 위대한 그리스도께로 나오라는 말씀입니다.
자신을 버린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기억해 봅니다.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숭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필리3,7-9). 집자실지(執者失之) 라는 말 이 있습니다. 움켜잡는 자는 그것을 잃는다는 뜻입니다. 움켜잡았기 때문에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명예도 그렇고 재물도 , 목숨도 그렇습니다. 잡으면 잃습니다. 잃기 전에 내려놓아야 합니다. “세상에 소유하지 않은 물건을 도둑맞는 법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구세주라면 그분께서 원하시는 대로 행동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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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12. 연중 제24주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 천국으로 가는 문은 십자가의 길을 통해서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는 예수님의 말씀은 십자가와 부활, 십자가와 천국 사이에는 뗄 수 없는 관계가 있음을 상기시켜 주는 말씀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사탄의 유혹을 받아 추방된 일도, 셋째 아들인 셋의 후손들이 첫째 아들인 카인의 후예들과 부대끼며 살아가야 하는 일도, 결국 세상에는 선과 악이 뒤섞여 있으며 하느님의 자녀들은 악을 없애려 하지도 당하지도 말고 그 악을 피하든지 또는 피할 수 없으면 그 악이 주는 십자가를 견디어내며 선을 향해 살아야 함을 깨닫게 해 줍니다.
이것이 원죄의 보편성 교리이며, 세례성사를 통해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이 원죄를 사함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역시 보편적으로 악의 공격에 대한 십자가를 짊어져야 하는 윤리를 가르치는 교리의 근거입니다. 세상에서는 악인들이 의인들보다 더 많아 보이는 것이 사실이고, 착한 사람이 더 고생을 많이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진실은, 의인들과 착한 사람들이 짊어지는 십자가의 공로가 하느님의 진노를 자비로 변화시키는 힘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를 짊어지는 데 있어서 한층 더 야무져야 하고, 이 십자가의 길을 가는 데 지치지 말고 천천히 그리고 더디 가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천국을 위한 십자가의 영성입니다.
천국의 문을 여시려고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이 섭리를 깨우치게 하시느라고 삼 년 동안이나 가르치셨습니다. 일찍이 이사야도 메시아를 기다리는 아나빔들에게 메시아의 영광이 아니라 메시아의 수난을 예고했더랬습니다. 마치 눈 앞에서 일어난 일을 보는 것처럼 메시아의 수난을 예고한 이사야는 아마도 당시 숱한 아나빔들이 민중으로서 겪어야 했던 수난의 역정을 익숙하게 보고 나서 메시아의 수난 역시 선명하게 예고할 수 있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 표현이 이러합니다. “주 하느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시니,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이사 50,5-6).
천국을 위해 믿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이 십자가의 길을 걸어야 하기에 야고보 사도는 무척 알아듣기 쉬운 표현으로 이런 편지를 썼습니다.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한 믿음이 그 사람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 2,14.17). 믿음으로 의로워지리라는 성경 말씀(로마 4,1-3; 갈라 3,6-9)과 흔히 대비되어 인용되곤 합니다만, 야고보 사도나 바오로 사도나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십자가의 믿음을 전하려던 것이기 때문에, 믿음 속에는 당연히 실천이 전제되어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수난의 실천 없이 얻어지는 믿음이 있다면 그 믿음은 유혹에 걸려 넘어질 수밖에 없는 허약한 믿음이요 싸구려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 수난이란 흔히 굳이 잘못이 없어도 악마의 간계 때문에 주어지기 마련인 고생인 것이요, 그래서 십자가입니다.
오늘 미사의 말씀이 주는 이러한 가르침 덕분에 우리는 그 효과가 매우 확실한 기도 지향을 얻은 셈입니다. 자기 탓 없이 고통 받는 이들과, 묵묵히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지치지 않도록 기도해 주는 일입니다. 착한 사람들이 물러터지지 말고 야무지게 착하도록, 의로운 이들이 악한 이들의 공격에 대해 슬기로울 뿐만 아니라 인내로이 그 의덕을 간직하고 발휘하도록 기도해 주는 일입니다. 그리고 더 있습니다. 이 십자가의 길을 잘 걸어가다가 자칫 한 두 번 넘어진 이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기도해 주는 일도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의 길에서 세 번이나 넘어 지셨습니다. 매를 맞고 고문당해 약해지고 지친 몸으로 짊어지기에는 그 십자가가 너무나 무거웠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몸이나 마음이 약해서, 또는 십자가가 너무 무거워서 넘어질 수 있기에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운을 받아야 하는데, 혼자 기도하는 힘만으로는 모자랄 수 있으니, 깨어있는 영혼을 지닌 이들이 기도로 통공하며 연대해야 합니다.
이 순교자 성월에, 오늘날에도 옳은 일과 거룩한 일로 박해를 당하고 있는 이들을 기억합니다. 그들이 바쳐야 할 기도가 오늘 화답송의 후렴으로 나와 있는데, 그들과 기도로 통공하려는 지향으로 이 기도를 우리가 함께 바쳤으면 합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 걸어가리라. 살아 있는 이들의 땅에서 걸으리라”(시펴 116,9).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딛는 걸음 하나가 신앙 고백이요, 그들을 위해 통공하는 기도 한 마디가 또한 신앙 고백이며 그리고 그들과 연대하려는 몸짓 하나가 예수 그리스도께 바치는 살아 있는 신앙 고백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로 인한 구원을 확신하며, 십자가를 짊어지고자 하는 그 삶이 바로 부활의 삶이여, 이로 말미암아 우리의 세상이 그만큼 천국으로 변화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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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12. 연중 제24주일. 키엣 대주교님.
주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예수님과 제자들의 생활을 기록한 분들이 있기에 주님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우리와 같은 인간입니다. 결점이 있는, 욕심인 줄 알면서도 세상의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 인간입니다, 우리와 같은 인간의 눈으로 기록한 복음이기에 더 깊은 느낌과 깨달음을 받게 됩니다.
그 옛날 사람들은 구세주는 세상 모든 권능과 권위를 가진 분일거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자신과 다름없이 평범한 여성의 몸에서 태어나셨고 너무나 겸손한 분이셨습니다. 세상을 호령하는 위엄을 기대했건만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고 세상 사람들에게 치욕을 받으며 마치 죄인처럼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들이 생각했던 구세주와 너무 달랐습니다.
주님을 따르기만 하면, 주님을 믿기만하면 은총을 받고 주님의 나라에 오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에서 큰 일을 한 사람은 반드시 주님의 나라에서 존중받고 섬김을 받을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행운과 성공, 부유함을 누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자신을 따르는 사람에게 행복을 주겠다고 약속하는 데 왜 주님께서는 행복이 아닌 고통의 길을 가야한다고 하신걸까요? 왜 당신의 십자가 길과 고난만을 약속하신 것일까요?
주님께서는 인류를 구원하고 인간의 행복을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그 행복은 이 세상의 짧은 행복이 아닌, 영원한 하늘 나라의 행복입니다. 그러한 참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이 세상의 고난을 참고 감내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세상 모든 고통 중 가장 큰 고통은 자신을 버리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그 길을 가셨고 보여주셨습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오늘 주님의 말씀은 참으로 받아들이기 어렵고 실천은 더욱 더 어려운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리입니다. 영원한 생명과 행복의 길로 이르는 유일한 길은 진정한 용기를 갖고 옳다고 생각하는 정의를 실천하는 것, 비록 그 길이 힘들지라도 주님께 의탁하며 끝없이 행동하는 삶, 그것이 바로 하늘나라의 참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오직 하나의 길입니다.
주님, 저희가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주님을 따라갈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주님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습니까?
2. 주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해야한다는 것입니까?
3. 자신을 버리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나는 과연 이 말을 지키고 있는 지 앞으로도 계속 지킬 수 있는지 묵상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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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12. 연중 제24주일. 조명언 마태오 신부님.
신학교에 들어가서 처음에 고민이 너무 많았습니다. 신부가 되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지만, 능력 부족 그리고 자질 부족인 저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신부가 되고 싶다고 하면서도 기도하는 시간이 너무 싫었습니다. 공동 기도 시간, 미사 시간에 꾸벅꾸벅 조는 것이 일상이었습니다. 또 신부가 되고 싶다고 하면서도 공부하는 것을 너무 싫어했습니다. 철학, 신학, 성경…. 모두 제게 맞지 않는 옷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이곳에 와서 고생만 하는 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이런 고민으로 힘들어할 때, 여름방학 중에 혼자 산에 갔습니다. 정상까지는 길을 따라 쉽게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이제 하산하는데,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가고 싶은 것입니다. 숲속으로 들어가 저의 감각만을 믿으면서 아래로 내려갔습니다. 숲을 헤치며 한참을 내려갔지만, 사람도 보이지 않고 길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다시 왔던 길로 되돌아가자니 그 힘든 길을 다시 간다는 것 자체가 끔찍했습니다. 또 무작정 내려가다가는 길을 잃어서 금방 어두워져서 난처한 일을 당할 것만 같았습니다.
바로 그 순간 물소리가 들렸습니다.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내려가니, 이 물길만 쫓아가면 아래로 내려갈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실제로 무사히 하산할 수 있었습니다.
하산할 때 들었던 물소리가 주님의 말씀이 아니었을까 싶었습니다. 주님 말씀만 듣고 그 말씀대로 살아간다면 분명히 좋은 결과가 나올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만두지 않고, 지금 이렇게 신부로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이제 기도를 싫어하지 않고, 또 공부를 너무 좋아하는 은총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예언하십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반대를 던집니다. 예수님께서 수난과 죽음이라는 고통을 당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르 8,33)
주님의 말씀대로 살았어야 했습니다.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니 주님의 뜻이 보이지 않고, 주님의 뜻과 정반대의 말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떤 일을 생각하고 바라보고 있었을까요? 사람의 일일까요? 아니면 하느님의 일일까요?
베드로처럼 자신에게 고통과 시련이 없어야 한다면서 예수님을 붙들고 반박하는 것이 아닐까요? 하느님의 일보다는 사람의 일이 먼저라고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기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진짜 자신의 목숨을 구하면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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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이 전부다.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에서 시작해라. 그리고 눈으로 발견할 수 있는 것에서 배워라(레오나르도 다 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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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은 늘 좋은 시간을 주셨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때의 일이 기억납니다. 선생님께서 미술 시간 준비물로 찰흙을 가져오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막 학교에 입학한 저로서는 찰흙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옆 짝궁에게 물어보니, 그것도 모르냐는 표정을 지으며 “흙인데 끈기가 있는 거야.”라고 말해주는 것입니다.
솔직히 찰흙을 문방구에서 살 생각은 전혀 못 했습니다. 흙이란 것은 길거리에 널려 있는데, 이 흙을 돈 주고 산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동네를 돌아다니다가 어느 밭의 언저리에 있는 흙의 상태를 보고 ‘찰흙이다’라고 확신했습니다. 손으로 만져보니 끈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음 날, 저는 직접 채취한 이 흙을 라면 봉지에 넣어갔습니다. 그런데 제 주위의 친구들은 모두 투명 비닐에 쌓인 네모반듯한 찰흙을 꺼내는 것입니다. 겉 비닐에 큼지막하게 ‘찰흙’으로 쓰여있더군요.
친구들이 저를 엄청나게 놀렸습니다. 흙을 사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을 뿐인데 말입니다. 지금은 오히려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남들은 체험하기 힘든 경험을 했기 때문입니다.
실수, 실패…. 당시는 부끄럽고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그 시간을 떠올리며 미소를 짓게 됩니다.
하느님은 늘 좋은 시간을 주셨습니다. 실수, 실패도 제게 좋은 시간입니다. 어떤 시간도 감사한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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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12. 연중 제24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캠핑을 다니면서 좋은 점이 많습니다. 자연 속에선 편안함과 아늑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분주한 일상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모닥불을 피우면서 아련한 추억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함께하는 신부님들과 우정을 나눌 수 있습니다. 캠핑을 하면서 한 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핸드폰이 안 되는 지역이 있는 것입니다. 문자를 확인할 수도 없고, 메일을 보낼 수도 없고, 꼭 연락해야 할 사람과도 소통하기 어렵습니다. 매일 강론 묵상을 올리는데 여의치 않기도 합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통신사마다 핸드폰이 가능한 지역이 다른 점입니다. 저의 핸드폰이 되는 지역에서는 신부님들의 핸드폰이 안 되기도 합니다. 제가 안 되는 지역에서는 다른 신부님들의 핸드폰이 되기도 합니다. 다른 신부님들의 핸드폰을 노트북에 연결해서 강론 묵상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성서는 소통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야기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 사람 아담은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교만함 때문에 소통하지 못하였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남에게 전가하려는 비겁함 때문에 소통하지 못하였습니다. 아담의 아들 카인은 동생에 대한 질투 때문에 소통하지 못하였습니다. 바벨탑을 쌓았던 사람은 꺼지지 않는 욕망 때문에 소통하지 못하였습니다.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은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욕심 때문에 소통하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고향사람들은 편견과 선입견 때문에 소통하지 못하였습니다. 제자들은 두려움 때문에 소통하지 못하였습니다. 어린아이가 말을 하는 이유는 먼저 들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소통하지 못하는 대부분의 이유는 먼저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하느님과의 소통입니다. 믿는 이들과의 소통입니다. 신앙에서 소통의 첫 번째 조건은 낮아지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소통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언어와 하느님의 마음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계시를 통해서, 예언자를 통해서, 자연을 통해서 우리와 소통하시지만, 완고한 우리의 마음은 귀가 닫혀서 하느님의 뜻을, 하느님의 마음을 듣지 못하고 느끼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아들이 직접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예전에 궁궐에 있던 왕도 가끔씩 궁 밖으로 잠행을 나오기도 했습니다. 신하들의 보고를 거치지 않고, 직접 백성들의 고충과 백성들의 아픔을 살피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의 몸도 소통이 중요합니다. 기가 막히고, 혈관이 막히면 건강에 이상이 오기 마련입니다. 동양의학에서 침과 뜸은 막힌 기와 혈을 풀어주는 치료방법입니다.
신앙에서 소통의 두 번째 조건은 갈망입니다. 우리 속담에 “우는 아이 젖 준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하느님과 소통하려는 갈망이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받아 주십니다. 이집트에서 하느님을 부르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간절함을 보시고 모세를 보내 주셨습니다. 이민족의 공격으로 신음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고통을 보시고 판관을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망이 있는 사람들을 칭찬하셨고, 그들의 소망을 들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이라도 만지려했던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주인의 상에서 떨어진 음식을 받아먹는 강아지의 심정으로 예수님께 딸의 치유를 청했던 시로페니키아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다윗의 아들 예수님께 눈을 뜨게 해 달라며 간절하게 외쳤던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청하면 받고, 두드리면 열리고, 구하면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신앙에서 소통의 세 번째 조건은 회개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은 자비하시니 뉘우치고 회개한다면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눈과 같이 희게 해 주십니다. 하느님은 자비하시니 뉘우치고 회개한다면 죄가 진홍같이 붉어도 양털처럼 희게 해 주십니다.” 우리가 구원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리 죄의 크기 때문이 아니라고 합니다. 우리가 뉘우치고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루가 복음 15장은 뉘우치고 회개하는 사람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가산을 탕진하고 거지가 되었지만 뉘우치고 회개한 아들을 품어주는 아버지의 이야기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따뜻하게 받아주시고, 잔치를 벌여 주셨습니다. 렘브란트는 돌아온 아들을 품어주는 아버지의 모습을 아름답게 표현하였습니다.
신앙에서 소통의 네 번째 조건은 행동입니다. 루가복음 19장은 행동하는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캐오는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서 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예수님을 집에 모신 자캐오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제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겠습니다. 제가 빚진 것이 있다면 4배로 갚아주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캐오의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집은 구원받았습니다.” 야고보 사도도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행동이 없는 믿음은 거짓 믿음입니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목적지를 향해서 날아갑니다. 신앙은 믿음과 행동의 날개가 균형을 이루어야 영원한 생명에로 날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질문합니다. ‘사람들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제자들은 들은 대로 이야길 합니다. ‘엘리야라고도 하고, 죽은 요한이 살아났다고도 하고, 예언자 중에 한분’이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질문을 다시 합니다. ‘여러분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베드로는 아주 정확한 대답을 하였습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칭찬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고난을 받아야 한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자 이번에 베드로는 또 이야기합니다.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번에는 베드로를 야단치셨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사람의 뜻을 따르려 하는구나.’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오늘 제2 독서는 분명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행동이 함께해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행동이 없는 신앙은 우리를 참된 진리로 이끌어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칭찬을 받았던 베드로가 엄하게 질책을 받은 이유는 그 믿음을 실천하는 행동에는 함께 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9월은 순교자 성월입니다. 순교자들은 자신들의 믿음을 행동으로 보여준 참된 신앙인입니다. 우리가 순교자 성월을 지내는 것은 믿음을 행동으로 드러낸 순교자들의 삶을 본받기 위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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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12. 연중 제24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 사랑, 배움, 따름 -
“나는 주님 앞에서 걸으리라. 살아 있는 이들의 땅에서 걸으리라.”(시편116,9)
시편 화답송 후렴처럼 사시기 바랍니다. 요즘 대통령 후보로 나선 분들의 활약이 눈부십니다. 참으로 기도하는 겸손한 믿음의 후보들을 보고 싶은 데 눈에 띄지 않습니다. 믿는 이들에게 삶은 모두가 하느님의 기적입니다. 원주의 의인, 저명한 사회운동가이자 시대의 스승이었던 이미 타계하신 무위당 장일순 요한 선생의 평전을 읽다가 선생이 어느 술자리에서 고백한 6.25사변 당시 성호경 기도로 살아난 일화가 잊혀지지 않습니다.
-‘국군에게 체포당한 장일순이 아무리 북한군이 아니라고 해도 증명할 게 아무 것도 없었다. 박박깍은 머리만 보고 인민군이라고 확신한 국군 장교는 부하들에게 총살을 명했다. 전시 때 총살은 여러 명을 한 줄로 세워 놓고 한 사람씩 쏴 죽이는 방식이었다.
장일순 차례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는가?” 라고 군인이 물었다. 천주교 신자인 장일순은 말없이 눈을 감고 성호를 긋고 죽음을 기다렸다. 갑자기 앞에서 “중지!”라는 큰 소리가 들려왔다.
사형을 집행하던 장교가 천주교 신자였던 것이다. 그는 장일순이 십자가 성호를 긋는 것을 보고는 순간적으로 종교를 믿는 사람이 공산당원일리가 없다고 판단하고 사형을 중지시킨 것이다.’(장일순평전;50쪽)-
선생이 26세에 대성학교 교장으로 있던 학교의 “참되자!”라는 바위판에 새겨진 투박한 교훈비 글씨 사진도 깊이 뇌리에 남아있습니다. 세상에 십자성호보다 더 좋은, 짧고 온몸으로 할 수 있는 기도는 없을 것입니다. 이런 특별한 기도의 기적뿐 아니라 우리가 모를뿐 참으로 믿는 이들에게 무수한 기적이 뒤따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오늘 강론 제목으로 택했습니다. 세상이 어지럽고 삶이 고단하고 힘들수록 하느님 중심의 삶이 얼마나 절박한지 깨닫습니다. 어제 코로나 시대는 물론 언제나 ‘5적’의 삶을 살겠다 다짐했습니다.
“1.적게 자고, 2.적게 먹고, 3.적게 쓰고, 4.적게 말하고, 5.적게 다니고”
의 5적입니다. 5적의 실천으로 남는 시간과 힘은 하느님 찾기에, 하느님 공부에, 하느님 사랑에, 하느님 기도에 쓰기로 내심 작정했습니다. 새벽 교황님 홈페이지에서 강론 주제 내용이 한 눈에 들어왔습니다. “가정은 기도와 하느님 말씀과 섬김 안에서 살아난다.” 바꿔말해 ‘가정은 하느님 안에서 살아난다’라는 말인데 믿는 모든 사람이 그러할 것입니다. 어제 시간경중 새롭게 마음에 와닿은 시편 성구입니다.
-“주께서 집을 아니 지어 주시면,
그 짓는 자들 수고가 헛되리로다.
주께서 도성을 아니 지켜 주시면,
그 지키는 자들 파수가 헛되리로다.
이른 새벽 일어나 늦게 자리에 드는 것도,
수고의 빵을 먹는 것도 너희에게 헛되리니
주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그 잘 때에 은혜를 베푸심이로다.”(시편127,1-2)-
-“내 영혼이 주님을 기다리오며,
당신의 말씀을 기다리나이다.
파수꾼이 새벽을 기다리기보다
내 영혼이 주님을 기다리나이다.”(시편130,5-6)-
하느님 중심의 삶에 시편기도의 생활화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을 것입니다. 기도해야 삽니다. 강론을 쓰는 도중에도 끊임없이 찬미기도 바치는 풀벌레들 노래 소리, 하느님의 생음악이 참 마음 편안하게 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저절로 답이 나옵니다. 구체적으로 그 방법을 나눕니다.
첫째, 사랑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할 때 저절로 주님과의 대화인 기도는 뒤따릅니다. 기도를 잘하고 싶은 청정욕은 얼마든지 좋습니다. 기도를 잘하는 비결은 단하나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온맘으로, 온몸으로, 온힘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런 주님 사랑은 저절로 갖가지 수행을 통해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 ‘주님의 종’의 셋째 노래, 고백기도는 그대로 이사야의 심중을, 수난시 예수님의 심중을 대변합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했기에 이런 고백기도의 은총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할수록 마음의 순수에 강해지는 내적힘입니다.
“주 하느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시니,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나를 의롭다 하시는 분께서 가까이 계시는데, 누가 나에게 대적하려는가? 내게 다가와 보아라. 보라,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는데, 나를 단죄하는 자 누구인가?”
기도는 테크닉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하느님을 향해, 하느님 앞에서 사랑의 침묵중에 고요히 머무는 것도 참 좋은 기도입니다. 하느님을 향한 사랑의 삶자체가 기도입니다. 기도와 삶은 함께 갑니다. 둘이자 하나입니다. 기도없는 삶은 공허空虛하고 삶이 없는 기도는 맹목盲目입니다.
둘째, 배움입니다.
배워야, 공부해야 합니다. 무슨 배움, 무슨 공부입니까? 하느님 배움, 하느님 공부입니다. 세상 공부 아무리 많이 해도 영의 눈, 지혜의 눈은 주어지지 않습니다. 무지와 허무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느님 빠진 공부, 말그대로 헛된 공부입니다. 하느님 공부와 참 나의 공부는 함께 갑니다. 하느님을 알수록 참 나를 알아 겸손과 지혜, 순수와 진실입니다.
평생 ‘사랑의 학교’ 인생에서 사랑을, 겸손을, 섬김을 또 무수한 수행을 배워야 하는 주님의 평생학인인 우리들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십시오.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 예수님께 크게 배우지 않습니까?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멋진 신앙고백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께 대한 베드로의 이해가 너무 부족했습니다. 바로 여기서 예수님의 본격적 제자교육이 뒤따릅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첫 번째 수난과 부활의 예고에 무지한 베드로는 크게 반발했고 주님의 호된 질책이 뒤따릅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구나.”
사탄은 우리 모두의 가능성입니다. 반석의 바위에서 졸지에 걸림돌로 전락된 베드로입니다. 누구든 하느님의 일이 아닌 사람의 일만 생각하면 졸지에 사탄이 되어버립니다. 이런 유혹의 위기를 직감할 때 즉시 ‘사탄아, 물러가라!’ 내심 크게 외치고 벌떡 일어나 제 십자가의 길을 가시기 바랍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새삼 삶은 배움의 여정임을 깨닫게 됩니다. 아마 예수님의 호된 꾸지람을 통해, 가르침을 통해 베드로의 메시아관도, 예수님께 대한 이해도 참으로 깊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은 아닙니다.
살아있는 동안, 죽는 그날까지 배우고 체험해야 할 주님의 파스카의 신비입니다. 참으로 초발심의 자세로 겸손히 한결같은 분투의 노력을 다해야 하는 주님의 평생학인인 우리들입니다. 이처럼 날로 비워지고 겸손해짐으로 점차 주님을 닮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셋째, 따름입니다.
주님을 따라 사랑을, 섬김을 실천하는 믿음의 삶입니다.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말로만의 사랑이, 믿음이 아니라 행동으로 입증되고 검증되어야 합니다. 바로 실천으로 입증되는 믿음은 제2독서에서 야고보 사도가 특히 강조합니다. 사랑도 믿음도 실천의 동사입니다. 그러니 실천이 없는 사랑, 실천이 없는 믿음은 죽은 사랑, 죽은 믿음입니다.
주님 믿음과 주님 사랑의 진위는 제 십자가를 지고 한결같이 주님을 따름에서 확인됩니다. 믿는 이들 모두에게 당신을 따를 것을 명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순교 성월 9월!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마르8,34-35).
생명의 길, 구원의 길은 평생,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따르는 십자가의 길, 파스카의 길 하나뿐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에 대한 궁극의 답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기꺼이 기쁘게 주님을 따라 끝까지 제 십자가의 길을 갈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좌우명 고백의 기도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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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12. 연중 제24주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선 우리의 운명이 명백히 드러납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마르 8,29)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례자 요한이나 엘리야, 다른 예언자 중 하나라고 여겼다고 하지요. 제자들은 이 질문을 통해 그동안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각자의 마음속에 맺혀진 상을 직면하고 구체화하는 때에 이른 것입니다. 그들은 각자에게 주님이 누구이신지 지식과 믿음과 사랑을 총동원해 고백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
베드로가 그분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자 예수님은 곧바로 사람의 아들이 겪어야 할 고난과 죽음을 예고하시지요. 이에 놀라고 실망한 베드로가 예수님을 반박했다가 사탄이라고 꾸중을 듣습니다. 예수님 신원에 대한 각자의 의식은 그분 소명에 대한 이해도와 직결되는데, 그 중심 키워드는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지만 고통은 싫고, 예수님을 따르고 싶지만 가난은 지긋지긋하며, 예수님을 닮고 싶지만 작고 낮게 섬기는 일이 딱 질색이라면 혹시 제자들은(우리는) 예수님 아닌 어떤 허상을 만들어 섬기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제1독서는 주님의 종의 셋째 노래의 한 대목입니다.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이사 50,7)
주님의 종은 세상이 퍼붓는 온갖 모욕과 수모를 회피하거나 뒤로 물러나거나 거역하지 않고 고스란히 받아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고역이나 그런 일을 당하는 자체가 수치스러운 일일 수는 있지만 당하는 주님의 종 자신과, 그와 함께 견디어 내시는 주님께서 수치스러워하지 않는 한 수치가 아닙니다. 주님은 곤혹스럽기 짝이 없는 일들을 치워주시지 않고, 주님의 종이 부끄러움과 움츠림 없이 견디어 낼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제2독서는 믿음과 실천에 대해 이야기하십니다.
"나는 실천으로 나의 믿음을 보여 주겠습니다."(야고 2,18)
신자라면 십자가의 신비를 믿습니다만, 대개는 각자가 감수해야 할 십자가의 길에 대해서 두려움 내지 반감, 거부감까지 지니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지요. 쉽고 만만하다면 십자가가 아니니까요. 십자가는 편하고 흥하고 승승장구하고 싶은 인간 본성을 반하기에 어렵고 무겁고 불편하지만,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껴안아야 하는 동반자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믿는 것"과 실제로 기꺼이 십자가를 지는 "실천" 사이의 거리가 바로 그 사람과 주님 사이의 거리일 겁니다. 영광의 허상만 좇는 이는 삶의 실제적 고통을 마주하려 하지 않지만, 주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자신을 구원하셨다고 믿는 이는 그 십자가까지 감사하게 됩니다. 그에게 주님이 누구이신지가 십자가의 실천으로 드러나게 마련이지요.
거친 인생길을 헤치고 나오면서 십자가가 버겁고 고통스러워 눈물 훔쳐보지 않은 이가 있을까요! 내적으로는 자신의 부족함과 약함 때문에, 외적으로는 숨어있다 튀어나와 주저앉히고 무너뜨리고 해체시키는 복병 같은 어려움들 때문에 주저하고 망설이고 뒷걸음질도 치면서 우리는 여기까지 왔습니다. 십자가 때문에, 그리고 십자가 덕분에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나는 주님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지 않으리라."(복음 환호송)
그토록 징한 십자가지만, 이 고백이야말로 우리가 올려드려야 할 진실일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그 십자가 때문에 주님을 만나고, 십자가 덕분에 사랑을 체득한 우리가 이 세상에서도 천상에서도 자랑할 것이란 오직 십자가뿐일 겁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예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물으십니다.
"나는 너에게 뭐니?"
"나는 너에게 어떤 존재니?"
묻고 또 물으시는 그분께 진심을 다해 응답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그분과 우리는 공동운명체, 운명공동체이니, 그분에게서 십자가를 빼버릴 수 없다면 우리에게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지요. 피할 수 없다면 즐기고 또 자랑하는 것이 우리 운명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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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12. 연중 제24주일. 이병우 루카 신부님.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8,34)
'십자가를 따라가는 사람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제자들에게 물으시자,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우리의 신원'은 스승이시며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짊어지셨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그 십자가를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의 신원에 대해 물으시고 난 후, '당신이 누구이신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밝히십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입니다.
'많은 고난을 겪고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부활하시는 예수님'입니다.
이것이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었고, 오늘 제1독서에서 '고난 받는 주님의 종의 노래'가 전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결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거절하지 않으시고 이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이사50,6)
베드로처럼,
부활의 절대적 전제인 십자가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사탄이라는 꾸지람을 받습니다.
십자가를 믿고,
십자가를 바라보고,
십자가를 따라갑시다!
너와 나 그리고 하느님의 모든 창조물들을 위해 내 것을 기쁘게 내려놓는 십자가!
참부활로 이끄는 크고 작은 고통의 십자가들!
믿는 바를 삶으로 살아내야 하는 십자가!
이 십자가들을 기꺼이 짊어지고,
참부활이신 예수님의 뒤를 따라갑시다!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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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12. 연중 제24주일.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곧이어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물으십니다. 베드로는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가 어떤 일을 겪게 될 것인지 가르쳐 주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고 말입니다. 베드로가 이에 반박하자, 예수님께서는 그런 베드로를 꾸짖으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여러분은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고백합니까? 그저 어렵고 힘들 때 우리를 도와주시는 분, 날마다 은총을 내려 주셔서 우리가 잘 살아갈 수 있게 해 주시는 분으로만 믿고 있지는 않은가요? 하느님의 뜻보다는 이기심이 바탕이 된 사람의 뜻만을 찾고 있지는 않은가요? 우리도 베드로 사도와 별반 다를 게 없습니다. 기도할 때는 예수님을 구세주라고 고백하면서, 삶에서는 우리 마음대로 할 때도 많이 있으니까요.
오늘 제2독서에서 야고보 사도는 우리의 믿음이 ‘실천’을 통하여 드러난다고 이야기합니다. 주님의 말씀에 따라 다른 이들을 돕고 믿음과 기도가 실천으로 이어지는 사람은 하느님의 영광에 초대되어,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깨닫고 고백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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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12. 연중 제24주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우리가 그리스도를 안다고 하는 것은 그분과 내가 어떤 친밀한 관계라고 생각되는 때에도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닌 것 같다. 바로 오늘 복음의 베드로를 보면 그렇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비록 죽음의 그늘과 어두움을 거친다 해도 영광을 바라보며 기다리는 능력이며 그 신앙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는 힘없고 지친 자들을 위해 영과 예언을 받으신 야훼의 종으로 나타난다(이사 50,4). 그에게 온순과 겸손과 순명을 주시고(이사 50,5; 참조: 필립 2,8), 모든 것을 아버지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따르게 하셨다. 그리하여 모든 고통을 당하게 하신다. 때리고, 수염을 뽑으며 침 뱉음과 수치를 당한다(이사 50,6). 그러나 그는 주님 앞에 단 하나의 도움이 있음을 믿기에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느님께서는 종과 함께 계시다(참조: 사도 10,38).
복음: 마르 8,27-35: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자기 나름대로 느낀 점일 것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들의 생각을 물으신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던지시는 질문일 수 있다.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29절) 답한다. 즉 하느님께 축성된 분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실 분으로 보기 시작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은 눈으로 볼 수 있는 정치적인 결정적 실현을 기대하고 있다(사도 1,6). 그러나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뜻으로 메시아를 알아듣지 않도록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말라고 하신다. 그래서 어떤 착각도 하지 않게 하려고 첫 번째로 당신의 수난과 부활에 관한 말씀을 하신다(31-32절). 이것은 마르 9,31과 10,32-34에서 다시 한번 예고하신다.
여기서 제자들이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도 잘 알지 못하는 반응이 나타난다. 베드로의 모습이 그렇다.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메시아의 힘없는 무기력한 메시아를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 힘없이 십자가에 죽는 메시아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베드로의 모습은 십자가 없는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모습이다. 그리스도는 고통받는 하느님의 종으로서 그 십자가를 통하여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이루시는 것인데 그 십자가를 거부하는 것이 사탄의 일이며, 원수의 일이고 고소하는 자들의 일이기 때문에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33절) 호통을 치신다. 마치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사명을 완수하기 전에 사막에서 사탄이 놀라운 메시아적 기적들을 행하도록 했던 것이나, 십자가 아래에서도 그 옆에 있던 이들이 세 번이나 십자가의 고통으로부터 내려오라고 했던 것처럼 베드로의 발언을 사탄의 일만 생각하는 것이라고 책망하고 계시다(33절).
그리고 이어서 충실한 제자의 모습을 말씀하신다. 즉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끊고,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며, 자신의 십자가를 매일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그분을 따라야 한다고 하신다. 자기 자신의 목숨을 즉 자기의 존재를 그분과 복음 때문에 잃어야 한다는 것이다(34-35절 참조). 그렇지 않으면 헛되이 망할 것이라고 하신다. 이렇게 인간은 자신을 구원하게 되며, 단지 인간적인 의지는 은총이 함께 하지 않으면 확실한 죽음만이 있을 뿐임을 말씀하시고 계시다.
야고보 사도는 신앙이 있다고 하면서, 그 신앙이 요구하는 행위를 실천하지 않는 자들을 향하여 강하게 말하고 있다. 믿음만으로는 자신을 구원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의 은총에 응답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야고보 2,14). 만일 어떤 사람이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도움이 필요한 형제를 물질적으로 도움을 주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아무 소용이 없다(야고보 2,15-16). 진정 이 믿음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로 살아있지 않다면 그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야고보 2,17). “만일 믿음이 자비를 통해 실천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아무것도 가치가 없는 것이다”(갈라 5,6; 참조: 에페 6,25; 1테살 1,3).
믿음은 하느님의 거룩한 은총이다. 이 은총이 나에게 진정한 은총이 되기 위해서는 그 믿음이 항상 현실과 일치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즉 믿음은 외적인 환경까지도 변화시킬 수 있는 영적인 행위와 태도를 통해서 가장 확실하게 입증된다. 우리 신앙인들도 복음에 충실하다면 형제애를 통하여 불의와 불평등으로 가득 찬 주변의 환경을 변화시켜야 한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란 좋은 말만 늘어놓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더 나아가 믿음의 “행동”을 이루어나가야 한다. 믿음은 결코 자신의 이기주의 바람막이가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키는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편하지 못한 생활환경에서도 믿음을 실천적으로 실현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 믿음이 십자가 위에서 입증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베드로가 가이사리아에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고백한 것이나, 또는 궁핍한 형제들에게 위로의 말만 해주는 것과 같이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위로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을 우리의 생활을 통해 때로는 육체적으로도 함께 짊어지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의 신앙의 구체적인 실현을 살아가는 용기와 은총을 주님께 청하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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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12. 연중 제24주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마르 8, 30)
우리가
놓치고 살았던
소중한 삶을
되찾아 주십니다.
삶을 이루는 것은
분명 십자가입니다.
저마다의 십자가로
삶을 써 내려 갑니다.
십자가로 채워지는
우리의 여정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 영혼을 살리시는
영혼의 양식입니다.
우리 영혼을 되살리는
생명의 양식은 사랑입니다.
사랑을 먹고 사는
우리들 삶입니다.
우리를 위해
우리를 되돌리기 위해
친히 십자가가 되십니다.
당신은 십자가의
모든 사랑이십니다.
십자가로 새로운 길을
보여주십니다.
새로운 길은
나눔의 길입니다.
나눔은 생명의
본질이 됩니다.
생명의 본질이 되시어
삶의 목적지이신
하느님께로 이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십자가로
당신 친히
삶의 좌표가 되시고
사랑의 시선으로
여정의 종착지인
당신 십자가로
인내로 이끄시는
살아계신 십자가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이제는
떠나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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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12. 연중 제24주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하느님의 일, 사람의 일>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예수님께서는 그 뒤에,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마르 8,29-31).”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라는 질문은,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믿느냐?”,
또는 “너희는 왜 나를 따르느냐?” 라는 뜻입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라는 대답은, “저희는 스승님을 구세주로 믿고
있습니다.”, 또는 “저희는 스승님을 구세주로 믿기 때문에 따르고 있습니다.”
라는 뜻입니다.
당신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엄중한’ 지시는,
바로 뒤에 있는 ‘수난과 부활 예고 말씀’에 연결됩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구세주)이신 분”이라는 믿음은,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에 대한 믿음과 합해져야 비로소 올바른 믿음이 됩니다.
(수난, 죽음, 부활에 대한 믿음 없이 “예수님은 구세주이신 분”이라고 말하는 것은
신앙고백이 아니라, 그냥 들어서 알고 있는 지식을 말하는 것이 될 뿐입니다.
지식은 믿음이 아닙니다.)
1) 당신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지시를, 당신의 부활 때까지
침묵을 지키라는 뜻으로 해석한다면, 당신의 부활을 믿게 될 때까지는
“예수님은 구세주이신 분”이라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 자격이
없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수난 때에 제자들이 보인 행동은,
예수님은 구세주이신 분이라는 것을 말할 자격이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했고(마르 14,10-11),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이 체포될 때
예수님을 버리고 모두 달아났고(마르 14,50), 베드로 사도는 자기가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마르 14,66-71).
그런 상태로는 “나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다.” 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할 자격 자체가 없습니다.)
2) 예수님의 지시를, 뒤에 나오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 라는 말씀에 연결해서 생각하면,
예수님의 지시는, ‘자신을 버리고 온 삶을 다 바쳐서’ 예수님을 따르게 되기
전에는 “예수님은 구세주이신 분”이라는 것을 말할 자격이 없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머리로 믿는 것은 믿음의 시작 단계일 뿐입니다.
그 다음 단계는 온 마음을 다하여 믿는 것인데, 그것으로는 아직 부족합니다.
‘온 삶을 다 바쳐서’ 믿는 것이 제대로 믿는 것입니다.
<믿음은, “믿는 대로 사는 것”, 또는 “믿음과 삶이 일치되어 있는 것”입니다.
정말로 믿는다면 ‘삶’이 변화되어야 하고, 자기 인생을 전부 걸어야 합니다.
신앙인은 신앙생활이 인생의 전부인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명백히 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신 다음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며 꾸짖으셨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군중을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마르 8,32-35)”
“이 말씀을 명백히 하셨다.”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수난과 부활 예고 말씀’은 비유나 상징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날 일을 그대로 예고하신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신 다음”이라는 말은, 다른 제자들도 모두
베드로 사도와 같은 심정이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알고 계셨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을 말린 일은 베드로 사도만 한 일이 아니라,
다른 사도들도 모두 그렇게 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꾸짖으신 것은,
사실은 사도들 모두를 꾸짖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사탄’이라고 부르신 것은,
그의 행동이 ‘사탄의 일’과 같다는 뜻입니다.
‘사탄의 일’은 하느님과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방해하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것”도
‘사탄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사람의 일’은 ‘사탄의 일’이 됩니다.
(베드로 사도는 선의로 그런 행동을 했지만,
결과적으로 ‘사탄의 일’을 한 것처럼 되어버렸습니다.)
“내게서 물러가라.” 라는 말씀은, “내 뒤로 가라.” 라는 뜻이고,
“제자의 본분을 지켜라.” 라는 뜻입니다.
<스승이시며 주님이신 예수님의 뒤를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
신앙인이며 제자인 우리의 본분입니다.>
‘하느님의 일’은 하느님과 예수님의 인류 구원 사업입니다.
‘사람의 일’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은 생각하지 않고
지금 당장 편안하게 사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께서 가시려고 하는 길을 막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일을 ‘죄’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을 말린 것은, “그 길 밖에 없습니까?
다른 길로 갈 수도 있지 않습니까?” 라고 자기 의견을 말한 것입니다.
오늘날의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너무 힘든 고난과 시련을(십자가를)
만날 때가 많고, 그럴 때 “다른 길은 없을까? 꼭 이 길로 가야만 하는가?” 라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죄가 아니고,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일상생활의 ‘작은 일’을 하는 경우라면,
좀 더 쉽고 빠른 방법을 찾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길이 많다면, 쉬운 길을 놓아두고 일부러 어려운 길을 선택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신앙생활은 사서 고생하는 생활이 아니고,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하나 밖에 없는 그 길을 걸어가는 생활입니다.
힘들고 어렵다고 해서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을 포기한다면,
그것은 그 길 끝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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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12. 연중 제24주일. 방효익 바오로 신부님.
제1독서(이사 50,5-9ㄱ)는 처절하게 수난 받는 “주님의 종”의 모습을 말해줍니다.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이들이 듣게 하시려고, 많이 보면서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눈먼 자들이 보게 하시려고(42,18.20) 하느님께서는 의롭다고 여기시는 당신의 종을 선택하셨습니다(6,8). 이 종에게 주님의 제자처럼 말할 수 있게 해주시어 지친 이를 하느님의 말씀으로 격려할 줄 알게 하셨고, 매일 아침 귀를 일깨워주시어 하느님의 말씀을 듣게 하셨습니다(50,4). 주님께서는 당신의 종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정확하게 가르쳐주셨고, 깨닫게 해주셨기 때문에 주님의 종은 그분의 말씀을 거역하지도 않았고, 실천에 옮기는데 있어서도 물러서지도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의로워진 종은 그분의 말씀을 실천하면서 겪게 될 어떤 고통도 이겨낼 수 있으며, 부끄러운 일을 당해도 오히려 당당해지고 수치를 느끼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철저하게 자기편을 들어주시는 하느님 때문에 아무도 주님의 종을 단죄할 수 없고, 아무도 그를 이겨낼 수 없다고 노래합니다. 수난 받는 종이 아무런 이유 없이 부당하게 겪는 고통일지라도 피하거나 저항하지 않는 것은 무능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를 보호해주시는 하느님께서 자기편이시고, 무죄하다고 인정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예언은 바빌론 유배생활을 잘 견뎌내라는 격려이지만, 예수님께 닥칠 일들(마르 10,32)과 예수님의 제자들이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면서 겪게 될 아픔을 미리 말해줍니다(마르 13,9-13). 수난을 겪는 주님의 종은 원수들과 대결해야 하며, 그들을 이기기 위해 어떤 방법이 필요한지 알고 있으나 주님께서 다 해결해주실 것이기 때문에(이사 54,17) 하느님의 침묵에도 두려워하지 않고 견뎌낼 것입니다. 성령께서 대신 말씀해주시고, 지혜를 주실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주님의 제자들을 끌어다 법정에 넘길 때에도 무슨 말을 할까 미리 걱정하지 않을 것이며, 성령께서 일러 주시는 대로 말할 것입니다(마르 13,11).
복음(마르 8,27-35)은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예수님의 첫 번째 수난 예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당신이 누구신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고,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속의 왕권을 지닌 것(카이사리아 필리피)이 아니라 생명의 물이 솟는 영적 바위이심을(그리스도: 1코린 10,4) 제자들이 알게 해주시려고 엄청난 물이 솟구쳐 갈릴래아 호수를 채우는 샘터(헤르몬 산 끝자락) 근처로 이끄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두고 죽은 세례자 요한, 엘리야, 그리고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 아닐까 하면서 궁금해 하기도 했습니다(6,14-15). 세속의 왕권과 맞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십니다. 빵의 기적을 베푸셨을 때에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던(8,21) 제자들에게 이제는 당신이 누구신지를 분명하게 밝혀야 하기(복음 전반부의 마지막: 8,27-30) 때문입니다. “복음의 시작”(1,1)처럼 기름부음 받은 임금을 뜻하는(1사무 10,1; 16,1) “그리스도”라고 베드로는 고백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직도 당신이 하실 일이 더 있기 때문에, 그리고 다른 제자들도 깊이 생각해보라는 의미에서 비밀을 요구하십니다.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해서(1,1) 베드로의 신앙고백까지(8,30)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명과 정체성에 대하여 마을과 집에서, 들과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가르치셨습니다(하느님 나라의 지평). 그러자 곧바로 유혹하는 사탄이 다가왔습니다(1,13).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즉시(8,31: 복음의 후반부 시작)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면서 당신의 운명을 자세하게(수난, 죽음, 부활) 가르치기 시작하십니다(수난의 지평). 그러자 즉시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사탄이 나타납니다(8,33).
예수님께서는 “수난 받는 주님의 종”과 같은 삶은 물론이요 죽음까지 견뎌내시면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하느님의 뜻을 세 번(8,31; 9,31; 10,33-34)에 걸쳐 말씀하시는데, 오늘 복음이 그 첫 번째입니다.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과 논쟁하기 위해 대들었던 것이 이제는 배척으로 격화될 것입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잡아당기면서 책망하기 시작하는데, 멱살을 잡은 정도로 알아들어야 합니다. 베드로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 역시 보통 수준을 넘습니다. 하느님의 일이 아니라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어리석은 정도가 아니라 아예 사탄, 하느님 나라의 훼방꾼이라고 베드로를 꾸짖으십니다. “사탄”은 “갈라놓다.”는 뜻입니다. 사탄은 십자가에서의 죽음이 지닌 구원적 가치와 거룩함을 말살시키려고 합니다. 사탄은 하느님의 뜻이나 교회의 가르침에 순명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을 따르라고 강요합니다. 사탄은 하느님의 힘을 마술적 권력으로 대체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왜곡시키려 합니다(루카 4,1-13). 하느님의 계획은 수난과 죽음을 통한 부활의 영광으로 나아가는 구세주를 명백하게 말하는데, 베드로의 계획은 아무런 고통 없이 쉽게 영광을 얻으려합니다. 베드로는 성부와 성자의 사이를 갈라놓고 앞에서 설치려고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뒤로 물러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군중을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당신을 따르려면 앞으로 어떻게 믿음을 실천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가르쳐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 낚는 어부가 되려면(1,17)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이 말씀이 마치 우리에게 멍에를 씌우신 것으로 생각되겠지만 자신을 버리는 방법이 분명히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십자가란 하느님의 뜻을 따르겠다고 했을 때 미쳤다는 소리를 듣거나(3,21-22), 예수님을 따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는 것입니다(13,9.13). 올바름에도 박해나 미움을 받을 때 십자가를 짊어지는 방법은 겸손과 사랑뿐입니다. 십자가란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이때에 십자가를 짊어지는 방법은 자기 자신을 잘 알고, 남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자신을 추스르면서 솔선수범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쉽게, 자신이 짊어지고 있는 십자가가 다른 이들의 그것보다 더 크고 무겁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느끼기만 한다면(10,21), 조금만 더 겸손하고 사랑의 실천이 앞선다면 자기 십자가가 가장 가벼우며, 우리가 충분히 짊어지고 갈 수 있을 만큼의 십자가를 주셨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제2독서(야고 2,14-18)는 믿음과 행동이 함께 해야 한다는 유명한 내용입니다.
행동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된다는 주님의 가르침을 악용하면 믿기만 하면 되고, 사랑의 실천이 필요 없다고 주장하게 됩니다. 교회를 떠난 마르틴 루터가 바로 이 말씀 때문에 야고보 사도의 편지를 성경에서 빼버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주님이심을 믿음으로써 하느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을 받을 수 있지만, 그렇게 인정받은 믿음을 완성하려면 끊임없이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믿음 때문에 하느님께서 인정해주신 의로움이 세상에 드러나려면 사랑의 실천이 반드시 동반되어야 합니다. 또한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만 의로움을 가져다주는 믿음의 정도를 알 수 있으며, 사랑의 실천이 동반될 때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가진 의로운 사람이라는 사실이 확인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믿는다면서 사랑의 실천이 없는 사람은 한 번, 처음에는 하느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하시겠지만 더 이상 믿음이 없는 사람으로 판정 받을 것입니다. 실천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실천한다고 해서 무조건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충만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는 이들도 사랑을 많이 실천합니다. 하느님 사랑(수직적 사랑)과 이웃사랑(수평적 사랑)의 실천이 함께 어우러져야(십자가를 만들어야) 참된 믿음입니다. 우리가 짊어진 십자가가 제 아무리 무겁고 고통스럽다 할지라도 주님께서 골고타로 가실 때 짊어지신 십자가만큼 그렇게 무겁고 고통스럽겠습니까?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지실 수 있었듯이 하느님께 대한 굳건한 믿음이 있는 이들은, 그리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잘 아는 이들은 예수님처럼 묵묵히, 그리고 당당하게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갑니다.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는 것이 바로 하느님과 이웃사랑 실천의 시작입니다. 우리가 베드로처럼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한다면 공동체를 위한 봉사를 묵묵히 실천하는 것으로 그 믿음을 입증해야 합니다. 입으로는 그리스도를 고백하면서 하느님의 일을 무시하고 공동체를 외면하지는 않았는지 한 주간 동안 돌아봅시다.
우리 믿음의 조상 순교자들은 목숨까지 내놓을 정도로 가난하게 사셨던 그리스도를 완전하게 닮기 위해 수난 받는 종의 모습처럼 자기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지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셨습니다. 우리 눈에서 순교자들은 멀어졌지만 자기 믿음을 사랑으로 증명한 그 정신은 아직도 우리에게 남아 있기 때문에 우리는 순교자들을 현양하고 공경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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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12. 연중 제24주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말씀을 경청하며 묵묵히 실천하는 신앙 ♣
누구나 살아가면서 고통이라는 현실을 피할 수는 없다. 정의와 인권을 위해 움직여 보고, 정치권을 향하여 공동선을 위한 사회변화를 부르짖어 봐도 소용이 없고 오히려 박해를 받을 때 답답해지고 분노가 치밀기도 한다. 열심히 살려고 몸부림쳐 봐도 출구 없는 현실 앞에 좌절하곤 한다. 이런 삶의 자리에서 어떻게 믿음을 살아내야 할까?
제1독서는 유배시대의 예언자 제2 이사야가 전하는 ‘주님 종의 셋째 노래’이다. 유배시대는 단지 재산을 약탈당하고 억압과 차별을 받는 것을 넘어 유일신 신앙에 대한 심각한 위기를 맞았던 때였다. 이때 고난 받는 종은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고 고백한다(이사 50,6).
어떻게 그런 고난과 수모와 모욕을 견디어낼 수 있었을까? 고난 받는 종은 “주 하느님”이란 호칭과 그분께서 “내 귀를 열어주시고”(50,5), “나를 도와주시며”(50,7.9) “가까이 계신다”(50,8)는 표현을 통해 하느님과의 친밀함을 고백한다. 그가 심각한 신앙의 위기 속에서도 묵묵히 견디어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느님과의 친밀한 관계 때문이다. 그는 그 힘으로 ‘지금 여기서 겪고 있는 고통’을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이다.
고난 받는 종은 역사의 하느님, 곧 이스라엘이 걸어왔던 과거를 숙고하고 그 여정에서 늘 함께하시며 구원과 해방의 길로 이끄셨던 주님의 손길을 기억하였던 것이다. 그렇다! 참 신앙은 이렇듯 일시적으로 일어나 지나가버릴 현상에 매이거나 좌절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영원의 역사 안에서 활동하시고 함께하시는 사랑과 창조의 하느님의 눈으로 보고 묵묵히 걸어가는 것이 바로 참 신앙이다.
차별과 억압, 빈곤 등으로 사회가 병들고, 불의에 맞서 노력하여도 아무 소용이 없는 듯 보이고 가시적인 성과가 나타나지 않을 때가 훨씬 많다. 그러나 역사 안에서 결국 우리를 지켜주시고 자유와 해방의 길로 이끌어주시는 주님께 희망을 두고 꿋꿋이 걸어가자. 고난 받는 주님의 종이 그러하였듯이!
고난 속에서도 묵묵히 걸어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몇 가지를 실천함으로써 그것이 가능해질 것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말씀의 경청’을 통한 주님과의 친밀한 관계 형성이다. 이사야는 “주 하느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시니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50,5)고 말한다. 곧 말씀을 경청하여 하느님께서 내 안에 살아계실 때 그 힘으로 고난을 견디어낼 수 있게 되고, 현상을 넘어선 역사의 하느님의 눈으로 볼 수 있게 된다.
또한 믿음은 그저 추상적인 사변이나 내면적인 충만함의 체험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실천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믿음과 실천의 구분이 아니라 믿음의 표현으로서의 실천이 통합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성경공부나 묵주기도는 열심히 하면서 이웃과 이 사회의 아픔에 대해 사랑으로 직접 동참하는 실천이 없다면 그런 믿음은 거짓임이 분명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마르 8,29) 하고 물으셨던 그 질문을 오늘 나에게 던지신다. 우리는 그리스도 신앙의 핵심 질문 앞에 베드로처럼 ‘영광의 그리스도’에 갇히지 말고,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을 받아들임을 통해 사랑의 구원을 이루신 그리스도를 삶으로 고백할 수 있어야겠다.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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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12. 연중 제24주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2018년 9월 16일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시고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람들에게 비치는 예수님은 ‘세레자 요한’, ‘엘리야’,
‘예언자들 중에 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도 ‘스승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풀리지 않는 의문은 ‘왜 메시아가 수난을
받아야 하느냐?’라는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자 네 차례나 ‘주님의 종의 노래’을 예언합니다.
그 예언의 한 부분에서는 ‘수난 받는 메시아’에 대해서 강하게
표현했습니다.
구약의 배경에서는 풀리지 않는 수수게끼와 같은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은 타 민족들에게 여러 수난을 받은 이스라엘 민족자체로
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본문의 주인공은 복수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개인을 말하기 때문문에 구체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것과 연결시키는 것도 사실은
석연치 않는 점이 있고 그 설명도 무엇인가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수난과 연결하는 데에도 유대인들 입장에서는
‘짜맞추었다.’라고 주장할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사형에 처할 아무 근거도 없는 사람을 죽음까지
몰아세운 것은 바로 유대인들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 당시 로마제국 압제 하에서 사법권이 없어서 빌라도
앞에서 재판을 받기는 했어도 인위적으로 몰고 가기에는
무리가 또한 따른다는 것입니다.
얘기가 좀 벗어나는 느낌은 있지만 당시 유대인들 눈에는 예수님이 ‘
나자렛 사람’이지만 사실 그분이 유다 가문의 본 고장이며 다윗의
고향인 베틀레헴에서 태어나셨고 다윗의 후예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유대인들은 그분을 ‘나자렛 사람’으로 몰고 갔고 십자가
위의 죄목표시가 그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예수님의 수난과 이사야가 예언한 ‘수난 받는
메시아’의 모습이 어떻게 이렇까지 적중하느냐?’인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지혜로, 또 능력으로는 이해하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시며 온갖 모욕을 당하시던 예수님의 모습을
그리기라도 한 것처럼 분명 ‘수난 받는 메시아의 모습’인 것입니다.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이사 50,6)
‘이토록 메시아가 수모와 고통을 겪어야 하겠는가?’라는
주제는 유대인들의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지만 ‘예수님 수난’에서
그 의미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스승의 수난예고에 대해서 펄펄 뛰는 베드로의 입장을
우리는 한편에서 이해가 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토록 스승을 믿고 따랐고 심지어는 그분의 뜻대로
집까지 떠나서 이제는 더 버릴 것도 없는데
하늘같은 ‘스승께서 모욕을 당하며 돌아가시겠다니
‘말이나 되겠느냐?’라는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수난’, ‘고통’을 놓고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좋아하겠어요?
한 손 가락 중에 하나 손톱이 아픈 것도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아 보아야 한다‘. ‘약을 써야 한다.’하면서
이리저리 다니지 않습니까?
인간의 본성은 고통을 참기 힘들어 하는데,
어떻게 스승께서 수난과 수모를 받으시는 것을
말리지 않겠어요?
예언자가 전하는 메시아의 고백, “보라,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는데 나를 단죄하는 자 누구인가?”(이사 50,9)는 절규가
십자가에서 아버지께 대한 희망으로 이어집니다.
‘왜 저를 버리셨습니까?’라는 십자가의 말씀은 ‘아버지께 대한 희망’을
강하게 표현하는 것이지요.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서 달라지는 것은 ‘해야 할 말이 많아지는 것.’과
‘옛날에는...’라며 설명할 것이 많다는 것입니다.
둘 다 다르겠지만 같은 공통점이 있다면 공통적인 면은 나를
중심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잔소리도
심해지고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아 섭섭해지는 것도 늘어난다고 하지요?
이것이 심해지면 내 주위의 사람들이 슬슬 나를 피하는 눈치가
보이기도 하지요.
그러다보면 괜히 소외감도 생기게 되고 때로는 다른 세상에 사는
느낌도 든다고 합니다.
하느님 나라의 초대에 제일 거추장스러운 것이 바로 자신으로
똘똘 뭉쳐진 바로 ‘나’라고 합니다.
그러다 보면 하느님의 뜻을 듣기 보다는 내 뜻을 주장하기에
바쁘게 되는 것이지요.
베드로는 나이를 먹어가면서 오는 현상보다는 자기 입장에서만 주
님의신원을 이해하고 발언한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보면 베드로 사도는 극과 극을 달리고 모습으로
비춰지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께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마르 8,29)라고
신원을 정답으로 대답합니다.
이어서 주님께서 사람의 아들의 수난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본문은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마르 8,31)
그런데 스승의 말씀을 듣고 있던 베드로가 이번에는 주님의 뜻과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입니다.
본문은 이렇게 전합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32절)
주님께서 제자들을 돌아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33절)
우리가 실수하는 것 중에 하나가 아주 쉽게 ‘하느님 뜻’이라고
단정하는 것입니다.
사실 인간 중에 어느 누가 ‘이것이 하느님의 뜻이다.’라고
단언할 수 있겠어요?
그래서 부족한 인간은 겸손해야 하고 ‘하느님의 뜻’에 대해서
언급할 때에는 망설이고 주저해야 하는 과정을 지나야 하겠지요.
그리고 분명한 것은 많은 경우에 하느님의 뜻보다는
사람의 인간의 뜻을 더 따르며 남들에게도 강요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전해주시는 ‘하느님의 뜻’은 달콘한 것도
쉬운 것도, 빛나는 것도 아닌 바로 수난과 죽음, 인간이
싫어하고 피하고 싶은 ‘고통’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여러 꼬드김이 있다하더라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고 길을 나선 사람이고
때로 힘들고 어렵더라도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용기 있고 아름다운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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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12. 연중 제24주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종이 한 장 차이인 천사와 사탄 차이
나름 수제자였던 베드로 사도께서 공개석상에서 스승님으로부터
큰 모욕과 수치를 당하는 상황은 오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참으로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수제자로서 자부심이나 자긍심이 하늘을 찌르던 베드로 사도였습니다.
그도 한 인간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수제자로서의 우쭐함, 기고만장함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참으로 묘하신 분!
기를 쓰고 높이 올라가고자 발버둥치는 사람은 어떻게 해서든 보란듯이 깊은 바닥 체험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내가 누군지 알아? 나 이런 사람이야!’하는 사람들에게, 보란듯이 치욕적인 곤두박질을 체험하게 하십니다.
오늘따라 예수님의 참 교육은 그 강도가 아주 강렬했습니다.
애지중지하는 사랑하는 제자들, 그 제자들 가운데서도 으뜸 제자인 수제자 베드로 사도를 향해, 주님께서는
꽤나 지나친 용어를 사용하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마르코 복음 8잘 33절)
주님께서 수제자 베드로에게 그런 극단적 용어까지 사용하시면서 경고를 주시는 이유는 단 한 가지,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 것’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도 이 세상 살아가면서 종종 베드로 사도의 ‘사탄 전락 체험’을 하게 됩니다.
인간이라는 것이 흔들리는 갈대 같은 존재여서 그렇습니다.
어제 그리도 굳건히 서 있었는데, 오늘 속절없이 무너져버립니다.
어제 살아있는 천사가 따로 없었는데, 오늘은 영락없는 마귀로 둔갑해있습니다.
어제 구름위에 떠있는 것 같았는데, 오늘 제대로 된 바닥 체험을 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 입장에서 생각해봅니다.
솔직히 존경하는 스승님으로부터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소리, 결코 듣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보다는 “우리 베드로! 최고야, 에이스야, 넘버원이야!‘ 라는 소리 간절히 듣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간절한 열망과는 달리 스승님으로부터 들려온 소리는 사탄이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종에서 사탄으로 전락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생각해봅니다.
우리에게서 하느님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에서 하느님의 일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직 인간의 생각, 인간의 일만 남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서 영적인 일, 구원과 영원한 생명에 관한 일, 더 큰 가치, 공동선을 위한 일이 모두 빠져나가고
그저 삼시세끼 먹고 즐기는 일만 남게 될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사탄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교회 밖의 현실과 철저히 단절된 상태로, 자기 한몸 챙기기에 빠쁘게 될 때, 우리 역시 사탄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우리 교회 봉사자들이 본래 종의 모습을 망각하고 사심으로 가득한 형국으로, ‘내가 원장이야, 내가 시설장이야’라고 외칠 때, 우리는 영락없는 사탄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 안에 예수님은 온데 간데 없고 내 얼굴만, 내 이름만, 내 명함만 크게 드러날 때, 우리는 또 다른 사탄이 되는 것입니다.
새로운 시대, 새포도주이신 주님의 가치관과 인생관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기 위한 노력, 새 시대에 적응하려는 노력, 유연성과 탄력성을 거부한 채, 경직되고 고착화된 사고방식을 고수하려는 모습, 어쩌면 이 시대 또 다른 사탄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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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12. 연중 제24주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복음을 전할 때 벌어지는 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이 누구냐고 물으십니다. 베드로는 제자들을 대표하여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러 세상에 오셨음을 믿는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십니다. 하느님이 인간을 찾아오신 기쁜 소식을 왜 전하지 못하게 하시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당신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해 명백히 말씀하십니다. 이때 베드로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반박합니다. 아마 다른 제자들도 그렇게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이것이 당신이 누구인지 아는 믿음이 있어도 복음을 전해서는 안 되는 이유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은 진짜 우리가 전하는 복음의 내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그리스도 때문에 자기 목숨에 영향이 가지 않는 사람이란 아직 참 복음의 의미를 모르는 것입니다. 사탄, 마귀들도 예수님이 그리스도이며 하느님의 아드님임을 압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을 죽일 마음이 없으므로 복음을 전하지 않는 게 오히려 도와주는 것입니다.
영화 ‘파운더’(2016)는 밀크셰이크 믹서기를 판매하는 외판원 ‘레이크록’과 맥도날드 형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믹서기 하나 파는 것도 힘든데 어느 한 시골에서 8개나 주문한 것입니다. 도대체 어느 매장이기에 그 많은 믹서기가 필요한지 궁금해졌습니다. 당시에는 햄버거 하나를 주문하면 30분은 기본으로 기다려야 하는 때였습니다.
그런데 그 가게에서 햄버거를 주문한 레이크록은 자신이 주문한 것이 30초 만에 나오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라게 됩니다. 이것은 맥도널드 형제들이 수십 년간의 비법을 집대성하여 최대한 빨리 햄버거를 만들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나이가 들도록 아무 성과도 없이 믹서기나 팔러 다니던 레이크록은 이 매장을 프랜차이즈로 운영하면 떼돈을 벌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그래서 맥도널드 형제들에게 자신이 가맹점을 늘리는 것을 도와주겠다고 약속을 합니다. 사장인 맥도널드 형제는 자신들이 만드는 음식의 품질과 고유한 시스템을 손상하지 않는다면 손해 볼 것이 없다고 믿고 그 규정만 지켜준다면 그가 가맹점을 늘리게 해도 좋다고 허락해 줍니다. 그러나 이것이 실수였습니다.
레이크록이 가맹점을 늘리다 보니 자신에게 돌아오는 수익이 너무 적었습니다. 그래서 맥도널드 형제들 몰래 부동산 회사를 맥도널드 이름으로 설립합니다. 그는 가게에서 나오는 돈으로 부동산을 매입해 가맹점을 모집하고 그 사람들이 내는 돈으로 또 땅을 사서 가맹점을 모집했습니다. 그리고 아이스크림을 값싼 밀크셰이크 파우더로 대체합니다. 그렇게 이윤이 남는 것으로 또 땅을 삽니다.
이 사실을 맥도널드 형제들이 알았을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레이크록은 이미 부동산 재벌이 되어있었고 시골 가게 하나만 달랑 가진 맥도널드 형제가 재벌과 싸워 이길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결국, 형제는 목덜미를 잡고서 레이크록에게 맥도널드의 권리를 싼값에 팔 수밖에 없었습니다. 만든 것은 맥도널드 형제들인데 그 맥도널드를 널리 퍼뜨리려던 레이크록이 맥도널드까지 집어 삼키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를 죽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했다가는 어떤 결과가 올 것인지 보여주는 좋은 예입니다.
우리 속담에도 ‘원님 덕에 나팔 분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중에 원님을 위해 불던 나팔 때문에 사람들이 자신을 우러러볼 때는 원님 없이 혼자 영광을 챙기게 됩니다.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전하는 것이 이처럼 위험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무엇이어야 할까요? 내가 그리스도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그리스도가 되려면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나를 통해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그러면 아무리 사람들이 나에게 영광을 주더라도 내가 아닌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을 잊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사실 내가 죽고 그리스도로 사는 것이 복음의 내용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로 살기 위해 십자가에 나 자신을 죽이는 삶을 살지 않는 이들은 복음을 전하는 것 자체가 교회에 불이익을 주는 것입니다.
선거에 당선되기 위해 자신이 가톨릭 신자라는 것을 내세워 당선되고는 가톨릭 신자의 모습과 전혀 상반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리스도를 이용한 것이 됩니다. 이런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영화 ‘밀양’에서도 전도연은 아들을 납치 살해한 살인범을 용서할 수 있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하느님께 용서를 받았다고 말하는 그를 보며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자신이 용서하지 않았는데 하느님이 감히 어떻게 먼저 용서를 하느냐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이 죽지 않고 하느님과 분리된 사람은 결국엔 교회에 폐를 끼치게 만듭니다.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믿음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믿음을 갖는 것이 아니라, 그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와 내가 죽고 그리스도로 살게 되었다는 믿음입니다. 내가 전하는 복음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이 아니라 내가 그리스도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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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12. 연중 제24주일. 이승화 시몬 신부님.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한다.
신앙생활은
다양한 관점으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정화와 조명과 일치의 단계로 보기도 하고
초심자와 중급자, 더 나아간 자로 보기도 합니다.
하느님을 향한 마음으로
그분께 나아가는 이들은 모두 좋은 선택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내가 어떻게 나아가고 있는지 살펴보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유혹에 빠질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을 통해
우리는 신앙생활의 단계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는 예수님의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내가 예수님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또 어떻게 나아가고 있는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첫 단계는 나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오랜 시간 기다려왔습니다.
세례자 요한과 같이 희망을 주는 이를,
엘리야처럼 하느님의 일을 하는 이를,
예언자들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이를 기다렸습니다.
이들은 모두 내가 바라는 하느님의 모습입니다.
곧, 신앙의 여정길에서
나를 중심으로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이들은 마음의 평화를 원합니다.
보다 감각적인 위로를 얻기 바랍니다.
그렇기에 유혹도 함께 찾아옵니다.
만약 내가 힘들고 어려울수록,
또 어떤 감정이나 열정을 느끼지 못할수록
하느님을 향한 여정에서 방향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단계는 세상을 보며 살아가는 때입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베드로는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 기름부음을 받아 성별 된 이
곧 자신들의 민족을 구원해줄 메시아로 바라봤기 때문입니다.
나를 넘어 함께 할 때 더 나은 삶을 알기 때문에
내가 머물고 있는 이들을 위한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도구가 되어 봉사와 사랑을 실천하는 때입니다.
이들에게도 유혹은 찾아옵니다.
활동에 집중하며 영적 교만에 빠질 수도 있고
기도에만 집중하며 내가 만든 세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기도 합니다.
자칫 서로 비교하는 가운데
하느님이 아닌 사람에 머물기도 합니다.
마지막 단계는 하느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때입니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하느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이는
나의 눈이 아닌 하느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나의 뜻이 아닌 하느님의 뜻을 먼저 구하게 됩니다.
자신의 나약함을 온전히 깨달았을 뿐만 아니라
참된 행복이 하느님에게서 주어짐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세상을 심판하고 판단하기보다
그 안에 담기 하느님의 뜻을 먼저 찾게 됩니다.
피할 수 없는 고통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이들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디에 서 있을까요?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지만
두 다리가 땅 위에 굳건히 서 있듯,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느님을 찾기에
언제든지 유혹에 빠질 수도 있고 길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대한 희망을 간직한다면
언제든 돌아와 하느님과 함께 참 기쁨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번 한 주간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내 안에 하느님의 자리가 더욱 넓어져
그분을 통해 참된 행복을 체험할 수 있기를,
그리하여 흔들리지 않고 하느님께 나아가
사랑과 봉사로 서로에게 빛이 되어줄 수 있는
그런 한 주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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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12. 연중 제24주일. 김대군 형제님.
독서, 복음서 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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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내맡겼다.>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50,5.9ㄴ
5 주 하느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시니,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6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7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는 내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
8 나를 의롭다 하시는 분께서 가까이 계시는데, 누가 나에게 대적하려는가? 우리 함께 나서 보자. 누가 나의 소송 상대인가? 내게 다가와 오아라.
9 보라,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는데, 나를 단죄하는 자 누구인가?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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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사야 예언자는,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는 주님의 종의 말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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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독서<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로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야고보서의 말씀입니다. 2,14-18
14 나의 형제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한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 할 수 있겠습니까?
15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없는데,
16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잇겠습니까?
17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18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핳 것입니다. “그대에게는 믿음이 있고 나에게는 실천이 있소.” 나에게 실천 없는 그대의 믿음을 보여 주십시오, 나는 실천으로 나의 믿음을 보여 주겠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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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독서 주해(해제.역주 진 토마스>
믿음과 선행
신앙의 실천이 야고보의 가장 큰 관심사다. 그는 이미 신앙과 실천에 관해 언급했다. 이제 14-26절에서는 신앙과 실천의 관계를 본격적으로 다룬다. 바오로는 인간이 신앙으로만 의롭게 된다고 주장했는데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신앙은 사람을 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야고보가 강조하는 행동은 바오로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비판한 “율법의 행업”이 아니라 바오로가 신앙과 성령의 “열매”라고 한 덕행이다.
야고보는 행동으로 구현되고 입증되는 신앙을 요구한다. 그 행동은 특히 이웃사랑과 기도다. 이와같이 행동을 강조하는 것은 마태오복음에 반영된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의 입장과 비슷하다. 바오로는 율법의 행업으로 구원된다는 보수적인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의 구원론을 반대하여 신앙으로 구원된다는 점을 강력히 내세웠다. 그 결과 그는 신앙과 행동을 엄격히 구별하게 되었다. 그러나 야고보가 직면한 현실은 아주 달랐다. 그는 바오로의 가르침을 일방적으로 왜곡하여 행동의 가치를 무시한 사람들을 바로잡기 위해 신앙과 일치를 강조하게 되었다.
15절
15-16절은 훈계가 아니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소용이 없다는 것을 실감나게 설명하는 비유다.
18절
18-19절의 뜻을 밝히기는 매우 어렵다. 해석자들의 의견이 각각 달라서, 디벨리우스는 18절을 신약성서의 가장 어려운 구절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문제는 “어떤이”가 누구냐 하는 점이다. 문학유형상으로만 본다면 필자와 반대되는 입장을 취하는 사람이지만, 내용상 18절의 경우에는 야고보와 같은 입장을 취하는 사람이다. 이 “옹호자”의 말은 23절까지 계속된다. 18절에서 23절까지는 상대가 “너”이고 24절부터는 상대가 다시 “여러분”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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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한다.>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8,27-35
그때에
27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카이사리아 필리피 근처 마을을 향하여 길을 떠나셨다. 그리고 길에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하고 물으셨다.
28 제자들이 대답하셨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언자 가운데 한분이라고 합니다.”
29 예수님께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하고 물으시자,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하고 대답하였다.
30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31 예수님께서는 그 뒤에,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32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명백히 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과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33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신 다음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까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하며 꾸짖으셨다.
34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군중을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35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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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서 주해
베드로의 메시아 고백
전승자 혹은 마르코는 예수의 정체에 관한 군중의 여론과 베드로의 고백을 한데 묶어 스승과 제자들간의 대답을 만들었다. 이 두 가지는 본디 따로 전해온 독자적 전승요소였다. 군중의 여론은 6.14-15에도 수록되어 있는데, 예수님을 두고 실지로 그런 여론들이 나돌았다. 베드로의 고백도 역사적 신빙성이 있을까? 실지로 베드로가 필립보의 가이사리아 근처에서 예수의 신분을 밝혀 “당신은 그리스도십니다”라고 했다는 설이 있지만 별로 설득력이 없다. 오히려 베드로의 고백은 예수 공생활 때의 사실보도이기보다 예수 부활 이후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이라는 인상이 짙다.
사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사건들을,특히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선포하고 믿기도 했지만 한걸음 더 나아가 예수의 정체를 밝혀 “예수께서 주님이시로다”라고 환성을 질렀던 것이다. 베드로의 답변은(29절) 바로 이 환성의 변형이다. 환성이야말로 가장 깊이있는 신앙고백이다.
27절
필립보의 가이사리아는 헤로데 대왕의 아들이며 갈릴래아 영주 헤로데 안티파스의 이복 동기인 헤로데 필립보가 헤르몬 산 아래 지하수가 펑펑 솟아나는 자리에다 기원전 2년경에 세운 도시다. 갈릴래아 호수에서 북쪽으로 백리쯤 되는 곳. 지금은 “바나야스”라 한다.
지금까지는 예수께서 자주 배를 타고 갈릴래아 호수를 건너다니셨으나 이제부터는 가이사리아에서 예루살렘으로 “길”을 가신다. 그분이 예루살렘에서 처형되신만큼 거기로 가시는 것은 죽음에의 행진이다.
30절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시나 영화를 누리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고난을 받으실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십자가사건이 있기 전에는 당신 정체를 알리지 못하도록 함구령을 내리신다.
수난과 부활에 대한 첫 번째 예고
베드로가 예수의 정체를 밝혀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하고 고백했으니(29절)이제 어떤 의미의 그리스도인지 보충설명이 필요하다. 그래서 마르코는 세 번 거듭 수난과 부활에 관한 예고를 실어 수난하고 부활하시는 그리스도임을 강조한다.
수난과 부활에 과한 삼중예고를 살펴보면, 우선 그 내용이 초대교회에서 선포하고 믿던 것과 같다. 사실 선포와 신앙의 주제는 한결같이 십자가와 부활이다. 아울러 삼중예고에는 수난과 부활 하건을 전제하는 요소가 있다. 즉, 예수 수난과 부활을 체험한 다음 그것을 보도형식으로 기사화하지 않고 마치 예수께서 그런 일을 예고하신 양 예언형식으로 꾸민 것이다. 먼저 사건을 체험한 다음에 그것을 예전처럼 꾸민 것을 일컬어 사후예언이라 한다. 첫 번 예고 가운데(31절) “원로들과 대제관들과 율사들”그리고 “사흘 후에”는 사후 예언에 속한다. 의인들이 한동안 적수들한테 고통을 당하지만 결국 하느님에게 구원받는다는 주제가 구약성서에 나온다.
의인들의 고난과 구원이란 주제가 예수 수난과 부활에 관한 삼중예고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끝으로 8,31-33의 서술양식을 규정한다면 상황묘사로 시작해서 예수님의 말씀으로 끝맺기 때문에 상황어라 하겠다. 그런데 예수께서 제자들을 상대로 말씀하신 상황어이므로 제제교육 상황어라 하겠다.
31절
“가르치기 시작하다”는 전형적인 마르코 문체다. 이 복음서에 “가르치다”는 17번, “... 하기 시작하다”는 26번쯤 나온다.
“사람의 아들”은 고난당하는 인자.
“마땅히 ... 해야 한다”에는 하느님의 뜻에 절대 복종하시는 예수님의 마음가짐이 엿보인다.
원로들은 유지들을, 대제관들 중견 제관들을. 율사들은 주로 바리사이계 율법 전문가들을 뜻한다. 이들이 모여 최고의회를 구성했는데 실지로 예수 수난의 주역들이었다. 수난의 주역 열거는 사후예언이다.
“사흘 후에”, “사흘 만에”는 같은 뜻이다. 31절에서 죽음과 부활 사이를 3일로 잡은 것은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는 선포문에서 영향을 받았다. 이제 선포문에서 그렇게 부활일을 명시한 이유에 관해 세 가지 설이 있다. 부인들이 무덤에 예수의 시신이 없는 것을 발견 한 때가 일요일. 곧 돌아가신 지 삼일 만이었다고 보는 설, 가장 신빙성이 있는 설이다.
예수께서 처음으로 발현하신 때가 돌아가신 지 사흘만이었다고 보는 설.; 부인(들)에게 나타나신 발현사화, 베드로에게 나타나셨다는 언습, 엠마오로 가고 있던 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발현사화, 열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발현사화, 열 제자에게 나타나신 발현사화에 나오는 발현 날짜를 너무 순진하게 믿는 설이다.
의인들이 잠시 고난을 당하지만 사흘 만에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 있는데 그 뜻인즉 빠른 시일 안에 구원을 받는다는 것, 즉 예수께서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는 신조가 그 영향을 받은 것이라면 이는 꼭 사흘을 뜻하는 게 아니라 그냥 가까운 시일을 의미한다는 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 부활일을 명시할 때 언제나 “사흘 후에”또는 “사흘 만에”라고 하는 사실로 미루어볼 때 납득이 가지 않는 설이다.
32절
“명백히”는 공관복음 전부를 통틀어 여기에만 나오는 낱말이다. 이제부터 예수님은 당신이 고난받으실 것을 “명백히” 말씀하신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고백했으나(29절) 수난하는 그리스도이신 줄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스승을 나무란 것이다.
33절
스승과 제자가 함께 길을 가면 스승은 앞서가고 제자는 뒤따라갔다. 그러므로 “내 뒤로 물러가라”하신 말씀은 베드로가 제자의 위치로 돌아가 스승을 따를 생각을 하라는 뜻이다.
사탄은 귀신들의 두목. 베드로는 사탄의 사주를 받아 예수께서 고난의 길을 가시려는 것을 만류했다.
어떻게 예수를 따라야 하는가?
본디 상관이 없는 네 단절어가 초창기 신도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일찍이 어느 전승자가 넷을 한데 모아 집성문을 엮었는데, 마르코는 그것을 채집하여 이 자리에 배치했다. 모름지기 제자들은 수난하고 즉으신 스승을 따르고 본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34절
추종어의 번체가 어록에도 전해온다. 추종에 요구되는 두 조건은 자아 부정과 십자가 수락이다. 자아 부정은 무조건 자아를 포기하라는 뜻이 아니라 추종에 역행하는 자아를 버리라는 뜻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예수님을 철저히 따름으로써 자아를 온전히 실현하라는 것이다. 예수께서 “자기 자신을 버리라”고 명하신 것은 장자가 “자아를 엃었다”고 한 것과 같은 뜻이다.
“ 그 십자가를 지고”는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신 일을 상기하여 전승자가 가필한 것 같다. 그렇다면 여기 “그 십자가”는 예수의 십자가일 수도 있고 추종자의 십자가일 수도 있겠다.
35절
이 단절어의 변체가 어록과 요한 12.25에도 있다. 35절의 경우 전.후반부가 병행문인데, “나와 복음 때문에”를 삭제한다면 더욱 완벽한 병행문이 된다. 전승자가 “나 때문에”를 덧붙인 결과 “나와 복음 때문에”라는 표현으로 발전했을 것이다.
가필을 제외한 병행문을 살펴보자. 얼핏 보면 군 지휘관의 훈시를 연상케 한다. 전선으로 출동할 병사들을 앞에 놓고 “죽을 각오를 하면 살고 살 생각을 하면 죽는다”따위 훈시를 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군 지휘관이 아니고 하느님 나라 선포자였다. 따라서 단절어의 뜻인즉 이렇다. 지금 일시적인 목숨을 보전하려고 작심하는 사람은 장차 신국에서 영생을 잃을 것이요, 현재 일시적인 목숨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은 장차 신국에서 영생을 차지할 것이다. 그럼 어떤 상황에서 이 말씀을 하셨을까? 예수 생애 말기쯤 종교계 지도자들이 당신을 처단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스승은 제자들을 상대로 이 역설적인 말씀을 하셨으리라.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분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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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12. 연중 제24주일. 김 로마노 형제님.
연중 제24주일 제1독서(이사50,5~9ㄴ)
"주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어,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알게 하신다. 그분께서는 아침마다 일깨워 주신다. 내 귀를 일깨워 주시어, 내가 제자들처럼 듣게 하신다. 주 하느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시니,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4~5)
이사야 예언서의 '위로의 책'(이사 40~55장)에서 특별히 주목할 부분이 네 개의 노래로 되어있는 '야훼의 종' 또는 '주님의 종'에 관한 신탁이다(42,1~9; 49,1~7; 50,4~11; 52,13~53,12).
여기서 주님의 종이 누구를 가리키는가를 두고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신약 성경의 저자들은 한결같이 예수님을 '주님의 종'으로 이해하였다.
첫번째 주님의 종의 노래는 주님의 종의 선하신 성품과 주님의 종을 향한 하느님의 전적인 보증을 강조했다(42,1~9). 두번째 노래는 하느님의 전적인 부르심과 영광과 승리의 약속을 강조하였다(49,1~7). 이에 비해서 세번째 노래와 네번째 노래는 모두 종의 고난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오늘 독서가 들어있는 세번째 노래(50,4~11)는 주님의 종이 고난 가운데서도 전적으로 인내하며 순종함으로써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하리라는 확신을 강조한다.
이 점에서 주님의 종의 고난에 집중적으로 촛점을 맞추는 네번째 노래(52,13~53,12)와 구별된다.
세번째 노래의 말하는 자(話者; 화자)도 두번째 노래와 마찬가지로 주님의 종 자신이다. 이 종은 하느님께 순종적이고 신실한 자이며 하느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 큰 고난을 당하지만 하느님의 도우심에 대한 강한 확신으로 믿음을 굳게 지키는 자로서 모든 믿는 이들에게 참 신앙의 표본이 되는 인물이다.
'주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어'(4)
본문에서 주님의 종은 자신을 1인칭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는 주님의 종으로서 주님(주 하느님)을 자신의 '주'로 칭한다. 이에 해당하는 '아도나이'(adonai)는 단순히 종을 자유자재로 부리는 권한을 가진 주인이란 의미가 아니라 온 우주의 주재권을 가지고 있는 만왕의 왕을 지칭하는 표현이다.
주님의 종은 바로 이러한 만왕의 왕이신 주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제자의 혀'를 주셨다고 말한다. 여기서 '제자들'에 해당하는 '림무딤'(limmudim)은 '배우다'(신명5,1),'본받다'(신명18,7)의 뜻이 있는 동사 '라마드'(lamad)에서 유래하며, '배우는 자'란 문자적 의미를 지닌다.
이사야서 8장 16절에서에서 '제자'란 의미로 이사야서 54장 13절에서는 '교훈을 받는 사람'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단지 공부를 많이 해서 박식해진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스승과의 긴밀한 인격적 관계를 통해 그에게서 모든 좋은 것들을 다 배워 스승의 뜻대로 행할 수 있는 완벽한 자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절에서 '제자의 혀를 주시어'란 말은 주님의 제자로서 주님과의 인격적 관계 아래에서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말만 하는 것을 나타낸다. 또한 후반절에 나오는 '제자들처럼 듣게 하신다'는 내용 역시 주님의 말씀에 대한 주님의 종의 열정을 보여준다.
즉 주님의 종은 주님과의 깊은 관계를 통해 그의 말씀을 바로 듣고, 깊이 이해하여 순종하며 주님께서 전적으로 신임할 수 있는 자인 것이다.
주님의 종은 그러한 지식을 바탕으로 하여 주님의 백성에게 바른 지식을 가르치는 사명을 감당하게 될 것이다.
이같은 측면에서 본문의 '주시어'에 해당하는 '나탄'(natan)은 '위임하셨다', 또는 '임명하셨다'는 의미로 의역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상에서 메시아적 사명을 완수하실 때에 사람들로부터 배우지 않은 자인데,
어디에서 그런 깊은 지식이 나오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들으셨다(요한7,15~16).
주님의 종이셨던 그리스도께서는 성부 하느님을 통해 참된 지식을 공급받으셨고, 그 지식에 근거하여 말씀을 전파하셨던 것이다(요한8,28).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알게 하신다'(4)
이 본문은 왜 주님께서 종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는지 그 목적이나 결과를 말해준다. 즉 본문은 제자의 혀를 가지신 주님의 종의 주요한 사명이 주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예언하고 있다.
특히 그는 지친 이<困苦(곤고)한 자>에게 말씀을 가르쳐 그를 돕는 일을 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지친 이'에 해당하는 '야에프'(yaeph)는 피곤하여 지친 상태를 나타내는 동사 '야아프'(yaaph)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피곤해 기진맥진한 사람을 의미한다(40,28.30.31).
그리고 '말로'에 해당하는 '따바르'(dabar)는 주님의 말씀을 의미한다. 주님의 말씀은 창조의 권능과 생명을 부여하는 권능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메시야가 원하는 주님의 말씀은 지친이로 하여금 생명과 능력을 회복하게 하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자신의 힘으로는 의로움과 구원에 이르지 못하며 어떤 소망도 없다고 고백하는 자들, 그리하여 전적으로 주님만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자들은 그 말씀을 통해 위로와 힘을 얻어 능력있게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아침마다 일깨워 주신다'(4)
주님께서는 그의 종이 가르치는 사명을 효과적으로 감당하도록 매일 아침마다(morning by morning) 그의 이성과 영성을 일깨우신다는 사실이 예언된다. '일깨워 주신다'에 해당하는 '야이르'(yair)의 원형 '우르'(ur)는 문자적으로 잠을
깨우는 것을 의미한다.
구약 성경에서 모두 65회 사용된 용례에서 이 단어는 주로 마음을 부추기거나 감동시켜 어떤 일을 하게 하는 것을 나타내는 데 사용된다. 이성을 날카롭게 하시고 영성을 일깨우며 사명감을 북돋운다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본문에 이어지는 '내 귀를 일깨워 주시어 내가 제자들처럼 듣게 하신다'란 예언에서 더 확실하게 드러난다.
여기서 '듣게 하신다'에 해당하는 '리쉬모아으'(lishimoah)는 '듣다'라는 의미를 지닌 '샤마으'(shamah)의 부정사에 '~하기 위하여'란 뜻의 전치사 '레'(le)가 결합된 형태로 직역하면 '듣도록'이라는 의미가 된다.
주님의 종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실패한 주님의 말씀을 듣는 문제(이사48,8.18)에 걸려 넘어지지 않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그 말씀을 먼저 들으시고 그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모범을 보이시는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시니'(4)
본절은 주님의 종이 이스라엘 백성과는 달리 주님의 말씀을 기쁘게 듣고 순종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러한 내용은 주님께서 종의 귀를 여셨다는 본문으로 시작하는데,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귀가 모두 열리지 않았다는 이사야서 48장 8절의 진술과 정확히 대조를 이룬다.
'너는 듣지도 못하였고 알지도 못하였다. 예로부터 네 귀가 열리지 않았으니 네가 배신만 하고 모태에서부터 반역자라 불릴 것임을 내가 알았기 때문이다.'(이사48,8)
원문상으로도 '열다'라는 의미의 동사 '파타흐'(patah)가 본문과 이사야서 48장 8절에 각각 사용되었다.
그들은 듣는 귀가 닫혀 있어서 들어도 듣지 못하며(이사6,9), 아예 주님의 명령 듣기를 싫어하는 자들이다(이사48,8). 반면 주님의 종은 주님께서 그의 귀를 열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말씀을 완전하게 받아들이고 완전하게 순종한다.
바로 여기서 주님의 종이 하느님께서 부여하신 사명을 완전하게 감당할 수 있었던 근거가 나온다. 따라서 믿는 이들도 말씀을 듣지 않으므로 거역하고 범죄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과거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주님의 종의 듣는 태도를 배워야 한다.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5)
원문에서 '나는'에 해당하는 '아노키'(anoki)라는 인칭 대명사가 매우 강조되어 있다. 여기서 이 단어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 만큼은'이라는 강조적 의미를 나타낸다. 주님의 종만큼은 부르심과 말씀에 절대 순종의 자세로 반응한다는 것이다.
본문에서 '거역하다'에 해당하는 '마라티'(marathi)의 원형 '마라'(mara)는 원래 음식의 맛이 매우 쓴 것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구약성경에서 대부분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거역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마음을 쓰라리게 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이사1,20; 민수20,10; 신명1,26). 그러나 주님의 종은 절대로 그렇지 않고 오히려 언제나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일만 행하신다(요한8,29).
또는 '뒤로 물러서다'에 해당하는 '아호르 네쑤고티'(ahor nesugothi)는 겁을 집어 먹고 뒤로 도망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주님의 종은 사명을 감당하는 자리에 섰을 때 온갖 두렵고 떨리는 일이 계속 일어날 것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로 인해 도망치거나 물러서지 않는다. 이러한 주님의 종의 사명은 메시아의 공생활 가운데 그대로 구현되었다
연중 제24주일 복음(마르8,27~35)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33)
마르코 복음 8장 32절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고 나온다. 베드로는 마르코 복음 8장 31절의 주님의 수난 예고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현세적이고 정치적인 메시야로 믿고 있던 예수님께서 고난을 겪으시고 죽임을 당하신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며, '그리스도'이신 주님을 통해 얻을 것으로 고대했던 모든 영광이 물거품처럼 사라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마르코 복음 8장 21절의 '반박하기 시작하였다'에서 '반박하다'에 해당하는 '에피티만'(epitiman; to rebuke)의 원형 '에피티마오'(epitimao)는 '경고하다', '경계하다', '책망하다', '꾸짖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마르코 복음 8장 33절에서 베드로를 향해 '사탄아'라고 하시며 엄중히 꾸짖으시는 것을 감안할 때, 이미 어두움의 세력에 붙잡힌 베드로가 예수님을 향해 매우 거칠게 대들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사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구속 사업을 방해하기 위해서, 잘못된 메시아관을 가진 채 예수님을 향한 그릇된 열심과 애정으로 불타고 있는 베드로의 마음을 이용했던 것이다.
마르코 복음 8장 33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길을 막아서는 베드로를 향해 '사탄'이라고 하신다.'사탄아'에 해당하는 '사타나'(satana; satan)은 '적대자'를 뜻하는 '사타나스'(satanas)의 호격이다.
신약 성경의 36회 용례 중에서 34회가 모두 그리스도와 하느님 자체, 또는 그분의 일을 방해하고 대적하는 영적 세력인 '사탄'을 일컫는 말로 쓰였고, 나머지 2회는 여기와 그 병행구절인 마태오 복음 16장 23절의 '베드로'에 대해 쓰였다.
베드로도 사탄의 세력에 사로잡혀서 주님의 일을 방해하는 자로 쓰임을 받았기 때문에 그 순간에는 주님의 적대자였다고 할 수 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가장 위대한 신앙 고백을 했던 자가 너무나 쉽게 주님의 적대자로 전락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이 세상에 오신 최종목적인 아버지의 인류 구원 사업을 위해서 반드시 걸어가야 하는, 고난의 십자가의 길을 가지 못하도록 거칠게 대드는 사탄의 조정을 받고 있는 베드로의 기운에 조금도 눌리지 않으시고, 무서울 정도로 단호하고 담대하게 그를 뿌리쳐 버리신다. 그리고 '내게서 물러가라'에 해당하는 '휘파게 오피소 무'(hypage opiso mu; get behind me)에서 '물러가라'로 번역된 '휘파게'(hypage)는 '휘파고'(hypago)의 현재 명령형이다.
이것은 '너는 지금 당장 내 뒤로 가라'는 뜻이며, 사탄의 도구가 된 베드로에게 상징적으로 스승이신 예수님 당신을 따라야 하는 제자로서의 본분과 위치를 지키라는 뜻이다.
즉 제자란 예수님 당신을 따르는 존재이지, 이끄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며, 제자가 스승이신 예수님의 사명을 마음대로 결정할 권한이 없음을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것이다.
한편, 병행 구절인 마태오 복음 16장 23절에는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라는 말이 더 첨부되어 있다. 이에 해당하는 '스칸달론 에이 에무'(skandalon ei emu; you are an obstacle to me; you are stumbling block to me)에서 '걸림돌' 혹은 '넘어지게 하는 자'에 해당하는 희랍어 '스칸달론'(skandalon; an offence)은 '올무', '함정'이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
'모케쉬'(moqesh)와 '걸리다', '거치다', '장애물'이란 뜻을 가진 히브리어 '미크숄' (mikshol)에 대한 70인역(lxx)의 역어로 '길에 놓여 걸려 넘어지게 하는 어떤 장애물' (걸림돌) 혹은 '다른 이를 범죄하도록 유도하는 일을 행하는 것'이란 뜻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본문에서의 베드로의 행위가 메시야 되시는 예수님께서 걸어가셔야 할 구원의 길을 방해하는 걸림돌로서 하느님의 뜻을 어기도록 유도하는 범죄의 행위가 됨을 뜻하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고난을 받을 수 없다며 극구 만류하는 베드로의 말과 행위는 예수님의 공생활초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했던 사탄의 유혹의 목적과 같이 예수님의 구속 사업을 방해하는 것이다.
끝으로 '너는 ~생각지 ~ 하고'에 해당하는 '프로네이스'(phroneis; you do have in mind)의 원형 '프로네오'(phroneo)는 '마음에 두다', '중히 여기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본문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단지 현세적이고 정치적인 메시야로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바로 이것에 집착하는 것이 사람의 일이고, 예수님께서 고난을 겪으시고 죽임을 당하시는 일이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하느님의 일임을 나타낸다.
또한 이 구절은 현재 능동태 직설법으로 현재의 진행중인 동작을 나타내고 있기에,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순간까지도 베드로의 마음이 오로지 인간적인 생각으로 가득 차 있음을 나타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