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019. 묵상글 들 (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 은총으로 죄에서 사랑으로 .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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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9.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은총으로 죄에서 사랑으로
오늘 바오로 사도는 죄와 은총의 관계에 대해 얘기합니다.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
이 주제를 얘기할 때 제가 자주 얘기하는 관점이 있습니다.
올바른 회개는 무엇이며 올바른 관상은 무엇일까와 관련된 것인데
이 회개와 관상이 사람에 따라 차이랄까 단계가 있습니다.
먼저 죄에 대한 감수성이 너무도 무딘 사람이고,
자기의 죄가 무엇인지 전혀 또는 너무도 모르고 못 보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자기 성찰이 없는 이에게 회개는 기미도 없을 것이고
관상과 같이 너무 고상한 얘기는 아예 꺼내지도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사는 사람은 양심에 가책이란 것이 없으니
속 편하게 살며 자기는 행복하다고 생각하며 살 것입니다.
다음은 자신을 성찰할 줄 알고 죄에 대한 감수성도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회개의 가능성이랄까 싹이 있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의 성찰이 자기 성찰에만 그치고 하느님을 보지 못하면
그런 성찰은 회개의 성찰이 되지 못하고
그런 관상은 자기만 보고 자기 안에 갇히는 것이 되고 말 것이며
이 경우 회개는 회심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회한으로 남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은 양심의 가책과 죄책감에 시달릴 것이고,
그래서 어찌보면 앞의 무딘 사람보다 더 괴롭고 불행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올바른 회개와 올바른 관상은 자기 죄에만 머물지 않고,
하느님과 하느님 은총을 보고 나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런 사람은 자기도 보고 하느님도 보며
자기 죄도 보고 하느님 은총도 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은 이렇게 볼 뿐 아니라
하느님과 하느님 은총에로 나아간다고 했는데
그렇지요. 죄책감과 회한에 머물지 않고 은총에로 나아가고
더 나아가 하느님 사랑에로 나아가 그 사랑에 마침내 머물게 됩니다.
우리 교회의 오랜 영성 전통에 삼중도(三重道, Triple Ways) 곧
정화의 길, 조명의 길, 일치의 길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정화와 조명을 거쳐 마침내 일치에 도달하는 길입니다.
그런데 정화란 말할 것도 없이 죄의 정화를 말하는 것이고,
죄의 어둠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이 죄의 어둠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바로 조명의 은총입니다.
은총을 받는 사람은 햇볕 좋은 날
빨래를 빨아 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고,
죄책감으로 자기 안에 또는 어둔 골방에 갇혀 있던 사람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볕을 쬐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 은총으로 자기 죄를 씻고 하느님 사랑에 머무는 것이
참으로 행복한 것임을 볼줄 아는 사람만이 이렇게 할 것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죽기 얼마 전 형제들에게 편지를 쓴 다음
형제들을 위한 기도로 편지를 마감하는데 이렇게 기도합니다.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느님, 가련한 우리로 하여금
내적으로 깨끗해지고, 내적으로 빛을 받고, 성령의 불에 타올라
당신의 사랑하시는 아드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를 수 있게 하시고 오로지 당신의 은총으로만 당신께 이르게 하소서."
저나 여러분이나 모두 하느님 은총으로 자기 죄에서 하느님 사랑으로
나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비는 오늘 이 아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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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9.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있는 종들!”
오늘 <복음>은 종말의 준비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놓고 있어라.”(루카 12,35)
여기에서, 깨어있음의 표시는 두 가지입니다. ‘허리에 띠를 매고 있는 것’과 ‘등불을 켜놓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탈출기>에서 하느님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파스카 음식에 대해 하신 말씀, 곧 “그것을 먹을 때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발에는 신을 신고 손에는 지팡이를 쥐고, 서둘러 먹어야 한다.”(탈출 12,11)는 말씀을 떠올려줍니다.
“허리에 띠를 매고 있어라”는 것은 육체노동을 하는 이들이 허리에 띠를 매듯이 일할 수 있는 자세를 갖추고 경계하고 있는 것(알렉산드리아의 치릴루스), 혹은 사나운 욕망을 억제하기 위해 허리에 띠를 매고 있는 것(아우구스티누스)을 말해줍니다. 곧 임을 맞아들여 시중 들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도둑이 몇 시에 올지”(루카 12,39) 모르듯, “생각하지도 않을 때 사람의 아들이 올 것”(루카 12,40)이기 때문입니다.
“등불을 켜놓고 있어라”는 것은 마음과 지성에 등불을 밝히고 기운차게 깨어 있으라는 것(알렉산드리아의 치릴루스), 혹은 선의 행실로 등불을 밝힘(아우구스티누스)을 의미합니다. 곧 임이 잘 찾아올 수 있도록 불을 밝혀두고, “빛 속에 있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빛으로 준비하고 있는 것, 빛 속에 있는 것이 “깨어있음”이라는 말씀입니다. <시편>에서 “말씀은 발의 등불”(시 119,105)이라 말하고 있듯, 말씀의 등불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예수님께서는 ‘주인을 기다리는 종의 비유’를 통해 “깨어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있는 종들!”(루카 12,37)
여기서 ‘깨어있음’은 단지 잠들어 있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을 기다리고” 있음을 말합니다. 잠들지 않고 있다고 해서 모두가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주인이 돌아오면 문을 “곧바로 열어 주려고” 뜨거운 열망으로 기다리는 것, 곧 사랑의 열망으로 임을 그리워하는 것, 희망하는 것이 깨어있음입니다. 정리해 보면, 깨어있음은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놓고 주인이 오기를 그리워하고 기다리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다림은 이미 축복입니다. 그 안에 이미 임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곧 기다리는 이 안에서 임이 이미 빛을 밝히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깨어 기다리는 이는 이미 빛 속에 있는 이요, 이미 등불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곧 우리가 “깨어있을 수 있음”은 이미 품고 있는 임으로 말미암아 것, 곧 깨어 계시는 임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시편> 말씀처럼 “당신 빛으로 당신을 봅니다.”(시 36,10).
그런데 이 비유의 주인은 참으로 묘하신 분이십니다. 주인이 돌아오면 종이 주인의 시중을 드는 일이 당연하거늘, 오히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루카 12,37)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주인님은 그러신 분이십니다. 우리보다 먼저 우리를 섬기시는 분이십니다. 그리하여, 우리를 복된 사람으로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바로 이 미사의 성찬을 차려주시니, 그저 주님 사랑에 감사드릴 뿐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기도 -
“행복하여라. ~깨어있는 종들!”(루카 12,37)
주님!
깨어있게 하소서!
단지 잠들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임을 기다리게 하소서!
기다림이 이미 축복임을 알게 하소서.
그리워하는 임을 이미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다리기만 한 것이 아니라, 열망을 품고 그리워하게 하소서!
그리움 속, 임이 나를 이미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임이 날 그리워하는 희망 안에 깨어있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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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9.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 <행복하여라, 깨어있는 종들!>
베드로의 편지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의 적대자 악마가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누구를 삼킬까 하고 찾아 돌아다닙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굳건히 하여 악마에게 대항하십시오”(1베드5,8-9).
‘깨어있다’는 것은 하느님의 은총을 감지하는 영적감각이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잠시라도 한 눈을 팔면 안 된다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누구나 자기의 몫이 있는데 그 몫에 충실하지 않으면 생각지도 않은 어둠이 우리를 지배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이만하면 됐다’는 안일함이 허락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생이 다하여 하느님 안에 편히 쉬기까지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최선을 다한다는 것 자체가 깨어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깨어 있는 사람은 미래를 준비하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축복을 받게 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주인을 충실히 기다리는 종에게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바와는 전혀 다른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종이 주인처럼 대접 받으며 주인이 그의 종처럼 처신합니다. 결국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 축복이 주어진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영원히 살 것처럼, 그러면서도 내일 당장 떠날 것처럼’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음이 행복입니다.
본당신부를 할 때에 가끔 예고 없는 가정방문을 했습니다. “사람의 아들도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올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늘 준비하고 있어라”(마태24,44).는 예수님의 말씀을 핑계로 말입니다. 그러면 행복해 하는 분도 있지만 당황하는 분들도 많았습니다. 집안정리를 잘 해 놓으신 분은 더없이 기뻐했고 그렇지 못한 분은 신부에게 자기 속을 다 보인 것 같아서 무안해 했습니다. 그러나 소위 ‘열심 하다’는 분의 가정에서 그 모습을 보면 제가 오히려 미안하고 죄송스러웠습니다.
물론 집안 정리가 잘 되었다고 모든 것이 완벽하다고 할 수 있는 것도 마음이 맑은 것도 아닙니다만 열심한 만큼 가족 구성원 누구에게도 짐을 지워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늘 준비된 모습이 가정 안에 화목함과 평화를 이루는 원동력이 됩니다. 그리고 서로를 배려하는 모습에서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사실 집안 정리를 못해서 부끄러운 건 그래도 다행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 앞에 서있는 우리의 마음이 부끄럽지 않아야 합니다. 따라서 잠시라도 악에게 틈을 주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깨어있어 행복한 오늘입니다. 항상 깨어 안 밖으로 정리 정돈을 하며 주인을 잘 맞이해야 하겠습니다.
"종은 그 신분상 겸손할 수밖에 없고 순종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에게는 참으로 겸손하고 순종적이면서 바로 이웃에겐 그토록 교만하고 억압적인 태도를 보이는 우리는 위선자입니다." 깨어있는 종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깨어서 기다리던 주인을 반갑게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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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9.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 깨어있는 '한 사람'을 통한 은총
평온한 상황보다 엄중한 상황에서 신앙은 더 빛을 발합니다. 본능적인 반응보다 더, 이성적인 판단보다 더한, 그래서 가장 근본적인 안목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공생활 내내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면서 견지해 온 자세와 영성을 한 자락 열어서 보여주셨습니다. 마치 언제 끝날지 모르는 혼인 잔치에 참석했던 주인이 언제 도착할지 모르지만 언제라도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며 준비하고 있는 종처럼, 예수님께서는 언제 도움을 청할지 모르는 사람들의 요청에 늘 대기 상태로 살아가셨고, 더 중요하게는, 언제 회개하고 믿음을 갖출지 모르는 사람들의 마음에 늘 노심초사하며 기다리셨습니다.
사도 바오로 역시 갈수록 엄중해져만 가는 로마의 상황에 대한 소식을 들으며,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이 깨어있는 의식으로 이 엄중한 상황에 대처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아담과 예수님을 극명하게 대비시켜가며 설득하였습니다. 로마의 권세가들과 재력가들이 저지르는 죄가 많아진 것은 상황을 엄중하게 만들었지만 그만큼 믿는 이들이 한 사람 한 사람 깨어있으면서 예수님처럼 다른 이들을 깨어있게 만들고자 먼저 깨어있다면, 은총도 충만히 내릴 것이라는 논리로 설득한 것입니다.
이 은총의 가시적 효과는 짊어져야 할 십자가가 무엇인지를 알아보는 안목으로 나타날 것이고, 그 다음에는 그 십자가를 짊어질 수 있는 기운을 받기 위한 노력으로 나타날 것이며, 마지막으로는 그 십자가를 짊어짐으로써 그 엄중한 상황을 복된 상황으로 만드는, 다시 말하면 하느님 나라로 변화시키는 것이요 그 과정에서 당사자는 하느님의 사람으로 거듭 태어나는 부활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어둠을 밝히는 촛불은 그저 자기 자신을 태우는 희생의 고통이 너무도 커서 온 신경이 그 고통을 감내하는 데에로 모일 뿐, 자기 자신이 태워 비치는 빛이 과연 얼마마한 면적으로 밝게 하는지 또는 그래서 얼마마한 어둠이 사라졌는지는 알 수도 없고 계산할 수도 없는 법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지금의 우리 자신들의 믿음과 우리가 살고 있는 상황의 은총은 우리보다 먼저 살아가신 이들의 십자가 희생 덕분에 누리고 있다는 점입니다. 밀알의 비유가 말해주듯이, 우리가 썪으면 싹이 트고 꽃도 피며 열매도 맺을 것입니다. 단,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그러할 것입니다. 이것이 선교의 은총인 동시에 신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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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9.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어느 개그맨이 ‘나는 항상 구쁘다’라는 글을 자신의 SNS 계정에 적어 놓았다고 합니다. 이 글을 보고서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별히 ‘구쁘다’라는 단어가 어떤 뜻인지를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무슨 약자인지, 아니면 속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 단어가 줄임말도 속어도 아닌 순우리말이라는 것입니다. 한국말을 50년 넘게 사용해왔음에도 모르는 것이 너무 많음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이 말의 뜻은 ‘배 속이 허전하여 자꾸 먹고 싶다’, ‘먹고 싶어 입맛이 당기다’라고 합니다.
한국인이 한국말도 잘 모른다고 말씀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를 수도 있다는 것을 아마 많은 분이 인정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더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요.
주님에 대해 우리는 완벽하게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주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해도 주님에 대해 완전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아주 조금만 알고 있으면서도 전부를 알고 있는 듯 사는 우리일 뿐입니다. 그래서 주님께 대한 불평불만을 늘 안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완전히 모르기에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불평불만을 품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많이 아는 사람은 불평불만보다 감사의 마음을 갖게 됩니다. 부정적인 생각보다 긍정적인 생각으로 지금을 살게 됩니다. 미움과 판단보다는 사랑의 삶에 머물게 됩니다.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깨어 있는 종은 바로 주인의 뜻을 듣고 기억해서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주인이 도착하지 않는다고 불평불만만 하는 사람이 제대로 기다릴 수가 있을까요? 오시지 않을 것이라는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득한 사람이 과연 주인을 기다릴 수 있을까요? 오지 않는다면서 미움의 감정을 품는 사람이 제대로 판단할 수 있을까요?
주인이 어떤 분인지를 아는 사람은 결코 이런 마음을 품지 않습니다. 이 자리를 지키고 기다릴 수 있음에 감사하며, 기다리며 주인의 뜻을 실천해야 한다는 긍정적인 생각으로 지금을 사랑하며 살 것입니다.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우리도 오실 주님을 기다립니다. 이를 위해 주님을 더 알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특히 사랑으로 우리를 절대 외면하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행복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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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려면 남을 행복하게 만들라. 행복을 준 만큼 행복해진다(아브라함 링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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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의 점수
걱정의 점수를 1에서 10점까지 매길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경우 몇 점을 주시겠습니까?
‘집의 가보라 할 수 있는 도자기를 도둑맞았다.’
보물인 ‘가보’이기에 걱정의 점수가 꽤 높을 것입니다. 지금 최고의 고민거리라면 어쩌면 10점까지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을 잃게 된다면 이에 대한 걱정의 점수는 어떻게 될까요? 사랑하는 사람을 더는 볼 수 없다는 상실감에 큰 슬픔과 아픔을 경험할 수밖에 없고 당연히 걱정의 점수는 최고 점수인 10점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순간 보물을 잃어버린 일의 걱정 점수는 어떻게 될까요? 10점이 될 수 없습니다. 7점 이하, 어쩌면 별것 아닌 것으로 생각될지도 모릅니다.
누군가 지금 어렵고 힘들다면서 울고 있는 모습을 보고, 별것 아닌 것으로 힘들어하냐며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늘 가장 어려운 삶을 사는 중입니다. 이 점수를 낮추는 것은 남이 해주지 못합니다. 바로 나만이 최고의 걱정을 가져다주는 고통과 시련을 온전히 바라보면 점수를 매기게 되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 상처를 받아들인다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 힘을 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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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9.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모기 뒤에 숨은 코끼리’라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모기는 아주 작지만 매우 귀찮습니다. 소리 없이 다가와 물기 때문입니다. 밤에 잠자리에서 모기에 물리면 짜증이 나고, 결국 불을 켜고 모기를 잡기 마련입니다. 책은 사소한 일 때문에 ‘화’를 참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모기와 같은 사소한 일 뒤에 커다란 코끼리가 숨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꽉 끼는 신발을 신으면 발의 뒤꿈치가 까질 수 있습니다. 불편한 신발을 신고 지하철을 탔을 때 누군가 실수로 발을 밟으면 평소와는 달리 더 화가 나기 마련입니다. 신발 속에 감추어진 뒤꿈치의 상처가 있기 때문입니다. 몸의 감추어진 상처는 보이지만 마음의 상처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무시당한다는 생각, 간섭받는다는 생각, 나의 허물을 들추어낸다는 생각, 실패한 일들에 대한 생각들은 나의 마음속에 감추어져 있다가 작은 일을 통해서 주체하기 어려운 ‘화’가 되기도 합니다.
아버님의 기일을 지내면서 어머니, 형수, 조카들과 추모관엘 다녀올 때입니다. 연도를 하고, 기분 좋게 돌아오면서 중국집에서 늦은 점심을 먹기로 했습니다. 마침 어린이 날이라서 중국집에는 손님이 많았습니다. 음식을 주문하고 기다렸습니다. 40분 정도 기다렸는데 우리보다 더 늦게 온 손님에게 음식을 갖다 주었습니다.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곧 우리가 주문한 음식도 나왔지만 밖으로 나왔습니다. 가족들은 주문한 음식을 먹고 나왔지만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직원이 실수로 그렇게 한 것을 웃으며 넘어갈 수도 있었는데 참지 못하고 화를 낸 나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그래도 주문한 음식을 먹고 나왔으면 좋았는데 화를 참지 못하고 나왔기에 집에 오는 길에 배가 고파서 또 화가 났습니다. 군대에 있을 때는 부당한 일이 있어도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 계급이 있었고, 하급 병은 그런 것쯤은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니 제가 화를 낸 이면에는 ‘코끼리’가 있었습니다. 사제생활을 하면서 익숙해진 편리함이 있었습니다. 식사할 때면 으레 음식이 먼저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줄을 서서 기다릴지라도 먼저 앞자리로 가라는 권유를 받곤 했습니다. 순례를 가는 버스에서도 맨 앞자리에 앉곤 했습니다. 조별로 자리를 바꾸었지만 저는 자리를 바꾼 적이 없었습니다. 민박집에 가서도 독방을 마련해 주곤 했습니다. 다른 분들이 불편하게 같은 방을 사용하는 것을 알면서도 같이 자자는 이야기를 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무라시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의 모습이 제게 있었습니다. 사제복 안에 겸손, 희생, 나눔, 봉사, 인내가 있어야 했는데 권위, 자존심, 가식, 허영, 욕심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드러나는 순간 ‘화’를 낸 것 같았습니다. 생각해 보면 저의 무례함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화가 났지만 사제라는 이유 때문에 참아 주셨습니다. 화가 난다면 그 현상 뒤에 숨어있는 코끼리를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아담의 불순종과 예수님의 순종을 이야기합니다. 아담의 불순종의 결과는 죄와 죽음입니다. 예수님의 순종의 결과는 의로움과 영원한 생명입니다. 아담의 불순종 뒤에 있던 코끼리는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교만함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남에게 전가하려는 비열함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순종 뒤에 있던 코끼리는 하느님의 아들이면서도 사람이 되신 겸손함이 있었습니다. 세상을 구원하려는 십자가의 희생이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등불을 들고 깨어 있는 종에 대한 이야기를 하십니다. 그렇게 깨어서 주인을 맞이하는 종은 행복하다고 이야기하십니다. 지금 내가 들고 있는 등불은 어떤 등불인지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가식, 교만, 게으름, 허영, 분노의 등불을 들고 있으면 그 등불은 본인과 이웃에게 큰 상처를 주는 등불이 될 것입니다. 희생, 나눔, 겸손, 온유의 등불을 들고 있으면 그 등불은 희망의 등불이 될 것입니다. 사랑이 환하게 피어나는 등불이 될 것입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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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9.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깨어 있어라
- 희망의 빛, 희망의 약 -
어제 하루의 기쁨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여기엔 사연이 있습니다. 집무실에 들어온 큰 지네를 살려 보냈기 때문입니다. 잊지 못할 기억이 될 것입니다. 정확히 지난 9월27일 끝기도후 집무실에 들어 와 불은 켜는 순간 큰 지네가 발가락을 물고 쏜살같이 필사적으로 달아나 숨었고 도저히 잡을 수 없었습니다.
따끔하는 아픔과 더불어 정신이 번쩍 들었고 순간 ‘깨어 살라’는 깨우침으로 받아 들였습니다. 그러니까 20여일 만에 완전히 사라진줄 알았던 검붉은 빛을 띤 큰 지네가 엊그제 10월17일 저녁 끝기도후 집무실에 들어 왔더니 나와서 쉬고 있었습니다. 만 20일만에 나타난 것입니다. 즉시 놀라서 입은 스카풀라 수도복으로 힘껏 때렸습니다만 놓쳤습니다. 수십분 동안 수색했지만 종적이 묘연했습니다.
후에 이 이야기를 했더니 수도형제들이 웃었습니다. 책같은 것으로 두드려 잡아야지 옷으로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아마 본능적으로 살생殺生을 피하고 싶었던 탓이었던 듯 싶습니다. 그래서 사다 놓은 에프킬러를 집무실 속속들이 뿌리고 갔더니 다음 10월18일 새벽 나와 불을 켜보니 집무실 그 자리에 죽은 듯이 큰 지네가 누워 있었습니다. 건드려 보니 움직였고 종이에 담아 집무실 밖에 던진후 잠시 문열고 보니 사라진 것입니다. 살아 도망간 것이지요.
이렇게 지네를 살려 보낸 것이 정말 잘했다 싶어 온종일 마음이 편했던 것입니다. 필사적必死的으로 살려고 달아나는 불쌍한 미물微物 지네를 살려 보냈으면 그저 평범히 잊으면 될 것을 만물의 영장靈長이라는 사람인 내가 무용담武勇談을 자랑하듯 호들갑스럽게 형제들에게 이야기 했던 자신의 경박輕薄함이 내심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좌우간 새벽부터 살생하지 않고 살려 보냈다는 사실이 기뻤고 새삼 깨어 살아야 겠다는 자각도 새로이 했습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깨어 있음입니다. 오늘 말씀의 핵심도 우리 모두 ‘깨어 있어라’입니다. 과연 하루중 깨어 있는 경우는 얼마나 될까요? 깨어 있을 때 참으로 살아 있다 할 수 있습니다. 영성생활이나 끊임없는 기도의 궁극 목표 역시 깨어 있음에 있습니다. 많은 사고나 일, 유혹도 깨어 있지 않을 때 발생합니다.
수도원 성전 뒷면 양쪽에는 올빼미 눈의 사진이 있고, 제의방과 제 집무실에도 제 조카가 선물한 핀란드 영롱한 눈의 흰 올빼미 도자기가 있습니다. 바로 영롱한 눈의 흰 올빼미는 “깨어 있어라”, 무언의 가르침을 줍니다. 깨어 있음을, 살아 있음을 상징하는 영롱하게 반짝이는 깨어 있는 눈입니다.
참으로 쏜살같이, 강물같이 흐르는 세월입니다. 10월 초인가 했더니 벌써 10월 종반에 접어듭니다. 엊그제와 어제는 섭씨 2도의 추운 겨울날씨를 연상케 했습니다. 처음으로 겨울 외투를 입고 새벽 산책을 했습니다. 지금 내리는 늦가을 비가 내리면 다시 추워질듯합니다. 얼마 지나면 11월 위령성월이 될 것입니다.
이런 흐르는 세월에 대한 절실한 자각이 저절로 하루하루 깨어 오늘 지금 여기를 살게 합니다. 항상 오늘 지금 여기에 초점을 두게 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제 좌우명 자작시를 매일 읽어보며 삶을 새롭게 추스르게 됩니다. 일일일생, 일년사계로 내 삶의 여정을 압축해, 내 현 지점을 확인하다보면 저절로 깨어 살게 됩니다. 주변에서 갑작스런 사고나 뜻밖의 질병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이들 역시 깨어 살라는 가르침을 줍니다.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라’는 성 베네딕도의 말씀과 더불어 메멘토 모리, 카르페 디엠, 라틴어 격언도 우리 모두 깨어 살 것을 촉구합니다. 참으로 죽음을 눈앞에 환히 둘 때 삶의 환상이나 거품은 사라지고 오늘 지금 여기서 본질적 투명한 깨어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깨어 있을 때 참 맑은 기쁨에 행복한 삶입니다. 깨어 있을 때 저절로 내적 침묵에 텅빈 충만의 행복한 관상적 삶입니다. 끊임없이 바치는 비움기도, 명상기도, 향심기도 역시 주님 중심의 삶을 살기 위한 일종의 깨어 있음의 훈련입니다. 참으로 깨어 있을 때, 깨끗한 마음에 깨달음의 은총입니다.
“주님을 삶의 중심에 두고 주님을 열렬히 항구히 사랑하십시오. 또 궁극의 희망을, 꿈을 주님께 두십시오. 희망의 빛, 희망의 약입니다. 이런 주님 향한 사랑이, 희망이 우리를 깨어 있게 하고 인내하며 기다리게 합니다.”
어제 수도원을 방문한 병고病苦 중인 자매에게 드린 말입니다. 사실 희망보다 영혼에 더 좋은 명약名藥도 없습니다. 또 주님 주신 희망의 빛이 무지의 어둠, 허무의 어둠을 몰아 냅니다. 궁극의 희망과 꿈은 주님입니다. 이런 희망과 꿈이 없는 곳이 지옥입니다. 살아있다 하나 실상 죽은 삶입니다. 그러니 이런 주님 향한 사랑이, 희망이 우리를 깨어 아름답게 빛나는 내적평화의 삶을 살게 합니다.
오늘 제1독서 로마서는 ‘아담과 그리스도’를 주제로 한 말씀입니다. 아담과 그리스도는 바로 우리 인간 존재를 상징합니다. 빛과 어둠, 은총과 죄, 선과 악, 희망과 절망, 생명과 죽음, 영적 삶과 육적 삶이 하나로 어울러진 인간 실존實存을 상징합니다. 새삼 우리의 전관심사를 그리스도께 뒤야 함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그리스도를 선택하여 날로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그리스도와 사랑의 우정을 깊이하는 것입니다. 사랑과 죄는 양립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할수록 깨어 살게 되고, 은총의 빛에 죄의 어둠은 저절로 사라집니다. 다음 고백 그대로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님,
당신은 저희의 전부이옵니다.
저희 사랑, 저희 생명, 저희 희망, 저희 기쁨, 저희 평화, 저희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 은총의 선물이옵니다.”
바로 이런 주님과 함께 주님을 기다리며 사는 것입니다. 바로 주님께서 우리 모두 기쁨으로 인내로이 당신을 기다리며 깨어 살게 합니다. 주님의 평생 전사, 주님의 평생 학인의 빛나는 덕이 바로 깨어 있음입니다. 참으로 이런 주님께 궁극의 신뢰와 사랑과 희망을 둘 때 저절로 하루하루 주님을 기다리며 깨어 기쁘게 오늘 지금 여기를 살 수 있습니다. 복음의 주인은 주님으로 바꿔 읽어도 무방합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행복하여라, 주님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님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주님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
이런 깨어 있는 주님의 종으로 살 때 참 기쁨에, 참 행복입니다. 유비무환입니다. 하루하루 이렇게 깨어 살면 내일은 걱정안해도 됩니다. 바로 내일은 내일이 저절로 잘 해결해 줄 것입니다. 우울이나 치매도 들어 올 수 없습니다. 복된 선종의 죽음도 은총의 선물처럼 주어질 것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깨어 행복한 삶을 살게 합니다. 늘 읽어도 늘 새로운 제 좌우명 고백기도로 강론을 끝맺습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게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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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9.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깨어 있으라고 독려하십니다.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루카 12,36)
예수님께서 주인을 맞이하기 위해 깨어 있는 종이 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십니다. 주인이 기척을 하면 그때가 언제이든 용수철처럼 반응할 수 있기 위해서는 영육의 촉수가 주인을 향해 완전히 열려 있어야 합니다.
"그 주인은 띠를 메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루카 12,37)
이것이 그 결과입니다. 주인과 종의 관계가 완전히 역전되어, 주인이 종이 되어 섬기고, 종이 주인처럼 섬김을 받는,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광경이 벌어지게 되는 겁니다. 이게 과연 가능하기나 한 이야기일까요? 그 답을 제1독서에서 찾습니다.
"사실 그 한 사람의 범죄로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하느님의 은총과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은혜로운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충만히 내렸습니다."(로마 5,15)
먼저 죄가 왔고 그 다음에 구원이 왔습니다. 첫 아담의 불순종으로 죽음이 지배하게 되었지만, 새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생명을 누리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은총이 도래하였어도 알아 보지 못하였습니다. 죄의 짐을 지고 율법의 지배 아래 자신을 묶은 채 구원의 해법을 율법에서 찾으려 골몰하는 동안, 새로운 주인을 알아보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익숙하고 안전한 옛것에 취해 깨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죄가 많아진 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로마 5,20)
죄로 얼룩져 죽음을 향해 달리는 인간의 비참이 하느님의 자비를 움직였습니다. 죄와 죽음에 신음하는 인류에게 창조 때의 온전함, 첫 범죄 이전의 생명을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 하느님께서 은총을 내리셨지요. 당신 백성을 만나시기 위해 혼인 잔치에서 숨가쁘게 달려오신 주인이 바로 우리 하느님이십니다.
"주님, 보소서, 당신 뜻을 이루려 제가 왔나이다."(화답송)
새 아담이신 예수님은 당신을 알아보는 이들, 구원을 갈망하며 메시아의 도래를 열렬히 기다리던 이들과 더불어 구원의 여정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분은 보통의 주인들과 다르게, 당신을 고대하다 맞이하게 된 이들을 되려 섬기시면서 자신을 낮추셨지요. 복음 속에 언급된 '주인답지 않은 주인'의 모습으로요.
그 결정적인 때가 언제가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많은 이들이 천 년 만 년 살 것처럼 미래를 걱정하며 경쟁하고 모으고 쌓으면서 삽니다. 그런데 물질과 육체에 명민하게 깨어 있다 보면 영적 사정에는 무뎌지기 마련이니, 누구를 기다려야 하는지, 왜 기다리는지조차 잊고 영혼은 깊은 잠에 빠져들고 말지요.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을 통해 다시 한 번 우리를 각성시켜 주십니다. "늘 깨어 기도하라."(복음 환호송)라고요.
언제라도 주인이신 분을 기쁘게 맞이하려 깨어 기도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오시는 주님을 맞아 우리도 행복하고, 기다리는 우리를 보시는 주님 또한 더욱 행복하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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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9.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이병우 루카 신부님.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루카12,37)
'깨어 있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루카12,35-36)
예수님의 이 말씀을 그대로 실행하려면, 예수님 말씀처럼 깨어 있어야 합니다. 주인이 밤중에 올지, 새벽에 올지 모르기 때문에 항상 지금 깨어 있어야 하고, 그리고 바로 그런 종들은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깨어 있음이란?'
늘 자기 신분을 잘 인식하고 있는 것이고,
늘 자기 신분에 충실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믿는 이들에게 주어진 '자기 신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 아버지를 주인으로 모시는 신분이며, 주인이신 하느님 아버지의 종들이라는 신분입니다.
하느님의 종으로서 믿는 이들이 충실하게 해야 할 일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늘 잊지 않고, 그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아담의 불순종과 예수님의 순종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이가 죄인이 되었듯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이가 의로운 사람이 될 것이다."(로마5,19)
'순종'은 늘 예수님을 통해 계시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찾고, 겸손하고 기쁘게 이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주님, 보소서, 당신 뜻을 이루려 제가 왔나이다."(화답송 후렴)
하느님의 종이요, 사제의 신분으로 살아가는 나 자신은 얼마나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늘 찾고 있고, 이 뜻을 이루려고 애쓰고 있는가?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로마5,20)라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이 큰 힘으로, 큰 위안으로 다가옵니다.
어제의 부족함인 나의 불충실과 불순종의 죄를 하느님의 자비에 내맡겨드리고, 하느님의 용서인 은총을 입고, 언제나 지금 다시 태어나는 하느님의 종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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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9.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박형순 바오로 신부님.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과
그 주인을 기다리는 종들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주인이 돌아왔을 때, 종이 주인에게
문을 열어 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종이 이렇듯 당연한 일을 하였을 뿐인데,
주인이 그 당연한 일을 한 종들을 위하여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힌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듭니다.
종과 주인의 역할이 바뀐 듯합니다.
세상에 어떤 주인이 이러한 변화를 자처할까요?
어떤 주인이 자신의 종을 위하여 시중을 들까요?
예수님께서 들려주시는 이 비유는,
우리가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예수님께서 주인이시지만
기꺼이 종이 되어 주신다는 복음의 핵심을 전합니다.
다만 조건이 있습니다. 깨어서 성실히 주인을 기다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다만
잠을 자지 말라는 뜻은 아니겠지요?
그렇다면 ‘깨어 있음’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먼저, 우리는 주인이 아니라 주인을
기다리는 종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인이 자리를 비웠다고 해서 종이 주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다음으로, 주인이 돌아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인은 반드시 돌아옵니다.
주인이 오지 않으리라는 생각도, 상상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늦더라도 주인은 반드시 돌아옵니다.
주인이 돌아온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는다면, 종은 주인이 들어올
문을 바라보지 않고, 등불을 끄고 잠을 자거나 술을 마실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행복한 종이 되기를 바라지,
불행한 종이 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다만 행복한 종이 되고자 깨어 노력하는 사람과 행복한
종이 되기를 바라면서도 깊은 잠에 빠지는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돌아올 주인이신 주님을 기다리는 종입니다.
행복한 종이 되시렵니까? 아니면 불행한 종이 되시렵니까?
선택은 온전히 우리의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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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9.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깨어있다가 주인을 맞이하는 종들은 행복하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놓고 있어라.”(35절) 이 말씀은 모세와 아론이 파스카 음식을 먹을 때 하신 말씀과 비슷하다. “그것을 먹을 때는, 허리에 띠를 매고 발에는 신을 신고 손에는 지팡이를 쥐고, 서둘러 먹어야 한다.”(탈출 12,11) 이는 깨어있으라는 말씀이다. 베드로 사도도 “정신을 차리고 깨어있도록 하십시오.”(1베드 5,8)라 하였다. 주님의 뜻에 대해 깨어 있는 것이다.
절제로 허리띠를 매고 선행으로 등불을 밝히는 것이 언제 오실지 알지 못하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우리가 꼭 해야 하는 일이다. 이것은 정의와 연관된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왜 그래야 하는지 일러 주신다.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36절) 주님께서 오시면 사랑의 명령에 순종한 사람들에게 합당한 상을 주실 것이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어야 한다. 우리의 등불을 꺼뜨리지 말고 허리에 띠를 동이고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마태 24,42)이다.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우리들의 영에 좋은 것을 함께 찾아야 한다. 가야 할 길을 끝까지 다 가지 않으면 “한평생 믿음으로 산 것이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하기”(바르나바의 편지 4,9) 때문이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38절) 주님께서 어느 때 오시든지 허리를 동이고 깨어있다가 주인을 맞는 사람은 복된 사람이다. 그분께서 오셔서 그렇게 사는 우리를 보신다면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37절) 그분은 우리가 수고한 만큼 풍성하게 갚아 주실 것이다.
오늘 말씀은 죽음에 대한 대비를 잘하라는 말씀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주님을 만날 수 있으므로 주님께서 우리의 곁을 그냥 지나치시지 않도록 우리가 깨어 있어 그분을 알아보고 맞이할 수 있도록 하라는 말씀이다. 주님은 나의 이웃을 통해서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사랑받으시기를 원하신다. 이웃을 통해서 그분을 보지 못한다는 것은 하느님께 대하여 깨어있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이웃을 통해서 우리가 주님을 만나지 못하면 우리는 영원히 하느님을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리스도인의 특징은 무엇인가? 주님께서 예기하지 못할 때 오실 줄 알고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며 항상 깨어 있는 것이다. 참으로 행복하다는 것은 깨어 있는 삶을 통하여 우리에게 언제나 오시는 그분을 만나는 것이며 이를 통해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다. 언제나 주님을 만나 뵙고 사랑해드릴 수 있는 삶이 바로 종말론적 삶이며, 이 삶을 통하여 우리는 언제나 주님 앞에 올바로 서 있는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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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9.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루카 12, 37)
행복을
아는가?
깨어있음이
행복이다.
행복의
출발점은
언제나
깨어있음에
있다.
삶이란
깨어있음으로
삶을 채우는
여정이다.
깨어있음을
주님께
내어드린다.
깨어있음의 길이
즐겁고
행복한
신앙의 길이다.
몸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듯
깨어있는 몸에
깨어있는 정신이
있다.
찌그러진
마음을
펴게하는
깨어있음의
정신이다.
나를 돌보고
너를 돌보는
깨어있음의
우리 마음이다.
내려놓는
결단과
진실한 소명이
깨어있음의
길이다.
사랑은
깨어있음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복음은
깨어있음의
기쁜소식이다.
진정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진정으로
깨어있는
사람이다.
사랑을 지켜내는
깨어있음이
우리 곁에 있다.
사랑은
깨어있음으로
행복하고
행복은
깨어있음으로
기적같은
사랑이 된다.
신앙공동체를
살리는
깨어있음은
회개이며
반성이다.
하느님께로
돌아서는
깨어있는
오늘 그날이다.
첫마음을
잃지 않는
깨어있음으로
주님, 당신은
찬미받으소서!
절망을 치유하는
깨어있음
그 희망과
구원또한
깨어있음에
있음을 믿는다.
구절초를
적시는
가을비가
마음을 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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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9.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깨어 있어라.>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루카 12,35-38)”
“시중을 들 것이다.” 라는 말씀에서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누가 더 높으냐? 식탁에 앉은 이냐, 아니면 시중들며 섬기는 이냐? 식탁에 앉은
이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22,27).”
원래 이 말씀은, 당신을 본받아서 서로 섬기는 사람이 되라는 가르침인데,
“예수님은 지상에서도 사람들을 섬기시고, 하느님 나라에서도 사람들을
섬기시는 분” 이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사람들을 섬기시는 것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사람들을 섬기시는 것은,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주시는 상입니다.
(예수님의 시중을 받는 것은,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서 받게 될 최고의 상입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시중을 들어 주시는 것과 같은 모습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아침을 먹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 예수님께서는
다가가셔서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주셨다(요한 21,12ㄱ.13).”
그때 제자들은 아마도 하느님 나라의 행복과 평화를 체험했을 것입니다.
‘깨어 있는 신앙생활’은 하느님의 심판을 의식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심판 때에 받게 될 ‘벌’이 아니라,
그날 받게 될 ‘상’과 ‘복’을 더 강조하십니다.
우리는 심판 때에 벌을 안 받으려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날 하느님께서 주실 ‘상’과 ‘복’을 받으려고 신앙생활을 합니다.
(같은 것 같지만 완전히 다릅니다.)
만일에 벌을 안 받는 것만을 바라면서(지옥에 가지 않기만을 바라면서)
신앙생활을 한다면, 죄를 안 짓기만 하면 된다는 소극적인 신앙생활이 됩니다.
그런 신앙생활에는 기쁨이 없습니다.
(억지로 하는 강제노동과 다르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에서 구원과 생명과 평화와 행복을 얻어 누리는 것을
희망하는 신앙생활은 기쁨이 가득한 생활이 됩니다.
그 신앙생활은 의무감으로 계명을 지키면서 투덜거리는 생활이 아닌,
사랑으로 계명을 지키면서 기뻐하는 생활이고,
누가 시켜서 하는 생활이 아니라 자기가 원해서(좋아서) 하는 생활입니다.
사실 신앙생활은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미리 체험하는 생활입니다.
(그 행복은 지금 여기에서 시작되어서 그곳에서 완성됩니다.)
따라서 심판을 의식하면서 ‘깨어 있는 생활’을 하는 것도
두려움이 아니라 희망과 기쁨으로 하는 일이 됩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라는 말씀은,
‘나중’이 아니라 ‘지금’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허리에 띠를 맨다는 말은, 일을 할 때의 복장을 가리키는 말인데,
예수님께서는 허리에 띠를 맬 준비를 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띠를 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돌아오는 주인을 맞이하고 주인의 시중을 드는 일은,
주인이 도착한 다음이 아니라 ‘지금’부터 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등불을 켤 준비를 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라고 말씀하신 것도
‘그 때’가 이미 시작되었음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를,
“‘어둠 속에’ 있지 말고, ‘빛 속에’ 있어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즉 죄 속에서 살던 삶을 청산하고, 회개하고, 신앙인답게 사는 것은
‘그 때’가 닥친 다음에 해도 되는 일이 아니라, 지금 해야 하는 일입니다.
여기서 주인이 ‘혼인 잔치’에서 돌아온다는 말은 특별한 의미가 없고,
언제 올지 모른다는 것을 나타내는 표현일 뿐입니다.
예상했던 것보다 주인이 일찍 올 수도 있고, 늦게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늦게 올 것이라고 마음대로 예상하고서 방심하면 안 되고,
지금 곧 온다고 생각하면서 전전긍긍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 말은, 각 개인의 수명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행복하여라.” 라는 말씀은 “복을(상을) 받게 될 것이다.” 라는 뜻인데,
지금은 불행한 상태에 있지만 나중에는 행복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희망과 기쁨과 사랑으로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지금’의 상태도
복 받은 상태, 또는 행복한 상태입니다.
(만일에 벌을 주려고 오는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종이라면,
그 종은 두려움 때문에 기다림 자체를 고통스러워할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상을 주려고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생활이기 때문에
기다림 자체가 행복이 됩니다.
신앙생활은 행복하고 기쁜 생활입니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라는 말씀은, 주인과 종의 위치가 바뀐다는 뜻이 아니라,
주인이 종에게 ‘큰 행복’을 주려고 애쓴다는 뜻입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 작은아들이 회개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를 본 아버지는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고”,
가장 좋은 옷을 입혀 주었고, 손에 반지를 끼워 주었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었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서 잔치를 벌였습니다(루카 15,20-24).
아마도 아버지는 아들을 옆자리에 앉히고 이것저것 음식을 집어 주면서
마치 시중을 드는 것처럼 행동했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그렇게 대하는 것은 사랑하기 때문이고,
사랑하는 그 아들이 ‘회개’하고 집으로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낮에 속한 사람이니, 맑은 정신으로 믿음과 사랑의 갑옷을 입고
구원의 희망을 투구로 씁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진노의 심판을
받도록 정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차지하도록 정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살아 있든지 죽어 있든지
당신과 함께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1테살 5,8-10).”
(예수님은 우리가 이쪽 세상에서나 저쪽 세상에서나
행복을 누리면서 살기를 바라시는 분입니다.
여기서나 거기서나 예수님께서 우리의 시중을 들어 주시는 것은
당신이 원하셔서 하시는 일이고, 당신이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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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9.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내 영혼의 등불을 밝혀 깨어 기다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루카 12,37)
오늘 복음은 깨어 기다리는 종의 비유 이야기입니다. 팔레스티나에서 혼인잔치는 늦은 시간까지 이어져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종들은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12,38) 기다려야 했습니다. 기다릴 뿐 아니라 주인이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주어야 했지요(12,36).
이렇게 주인을 기다렸다가 시중드는 종들에게는 놀라운 반전이 일어납니다. 그토록 늦게 돌아온 주인이 오히려 ‘허리에 띠를 매고 종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어주는 것입니다(12,37). 하늘 나라는 이처럼 혼인잔치에서 늦게 돌아온 주인이 피곤함에도 기다린 종에게 시중을 들어주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처럼 세상의 질서와는 전혀 다른 ‘행복한 반전의 나라’입니다. 이것이 바로 죽기까지 낮춰 우리를 섬기러 오신 하느님의 사랑의 방법이요 구원의 길입니다. 문제는 그런 주님을 맞이하는 우리의 태도입니다. 우리네 삶은 기다림의 연속이지요.
주님을 기다리는 신앙인은 날마다 허리에 띠를 매고 곧바로 문을 열어주고 주인에게 봉사하듯이 그렇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욥과 세례자 요한처럼 마음 안에 그분을 모실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언제 어떤 모습으로 오실지 모르는 주님께 몸과 마음과 정신을 집중해야겠습니다.
우리는 종들처럼 등불을 켜고 주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등불을 켬으로써 밤과 낮의 구별을 없애고 살아가는 순간의 삶을 영원한 시간으로 바꿀 수 있을 것입니다. 곧 내 영혼에서 어둠과 죄를 몰아내고 생명과 자비를 가득 채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그렇게 내 마음의 등불을 밝혀 자신을 빛이신 분의 빛 가운데에 두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까닭은 그 빛으로 하여금 나 자신의 어둠이 밝혀지고, 그래서 그분의 자비에 힘입어 빛 가운데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빛 자체이신 분을 맞이하기에 합당한 것은 빛뿐이지요. 내 영혼의 어둠을 보지도 인정하지도 않으면서 빛이신 주님을 기다린다는 것은 무례한 일이지 않겠습니까!
우리 모두 하느님을 갈망하며 오시는 주님께 곧바로 문을 열어줄 수 있도록, 그분의 목소리 곧 말씀에 영혼의 귀를 열고 들어야겠습니다. 오시는 주님의 발자국을 알아차리려면 내 마음에 사랑을 채우는 수밖에 없겠지요. 오늘도 하느님을 그리워하며 영혼의 등불을 밝히고 말씀을 들으려 깨어있음으로써 주님의 사랑을 받는 행복한 우리였으면 합니다(12,37).
오늘 우리는 거짓, 부조리와 불평등, 차별과 소외, 돈의 우상화 속에 인간 존엄성이 상실되어 감을 보고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 자신부터 영혼의 등불을 밝히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열고,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루시는(로마 8,28) 하느님을 간절히 기다려야겠습니다.
오늘도 메시아를 맞이하는 사람답게 회개와 정의와 사랑의 등불을 밝히며 생명의 하느님, 선을 이루시고 정의를 이루시는 하느님을 나의 몸짓으로 증거하도록 힘써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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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9.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보잘것없는 종이요 죄인인 우리 각자를 위해 시중을 드시겠답니다!
피정센터에 와서 형제들과 함께 주로 하게 되는 일이 시중드는 일입니다. 픽업해 드리는 일, 잠자리를 준비하는 일, 식탁을 준비하는 일, 서빙에다 뒷정리...해도 해도 끝이 없습니다.
최고참 어르신 신부님께서도 예외 없이 바비큐 담당으로서 기쁘게 장작을 패시고, 화부 역할에 최선을 다하십니다.
오랜 세월동안 어디가나 늘 대접받고 살다가 시중드는 일을 해보니, 시중드는 일에 종사하는 분들의 고달픔이나 애환이 손에 잡힐 듯이 느껴집니다. 저야 좋아서 하는 일이지만, 그것이 가족들의 생계를 위한 일이 될 때, 견뎌내야 할 몫이 얼마나 큰 것이겠는가, 하는 생각도 자주 합니다.
그런데 시중드는 일아 만만치 않은 일이기는 하지만, 때로 이 일을 통해 느끼는 보람과 기쁨도 의외로 큽니다. 존중받고 환대받는 느낌을 받은 분들이 집으로 돌아가서, 그 감동을 주변 사람들에게 그대로 실천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이것도 작지만 사목의 한 부분이겠구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읽고 묵상하다가 개인적으로 화들짝 놀랐습니다. 언젠가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위해 시중을 드신다는 것입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루카 복음 12장 37절)
이 얼마나 놀랍고 은혜로운 일입니까? 창조주시면서 삼라만상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보잘것없는 죄인인 우리 한명 한명을 위해 식탁에서 시중을 드시겠답니다. 우리를 위해 직접 식탁보를 펼치시고, 손수 수저를 놓으시고, 서빙을 하신답니다.
우리를 위해 시중을 드시는 하느님의 모습 앞에 천부당만부당한 일이라며, 어이없어 하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이 땅에 육화하신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펴보면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성목요일 만찬석상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예수님,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지친 제자들을 위해 아침상을 차려놓고 그들을 초대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가장 구체적인 사례입니다.
이렇게 예수님 식탁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겸손한 섬김이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식탁의 특징 역시 겸손한 섬김이어야 마땅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시중을 드시겠다는데, 아무에게나 시중을 드시지는 않습니다. 시중의 대상은 오직 깨어있는 종들입니다.
언젠가 하느님께서는 평생토록 허리끈을 단단히 매고 환하게 등불을 밝히며 살아온 우리를 보시고 크게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 앞에 풍성한 선물과 영적 잔칫상을 차려주심으로써, 우리가 수고한 만큼 위로해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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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9.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행복의 길: 열정의 띠를 매고 사랑의 등불을 들어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행복’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깨어있는 종들!”
주인이 왔을 때 깨어있는 종이란 ‘언제나 주인이 원하는 일을 하는 종’을 의미합니다.
주인이 종에게 원하는 일은 이것입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주인이 ‘혼인 잔치’에 갔다가 돌아오면 허리에 ‘띠’를 매고 있어야 하고 ‘등불’을 켜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띠’가 무엇을 의미하고 ‘등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하면 ‘깨어있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알 수 없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그렇습니다. ‘띠’는 ‘봉사할 자세’를 의미합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받은 대로 해 주신다면 분명 우리가 한 대로 해 주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등불’이란 ‘사랑과 봉사’를 의미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당신이 먼저 보여주셨습니다. 그 뜻은 인간을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랑의 ‘등불’을 들고 허리에 ‘띠’, 곧 모든 것을 포기하는 십자가를 메시고 우리에게 봉사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매 순간 성령으로 사랑실천을 위해 나 자신을 포기하고 있다면 그 사람이 깨어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행복하다는 말입니다.
모든 불행에서 우리를 행복으로 이끌어줄 힘은 ‘사랑’밖에 없습니다.
그 등불을 들고 ‘실천’이라는 띠를 매고 있다면 그 사람은 행복합니다.
영화 ‘네이든’(2017)은 영국 수학 천재 소년 네이든의 유년기 실화를 담았습니다.
네이든은 자폐아입니다. 감정을 표출할 줄 모르는 아이입니다. 그래서 사회성이 뒤처집니다.
이 아이에게 아버지가 유일한 친구였습니다.
아버지는 네이든에게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말해주고 아버지는 특별히 네이든이 수학에 눈을 뜨게 해 줍니다.
그런데 불행이 닥쳤습니다.
네이든과 함께 차를 몰고 가던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사망하게 된 것입니다.
네이든의 어머니는 아이에게 최선을 다해주려 하지만 네이든은 마음의 문을 닫아갑니다.
어머니는 수학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이는 어머니에게 무엇을 사 오라고 할 때 항상 소수(1과 자신을 제외하고는 나눌 수 없는 수: 2, 3, 5, 7, 11, 13, 17, 19)로 사 오기를 원합니다.
엄마는 새우튀김을 사갈 때도 9개 준다는 것을 7개만 달라고 합니다.
그래도 항상 네이든에게 무식하단 취급을 받습니다.
어쩌면 네이든은 아버지가 죽은 원망을 어머니에게 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네이든은 수학에만 더 몰두하였습니다.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폐증 환자에게 능력까지 없다는 것은 그냥 모자란 사람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네이든은 세계 수학 올림피아드 영국 대표 16명 예비 명단에 올라갑니다.
이 중에서 6명의 최종 합격자를 선발하기 위해 대만에서 진행되는 2주간의 합숙 훈련에 참여합니다.
네이든은 처음으로 집을 떠나게 됩니다.
16명의 영국 아이들은 대만 아이들과 짝을 이루는데 네이든은 장메이라고 하는 여자애와 짝이 됩니다.
그러나 악수도 못 하고 어찌 대해야 할 줄 모릅니다. 장메이는 그냥 사랑 가득한 아이입니다.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활달하고 아무 표현도 못 하는 네이든과 잘 놀아줍니다.
새우튀김이 8개라고 주저할 때 그냥 하나를 집어먹어 7개를 만들어줍니다.
자신의 가장 어려운 고민을 간단하게 해결해주는 장메이에게 네이든은 평생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을 느낍니다.
다행히 둘은 각 나라 6등으로 나란히 올림피아드에 나갑니다.
시차 적응을 위해 하루 쉬는 날이 있었는데 장메이는 긴장을 했는지 네이든의 방에 찾아옵니다.
네이든은 좀 쉬다 가라고 합니다.
둘은 가벼운 뽀뽀를 하고 그냥 잠이 듭니다.
그러나 대만 지도자가 아침에 갑자기 들어왔고 장메이는 시험을 치르지 못하고 쫓겨나게 됩니다.
네이든은 시험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저 인터넷에서 보았던 사랑의 공식만이 떠오릅니다.
그래서 시험을 포기하고 밖으로 나갑니다.
응원하러 왔던 엄마는 깜짝 놀랍니다.
네이든은 아버지가 왜 돌아가셔야 했느냐며 웁니다.
그런 아이를 엄마는 안아줍니다.
그리고 이야기를 듣고는 장메이를 만나러 역에 가자고 데려다줍니다.
어머니는 아이가 띠를 매고 등불을 들어주기만을 기다린 예수님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먼저 띠를 매고 등불을 들고 있습니다. 네이든은 사고 이후 처음으로 앞 좌석에 탑니다.
그렇게 둘은 다시 만나게 됩니다.
실제 이름 ‘다니엘 라이트 윙’은 성공한 사업가가 되었다고 합니다.
네이든에 의해 7등으로 아쉽게 떨어진 한 아이가 화장실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너도 자폐증 진단받았지? 난 특별한 재능이 있으니까 이상해도 괜찮다고 생각했어.
근데 특별하지 않다면 그냥 이상한 거야!”
이것이 깨어있지 못함입니다.
빛이 없는 것입니다.
특별함이 사랑이 아닌 다른 무엇, 곧 수학이나 돈, 재능, 명예 등으로 생각하여 그것을 잡으려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깨어있지 못함입니다.
비록 그것을 위해 자신을 바칠 용기가 있어도 그것이 등불이 아니라면 행복할 수 없습니다.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은 종교를 통해서도 특별해지려 했습니다.
종교가 아닌 사랑으로 특별해지려 해야 합니다.
그럴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행복합니다.
네이든의 아빠처럼 자녀들에게 특별해질 수 있다는 띠를 매어주고 네이든의 엄마처럼 다른 거 다 포기해도
사랑은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등불을 들려주어야 합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용기와 그리스도처럼 사랑할 수 있는 지혜를 줍시다.
이것이 자녀를 행복하게 만드는 유일한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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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9.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이승화 시몬 신부님.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세상은 모두 등가교환입니다.
노력하는 만큼 결실을 맺게 되고
주는 만큼 대가를 받을 수 있습니다.
나의 노력이 더 큰 대가로 돌려받는다면
기꺼운 마음으로 노력하게 됩니다.
신앙생활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일상 속에서 예수님을 향해 나아가는 것은
그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기 때문입니다.
종들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으면
주인은 돌아와 종들을 칭찬하며 시중들 것입니다
곧, 주인을 기다리는다는 종의 당연한 행동에도
주인은 종들을 칭찬하며 그들을 대우해주십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친구로 부르시며
당신과 함께 식탁에서 누릴 자격을 주신 것과 같습니다.
곧 하느님의 뜻을 찾고 실천하는 이들,
지치지 않고 꾸준히 나아가는 이들,
이들은 하느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함께 누리는
그런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한 희망 때문에 우리는 오늘도 내일도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종은 혼자 기다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종들이라고 말하듯이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 함께 기다려야 합니다.
혼자서는 쉽게 지치고 유혹에 빠질 수 있지만
함께 하면 서로 도와주고 의지하며
하느님을 향한 여정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곧 신앙 공동체를 통해 우리는 끊임없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주인을 기다리는 종은 행복합니다.
함께 하는 종들은 더욱 행복합니다.
우리가 형제자매들과 함께
하느님 나라에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희망을 바라보며
오늘도 행복을 향한 발걸음을 내딛는
그런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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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9.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김 로마노 형제님.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제1독서 (로마5,12.15ㄴ.17-19. 20ㄴ-21)
"그러므로 한 사람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유죄 판결을 받았듯이,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로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되어 생명을 받습니다.(18)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이가 죄인이 되었듯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이가 의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19) 그러나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 (20)
로마서 5장 18절과 19절은 아담과 그리스도께서 각각 자기에게 속한 자들과 영적으로 일치된 영적 대표로서, 그들의 행위의 결과가 자신에게 속한 자들에게 전가됨을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구절이다.
이 전가는 신학적으로 대표와 연대에 따른 죄의 책임과 의로움의 전가라고 할 수 있다. 즉 아담의 행위는 모든 사람을 유죄 판결을 받게 한 반면, 그리스도의 행위는 많은 이를 의로움과 생명에 이르게 한 점이 결정적으로 다른 것이다.
로마서 5장 18절에서 '모든 사람'으로 두 번씩이나 사용된 '판타스 안트로푸스' (pantas anthropus)는 '모든 사람들'(all men)이란 뜻이다.
즉 '판타스'(pantas)는 '많은'(many)이 아니라 '모든'(all)이란 형용사로 사용된 것이다.
따라서 '판타스 안트로푸스'는 '아담 아래 있는 모든 사람'과 '그리스도 아래 있는 모든 사람'이며, 전자는 아담의 육적인 혈통 아래 있는 전인류를 가리키며, 후자는 그리스도의 영적인 혈통 아래에 있어서 의롭게 된 모든 사람들을 가리킨다(1코린5,22).
한편, 사도 바오로는 아담의 행위를 '범죄'로 묘사한 반면에 그리스도의 행위는 '의로운 행위'로 표현하였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의로운 행위'는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아버지 하느님께 바치신 의로운 순종 즉 십자가상 구속 사업을 가리킨다.
그분은 본래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으며,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다(필리2,6-8).
이것이 예수님께서 인류의 구속을 위해 취하신 행위의 전부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통해 의롭게 되어 생명에 이를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분이 취하신 행동은 아담의 그것과 전혀 대조적이다.
아담은 일개 피조물로서 교만과 불순종으로 창조주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고 그분과 같이 되려 하였으나(창세3,5) 그리스도께서는 태초부터 존재하신 하느님이심에도(요한1,1-3) 겸손과 순명으로 자신을 낮추시어 사람으로 오셨고(요한1,14), 자원으로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따르셨다(요한10,18; 마태26,39).
그리스도의 이와 같은 행위가 그를 믿는 모든 사람의 신분과 모든 것을 완전히 바꾸어 놓은 것이다. 그분의 '의로운 행위'(디카이오마; dikaioma)가 우리를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에서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의인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제 로마서 5장 19절은 아담의 불순종과 그리스도의 순종이 인류에게 미친 영향을 대조적으로 보여준다.
먼저 '되었듯이'로 번역된 '호스페르 ~카테스타테산'(hosper~katestathesan)에서 동사 '카테스타테산'은 '~이 되게 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카티스테미'(kathistemi)의 부정 과거 수동태 3인칭 복수형이다.
이것은 대표와 연대의 원리에 의해 아담의 불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의 범주에 들어갔고, 죄인의 신분이 되었다는 것을 확증한다.
이런 원리는 '될 것입니다'는 표현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난다. '될 것입니다'로 번역된 '카타스타테손타이'(katastathesontai)는 '카티스테미'(kathistemi)의 미래 수동태 3인칭 복수형으로서 법적인 신분으로서 뿐만 아니라 실제 상태에서도 의인이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경우에 있어서도, 대표와 연대의 원리에 의해서 많은 사람이 법적인 신분에서 의인이 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유기적 관계로 말미암아 의인의 범주 및 상태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한편, 사도 바오로는 아담의 행위와 그리스도의 행위의 결과를 모두 동사 '카티스테미'(kathistemi)로 나타내는데, 아담에 대해서는 부정 과거 수동태로서 그로 말미암아 인류가 '단번에' 그리고 '이미' 죄인의 상태에 들게 되었음을 나타내는 반면에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미래 수동태로 표현해 많은 사람이 그분을 통해 계속해서 의롭게 될 것을 시사한다.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 (20)
어두움이 깊을수록 그 가운데 비치는 빛은 더 밝아 보이듯이, 죄가 더 많아지고 많이 드러날수록 하느님의 용서의 은혜는 더욱 크게 느껴진다.
즉 하느님의 인류를 향하신 은총은 언제나 풍성하고 변함이 없지만, 인간의 죄가 더 많아지고 죄의 책임이 더 커질수록, 그 은총의 풍성함 또한 더욱더 커보인다는 말이다.
여기서 '충만히 내렸습니다'로 번역된 '휘페레페릿슈센'(hypereperisseusen)의 원형 '휘페스페릿슈오'(hyperperisseuo)는 최상급의 의미를 나타내는 단어이다.
즉 '양을 초과하다', '넘치다'라는 의미를 지닌 '페릿슈오'(perisseuo)에 '~을 초과하는'(more than; beyond; over)의 의미를 지닌 접두어 '휘페르'(hyper)가 합성되어 만들어진 이 동사는 더 이상 넘쳐흐를 수 없을 정도로 넘쳐흐른 풍성한 상태를 의미한다.
말하자면, 인간의 죄의 무게보다 하느님의 은총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크고 놀라움을 드러내는 것이다.
죄가 바닷가에 산더미처럼 쌓아올린 모랫더미에 비유된다면, 그것이 아무리 클지라도 그리스도의 은총이라는 밀물이 파도가 되어 밀려오면 순식간에 다 없어지는 것과 같다.
이 세상에는 하느님께서 용서하실 수 없을 정도로 큰 죄가 없으며, 동시에 하느님의 은총없이 하느님께 받아들여지는 의인 또한 없는 것이다.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복음(루카12,35~38)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35~36)
루카 복음 12장 35절에서부터 38절까지는 깨어 주인을 기다리는 종들의 비유인데, 12장 35절에는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자세와 관련해서 두 가지 모습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로, 허리에 띠를 매고 있는 모습이다.
'페리에조스메나이'(periezosmenai; girded about)는 '띠를 매다'는 뜻의 동사 '페리존뉘미'(perizonnymi)의 완료 수동태로서 '이미 허리에 띠가 매여져 있는 상태'를 말한다.
다시 말해서 허리띠를 지금 당장 매는 것도 아니고 앞으로 맬 것도 아니며, 이미 허리띠를 맨 상태에서 현재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 유대인들이 입었던 겉옷은 길고, 그 통이 넓은 것이었다. 따라서 일을 할 때나 여행을 하거나 전쟁을 수행할 때에는 겉옷을 허리띠로 졸라 매야만 했다.
본문에서 종들이 허리에 띠를 맨 이유는 문맥상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을 맞을 준비를 철저히 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즉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하느님의 백성들도 혹시라도 나태해져 방심하지 말고, 하느님 나라를 위해 열심히 일하며, 깨어 있는 사람이 되도록 항상 준비하라는 의미인 것이다.
둘째로,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등불을 켜 놓은 상태로 있어야 함을 보여준다.
'켜 놓고'로 번역된 '카이오메노이'(kaiomenoi; burnning)는 '불을 켜다'는 뜻의 동사 '카이오'(kaio)의 현재 분사 수동태로서 '계속적으로 불이 켜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여기서 등불을 켜 놓고 있는 목적은 어두워진 이후에도 계속 일을 하며 기다리던 주인을 맞아들이기 위한 것이다(마태25,1~13).
따라서 본문은 주님이 언제 오실지라도, 주님께서 맡기신 일을 성실히 감당하고, 항상 깨어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사람이 될 것을 교훈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있어라'에 해당하는 '에스토산'(estosan; let be)은 '에이미'(eimi; be)동사의 현재 명령형 3인칭 단수로서 '계속적으로 있어라'는 뜻이다.
여기서 '에이미'(eimi)동사는 '있다' 또는 '존재하다'는 의미로 사용되어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는 상태를 계속 유지하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이 동사가 여기서 현재형으로 사용된 것은 이러한 상태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지속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수님께서 언제 다시 오실 지는 아무도 모르므로, 하느님의 백성은 늘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혼인 잔치'로 번역된 '가몬'(gamon; wedding banquet)의 기본형 '가모스'(gamos)는 혼인 잔치 자체를 가리킨다.
당시 유대인들의 혼인 잔치는 주로 밤중에 이루어졌기에, 그 주인이 혼인 잔치로부터 돌아올 때는 모든 사람이 잠든 시간이 되므로, 그 종들은 잠들지 말고 깨어 있어라는 교훈을 주기에 적절한 배경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이러한 배경 설정의 이유만이 아니라, '혼인 잔치'는 천상에서의 기쁨과 영광의 혼인 잔치를(묵시19,9), '그 주인'은 재림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혼인 잔치의 집'은 하늘 옥좌를 암시함으로써, 종말론적인 이미지를 부각시키기 위한 목적도 있다고 본다.
그리고 '돌아오는'으로 번역된 '아날뤼세'(analyse; he will return)의 기본형 '아날뤼오'(analyo)는 '풀다'는 뜻에서 발전하여 '떠나기 위해 천막을 걷거나 배의 닻줄을 푼다'는 점에서 '떠나다','출발하다'는 뜻도 갖는다.
여기서는 혼인 잔치 집을 떠난 것을 가리키며, 이것은 앞으로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주님으로 오셔서, 온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해서 하늘 옥좌를 떠나 내려오실 것을 상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