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105. 묵상글 들 ( 연중 제31주간 금요일. - 은총 도둑질.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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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05. 연중 제31주간 금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은총 도둑질 / 2021.11.05 05:09
오늘도 계속되는 주님의 비유는 불의하지만 영리한 집사
주인의 재산을 낭비하다가 영리하게 재물을 쓰는 집사,
그래서 노여움을 사다가 칭찬을 듣는 집사의 얘기입니다.
집사란 종들 중에서 다른 종들과 재산을 관리하도록
주인에게 뽑힌 종이며 오늘 바오로 사도의 표현대로
은총을 받은 사람이지만 오늘 복음의 집사의 경우는
그 은총을 낭비하다가 정신을 차리고 회개한 집사이지요.
그러니까 이것을 요약하면
은총을 받은 집사였지만
은총을 낭비한 집사였다가
회개한 집사가 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집사는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하도록 은총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 은총은 내가 다른 민족들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님의 종이 되어,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제직을 수행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다른 민족들이 성령으로 거룩하게 되어
하느님께서 기꺼이 받으시는 제물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오로 사도는 자신을 주님의 종이라고 자처하는데
종 중에서도 주님과 다른 종 사이에 복음을 전하는 은총을 받은 종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을 받은 것도 은총이고 전하는 것도 은총이라는 얘기입니다.
옛날에 조를 나눠 '말 전하기'를 하는 시합이 있었지요.
진행자로부터 맨 앞 사람이 받은 말을 맨 뒷 사람에게 전하는 시합인데
그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고 맨 뒷 사람에게 전해야 이기는 시합이지요.
만일 중간에 한 사람이라도 잘못 듣고 잘못 전하면 맨 뒤의 사람은
당연히 엉뚱한 말을 하게 될 것이고 그러면 그 조는 지게 되고
잘못 듣고 잘못 전한 사람은 모두에게 역적이 되는 것이지요.
이처럼 내가 집사의 은총을 받고 복음을 받은 것은
나만을 위해 받은 것이 아니고 나와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도
복음을 받아들여 행복하게 하라고 받은 것인데 우리는 종종
은총을 사유화하고 받은 복음을 자기 안에 가둬두곤 합니다.
그런데 이때 하느님은 오늘 복음의 주인처럼 경고를 내리시는데
우리는 이때 오늘 복음의 집사처럼 즉시 살 궁리를 해야 합니다.
그것은 은총이란 사랑을 위해서만 주어지는 것이기에
자기 배 불리던 은총을 사랑을 위해 돌리는 것이며
우리는 이것을 일컬어 회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 사랑이니 봉사니 하지만
이웃 사랑이나 봉사가 본래 다 자기 것을 주는 것이 아니라
은총으로 주어진 것을 나누는 것이며 그것이 주인의 뜻이고,
그것이 은총을 낭비하지 않는 것입니다.
포르치운쿨라 순례를 할 때 저는 행진자들에게
먹을 것을 얻어 오라고도 하지만 서리해 오라고도 합니다.
그러면서 서리하는 것이 결코 나쁜 짓이 아니라고 합니다.
프란치스코는 형제와 함께 남의 포도 밭에 들어가 포도를 따 먹었는데
같이 가던 형제는 도망쳐 맞지 않았지만 주인에게 걸려서 흠씬 두들겨
맞았고 그리고 길 가는 내내 즐거워하며 또 농을 하며 갔다고 하지요.
'맛세오 형제는 잘 먹었네. 프란치스코 형제는 잘 맞았네.'하며 말입니다.
이때 프란치스코는 남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 것을 따 먹었다고 생각하였고,
마찬가지로 자기 것도 자기 것이 아니라 생각했기에
더 가난한 사람에게 주지 않으면 하느님 것을 도적질한 것이라고 했다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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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05. 연중 제31주간 금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현대인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를 지닌 것 중의 하나는 우선 돈이라는 재물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복권을 사들고 일확천금을 꿈꾸기도 하고, 돈을 쫓다가 살인을 하기도 합니다. 물론 돈이 주는 순 기능도 있습니다. 그러나 돈의 역기능은 사회를 병들게 하고 인간을 파괴시키기도 합니다. 사실, 재물은 우리에게 선물임과 동시에 족쇄가 되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약은 집사의 비유”는 재물과 맺는 관계가 하느님과 이웃들과의 관계 맺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말해줍니다.
사실, 주인의 재물을 맡아 관리하던 집사는 관리인으로서의 자신의 신원을 망각하고 관리를 맡긴 분의 뜻을 거역하고, 맡겨진 재물을 자신의 뜻에 따라 쓰고 낭비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주인이 그를 “집사 일을 그만두게” 하자, 그는 그때서야 비로소 자신이 ‘원래 있던 자리’와 ‘지금 있는 자리’, 그리고 ‘앞으로 가야 할 자리’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지금 ‘이 순간, 이 자리’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질문하고 답합니다.
“어떻게 하지? ~옳지, 이렇게 하자.
~사람들이 나를 저희 집으로 맞아들이게 해야지.”(루카16,3-4)
그는 비록 불의한 관리이었지만, 지혜로운 길을 택했습니다. 그는 잔머리를 굴려 마지막 한 몫을 더 챙기려하지 않고, 오히려 재물을 나누었습니다. 쌓아놓은 재물을 나누고, 움켜쥐었던 것을 내주었습니다. 횡령하고 착복했던 것을 아낌없이 퍼주었습니다. 주인처럼, 아버지처럼 아낌없이 베풀고 나누었습니다. 이 비유는 우리에게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떤 사람이겠느냐?”(루카 12,42)라는 질문을 떠올려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의 이어지는 부분에서, 이 비유를 해설하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남의 것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
누가 너희에게 너희의 몫을 내어주겠느냐?”(루카 16,12)
그러니, 이 비유는 결코 약삭빠른 청지기의 처신이나 비윤리적인 행위를 칭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의 자녀들도 닥쳐올 일에 대해 민첩하게 대처하건만, 그렇지 못하고 있는 빛의 자녀들의 삶에 대한 경고입니다.
사실, 자신에게 맡겨진 재물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고, 어떻게 관계를 맺는가는 신앙의 진실성을 드러내주는 리트머스 시험지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자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재물이 지금 우리에게 용서와 화해와 우정을 불러일으키고 있는가?
아니면, 압박과 침해와 불목을 불러일으키고 있는가?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루카 16,13).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어떻게 하지? ~옳지, 이렇게 하자.”(루카 16,3-4)
주님!
제가 당신께 죄를 지었습니다.
당신 재물과 소유를 횡령했습니다.
제 자신을 마치 저의 것인 양 횡령했습니다.
입으로는 당신을 주님이라 고백하면서도 제 자신을 주인인 양 섬겼습니다.
당신이 맡기신 이 몸 당신의 것이오니, 당신이 저의 주님입니다.
저를 자애심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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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05. 연중 제31주간 금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영리한 선택
앞날을 미리 준비한다는 것은 현명합니다. 재물에 투자하는 것보다 사람에게 배려한다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성공하려면 인재를 키워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온갖 정성을 쏟는 것보다 하늘의 영광을 헤아린다면 그것이야말로 모든 것을 얻는 것입니다. 내일을 준비하되 약속된 미래, 영생, 천상행복을 생각하면서 지혜롭게 해야 합니다.
어떤 부자가 집사를 두었는데 그가 정직하지 못해‘해고 통지’를 했습니다. 해고 통지를 받은 집사는, 고민 끝에 자신의 장래를 보장받기 위한 부정을 또 저질렀습니다. 자기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불러 빚을 탕감해 주고 훗날 그들로부터 도움을 받으리라는 생각을 하였고, 또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그것을 보고 그를 칭찬 하였습니다. 세속적인 사람이 이렇게 세상을 살아가려 애쓰는 모습은 칭찬할 만합니다. 한편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자선의 혜택이 돌아갔으니 다행스럽습니다. 그러나 방법이 잘못되었으니 결국 세속적입니다. 세상의 지도자라고 하는 사람, 그 권력에 기대어 잇속을 챙기는 사람들은 하늘 앞에 초라하기 그지없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라면 하느님께서 기뻐하는 영리함을 발휘해야 합니다.
세상의 자녀는 세상의 것에만 영리하면 됩니다. 현세적인 이득이나 높아지고자 하는 욕심, 자녀교육이나 재산의 축적과 같은 일을 위해서는 위장전입이나 탈법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을 오히려 잘나가는 사람으로 생각하니 말입니다. 아파트 청약에 몰려드는 사람들의 모습이나 소문난 좋은 유치원에 등록하기 위해 길바닥에 텐트를 치고 밤을 지새우던 부모의 모습을 보면 정말 감동적이라고 해야 하나요? 세상일에는 정말 많은 수고와 땀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고위 공직자들의 자녀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병역면제를 받는 것을 보면 참 약삭빠릅니다. 유전 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있듯이 재물은 사람을 부리고 그래서 거기에 매달립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죽는 줄 모르고 죽습니다. 하늘과는 멀어집니다.
세상일에도 이렇게 정성을 쏟거늘 하물며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노력은 얼마나 더 해야 하겠습니까? 세속의 자녀도 막다른 골목에서 돈을 팔아 사람을 사거늘 마지막 날 주님의 대전에서 서게 됨을 알고 있다면 그 준비를 미리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인이 돌아올 때 자기 책임을 다하고 있다가 주인을 맞이하는 종은 행복합니다(루카12,43). 그리고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입니다’(루카12,47).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지혜로워야 합니다. “지혜로운 덕은 사람으로 하여금 마땅히 행할 바가 무엇이며, 마땅히 피할 바가 어떤 것인지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성 아우구스띠노). 그리고 “지혜로운 사람의 눈은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고정되어 있습니다. 빛 속에 거니는 사람이 어둠을 전혀 볼 수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님께 시선을 고정한 사람은 시선을 헛된 것에다 둘 수 없습니다”(니사의 성 그레고리오). 따라서 주님께서 허락하신 시간을 잘 이용하여 주님 마음에 들게 미래를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신앙은 감나무에서 감 떨어지길 기다리는 수동적인 삶이 아니라 제 삶을 일구는 능동의 삶입니다.
사실“많은 일을 해도 해야 할 일을 안 한 사람은 적게 일한 것이고, 적게 일해도 해야 할 것을 한 사람은 많이 일한 것입니다. 그러니 말만 앞서거나 부산함만 피우지 마십시오”(성 요한보스코). 세속 일도 중요하지만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 위한 일,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는 일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신앙적 가치는 이 세상 안에서 실천해야 할 삶의 원리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갈망하는 만큼 큰 수고와 정성으로 복된 날 만드시기 바랍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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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05. 연중 제31주간 금요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 바오로의 사제직, 평신도의 사제직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불의하지만 영리한 집사의 이야기를 제자들에게 들려주셨습니다. 믿음이 없이 이익만 좇는 세상 사람들도 이익을 위해서는 얼마든지 영리하게 처신을 할 줄 아는 것처럼, 믿음으로 의롭고 거룩하게 살려는 이들도 사랑을 위해서 영리하게 처신하기를 바라셨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 이야기는 네 복음서 중에 오직 루카 복음서에만 실려 있습니다. 루카가 지녔던 선교적 지향을 감안하면, 이 영리한 집사는 선교사이기도 했던 사도 바오로가 제대로 보여 주었습니다.
바오로는 당시 유다인들 중에서 율법에 대한 열성으로나 세속적인 지식으로나 매우 뛰어났습니다. 율법의 지식에 대해서는 당대 최고의 율법 학자 중 한 사람이었던 가말리엘에게서배웠고, 세속적인 지식에 대해서는 그의 부모가 부유했으며 당시 국제 도시였던 타르수스에서 태어나 자라났으므로 로마식 국제 교육을 받아서 라틴어와 그리스어에 능통했고 말을 잘 할 수 있는 수사학, 글을 잘 쓸 수 있는 논리학, 입체적인 사고를 할 수 있게 해 주는 기하학 등을 배웠습니다. 게다가 오후에는 반드시 체육 활동을 시키는 로마식 교육방식에 따라서 군인처럼 체력도 강인했습니다.
부자의 집사 정도가 아니라 부잣집 아들이었던 그가 눈먼 열성으로 예수님을 거짓 예언자로 간주하고는 박해자의 대열에 줄을 섰었습니다. 동문수학한 스테파노가 돌에 맞아 죽을 때에도 말리지 않고 지켜보았던 그는 스테파노를 추종했던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피하여 시리아 방면으로 가서 공동체를 세우자, 그예 쫓아가서 체포하려고 설치다가 예수님께서 내려치신 벼락을 맞았고 그제서야 인생을 바꾸었습니다.
이를 두고 사도 바오로 자신은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은총을 베푸셨다고 회고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의 종이 되어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제직을 받았다는 자의식을 회심의 은총으로 받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기성 사도들이 할례 받은 유다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하자 자신은 이를 피하여 할례 받지 않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이방인 사도직을 받았다고 자부하였습니다.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사제가 되었다는 그의 이러한 자의식은 오늘날 평신도들이 부여받고 있는 보편 사제직의 원조입니다. 본당에서 배운 성사의 은총에 따라서, 세상에서 자신을 봉헌하며 신앙을 증거하는 일이 보편 사제직이기 때문입니다. 영리하게 사제직을 수행할 수 있는 평신도들을 하느님께서는 부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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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05. 연중 제31주간 금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배우 매튜 맥커너히는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2013) 영화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습니다. 이 시상식에서 그는 누가 자신의 영웅인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열다섯 살 때 제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사람이 ‘너의 영웅이 누구니?’라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10년 뒤의 나”라고 했죠. 그리고 스물다섯 살이 되었을 때 10년 전에 질문했던 그녀가 다시 물었죠. “이제 넌 네 영웅이니?” 저는 대답했죠. “아직 멀었어! 아니, 아니야!” 그녀가 왜냐고 묻더군요. 저는 “내 영웅은 서른다섯 살의 나야.”라고 말했죠. 그러니까 제 인생의 매일, 매주, 매달, 매년 저의 영웅은 항상 10년 후의 저입니다. 저는 결코 제 영웅이 되지 못할 겁니다. 그걸 알지만 그래도 괜찮습니다. 계속 10년 뒤의 저를 쫓아갈 테니까요.
현재 생각하고 있는 미래의 나를 쫓아가는 사람이야말로 점점 성장하는 사람이 아닐까요? 훌륭한 건축가는 설계를 아주 꼼꼼하게 그리고 정확하게 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영웅인 나를 만나고자 한다면, 미래의 나를 지금 잘 설계해야 할 것입니다. 과거에 연연해서는 안 되고, 지금의 어렵고 힘든 상황에 주저앉아 버리면 절대로 안 됩니다.
오늘의 비유 말씀은 많은 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조금 이상한 내용입니다.
어떤 부자가 자기 관리인의 부정을 알아챕니다. 그래서 해고를 통보하지요. 이때 집사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지 주인의 해고를 받아들이지요. 그런데 그 뒤의 일이 걱정입니다. 그가 ‘땅을 파자니 힘에 부치고 빌어먹자니 창피한 노릇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볼 때, 주인의 재산으로 사리사욕을 채운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집사가 행한 재산의 낭비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의 무능력으로 일을 잘못 처리했을 확률이 제일 높습니다. 그러면서도 앞날을 위해 잔꾀를 씁니다. 빚문서를 고칩니다.
주인으로서는 분명히 간교하고 부정한 방법입니다. 그런데도 책망하지 않고 칭찬합니다. 주님께서는 어떤 윤리적인 문제를 따지자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자기 앞날을 도모하기 위해 약삭빠른 꾀를 쓰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 앞날을 위해 빠르게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변화가 무엇을 의미할까요? 미래를 준비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지금의 힘든 상황을 포기하는 사람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새로운 삶을 사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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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 없는 기도는 활 없는 화살과 같다. 기도 없는 행동은 화살 없는 활과 같다(엘라 휠러 윌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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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의 아픔이 더 클까요?
한 어머니가 울고 있습니다. 불치의 병으로 죽어가는 딸 때문입니다. 헌신적으로 간호했지만, 가망이 없다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에 너무 슬퍼 울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자매님도 울고 있습니다. 그 이유를 물으니, 새로 구입한 차가 배달되었는데 색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왜 이렇게 운이 없냐면서 울고 있습니다.
누구의 아픔이 더 클까요? 당연히 첫 번째 경우이고, 두 번째의 경우는 별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아파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픔의 크기는 비교할 수 없다고 합니다. 두 번째 경우 역시, 차 문제만으로 슬픈 것이 아니었습니다. 며칠 사이에 계속해서 사랑하는 가족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 모든 것이 겹친 상태에서, 차까지 속 썩이니 더 아팠던 것입니다.
다른 이의 아픔과 슬픔을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가장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인정해 주어야,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진정한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늘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인정해 주고 또 우리의 모든 이야기를 들어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 안에서 힘을 얻는 것입니다.
우리도 나의 이웃에게 말하기보다 듣는 데 더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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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05. 연중 제31주간 금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수도자들은 서원을 하면서 3가지 서약을 합니다. ‘청빈, 정결, 순명’입니다. 본당에서 수도자들이 오고, 가는 것을 보면 작은 가방이 전부였습니다. 청빈은 세상의 것을 포기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는 표징입니다. 정결은 오직 하느님만을 바라보며 살겠다는 다짐입니다. 순명은 자신의 뜻이 아닌 교회의 가르침을 따르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렇게 청빈, 정결, 순명은 수도자가 이 세상에 살면서 천상의 삶을 드러내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됩니다. 성직자들도 서품을 받기 전에 3가지 서약을 합니다. ‘신앙고백, 독신, 순명’입니다. 신앙고백은 말씀을 선포할 때 교회의 가르침을 전하겠다는 약속입니다. 독신은 오직 하느님의 일만을 하겠다는 다짐입니다. 세상의 것을 추구하는 독신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순명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바치겠다는 약속입니다. 프랑스의 파리 외방 전교회 사제들은 순명으로 조선으로 왔고, 복음을 전하면서 순교하였습니다.
수도자와 성직자가 3가지 서원을 하지만 한 가지가 다릅니다. 성직자는 청빈 서약을 하지 않습니다. 세리였던 마태오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듯이, 사제는 교회의 재산과 조직을 관리하게 됩니다. 지금은 자리를 옮기면 가방 2개면 만족하지만 예전에는 자리를 옮길 때면 작은 트럭이 필요했었습니다. 필요한 물건이 많았습니다. 청빈 서약을 하지 않았지만 사제가 소유에 집착하면 복음을 전하는 일에 소홀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복음을 전하는 데는 소유보다는 비움이 더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청빈 서약을 하지 않는 것은 교회의 재산을 투명하게 보존하고, 관리하라는 의미입니다. 처음 본당신부가 되었을 때입니다. 성당의 땅에 집을 짓고 사는 분들이 10명 정도 되었습니다. 매월 임대료를 받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점유를 인정하게 되고, 나중에는 성당의 땅에 대한 권리를 행사 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임대계약서를 작성했고, 모두에게 서명을 받아 임대료를 받았습니다. 후임 신부님은 임대계약서를 토대로 사람들이 이사를 가면 땅을 정리 할 수 있었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 미주지사의 일을 하면서 3가지를 신경 쓰게 됩니다. 하나는 매주 신문을 제작하는 것입니다. 한국 본사에서 오는 기사와 미주 지역의 기사를 편집해서 신문을 제작합니다. 필진을 섭외하고, 미주 지역의 행사들을 취재합니다. 보람 있고, 즐거운 일입니다. 다른 하나는 직원들과의 관계입니다. 편집, 취재, 회계를 담당하는 직원들이 기쁘게 일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매주 월요일은 직원과 후원회원을 위한 미사를 봉헌합니다. 매주 수요일은 편집회의 합니다. 이것도 제게는 큰 어려움이 없는 일입니다. 세 번째는 신문사의 유지와 운영입니다. 지난 2년 코로나 팬데믹으로 신문홍보를 거의 갈 수 없었습니다. 신문사의 재정은 구독료와 후원금으로 이루어집니다. 홍보를 가야 독자를 늘릴 수 있고, 사람을 만나야 후원을 받을 수 있는데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교무금과 헌금으로 운영되는 본당과는 다르기 때문에 어려움이 있지만 아직까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신문사는 복음 전하려는 사명과 운영하려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사제는 본인을 위해서는 건강, 기도, 학식을 쌓아야 하지만, 재정에 대해서도 공부를 해야 합니다. 신자들이 어렵게 낸 헌금과 교무금을 잘 관리하는 것도 사제가 해야 할 직무입니다. 돈은 무조건 멀리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방향으로 쓰일 수 있도록 잘 관리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 교회의 재정은 세상의 일처럼 이윤을 창출하는 것만이 목적은 아닙니다. 교회의 재정은 공정하고, 올바르게 운영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을 돕고, 선교를 하는 곳에 쓰여야 할 것입니다. 또한 신자들의 영적인 성숙을 위한 교육과 피정에 많이 쓰이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예루살렘에서 일리리쿰까지 이르는 넓은 지역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일을 완수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나는 그리스도께서 아직 알려지지 않으신 곳에 복음을 전하는 것을 명예로 여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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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05. 연중 제31주간 금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유비무환有備無患의 삶
- 선하고 지혜롭고 유능한 삶 -
어제는 참 유쾌하고 홀가분한 하루를 지냈습니다. 11월15일 마감인 ‘수도원 계간지 <분도> 원고’ 청탁을, 거의 보름동안 묵상하다 어제 오전 4시간에 걸려 완료했기 때문입니다. 유비무환입니다. 남은 10일 정도는 게시판에 붙여놓고 틈틈이 수정 보완할 예정입니다.
겨울호 특집 주제는 ‘희망의 의미와 실천’이었고, 원고청탁서 마지막 애교스런 글귀에 -‘원고료는 죄송하지만 재능 기부로 받고 있습니다. 양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미소를 지었습니다. 참으로 생생한 희망을 지닐 때 유비무환, 희망이 동인動因이 되어 역동적 충만한 현재를 착하고 지혜롭고 유능하게 살 수 있겠습니다.
희망하면 언젠가 인용한 ‘바다’라는 옛 동요가 생각납니다. 지혜로운 하루의, 평생 삶을 요약한 듯한 희망을 북돋우며 마음 행복하게 하는 동요입니다. 요즘은 거의 한달 내내 아침 산책때 마다 부르는 가사도 곡도 흥겨운 노래입니다. 2절까지 인용합니다. 시간 나는 대로 불러 보시기 바랍니다.
“아침바다 갈매기는 금빛을 싣고, 고기잡이 배들은 노래를 싣고,
희망에 찬 아침바다 노저어 가요, 희망에 찬 아침바다 노저어 가요.
저녁바다 갈매기는 행복을 싣고, 고기잡이 배들은 고기를 싣고,
넓고넓은 바다를 노저어 와요, 넓고넓은 바다를 노저어 와요.”
‘노저어 가요’에서 ‘노저어 와요’라는 희망찬 출항出港에서 행복한 귀항歸港을 노래한 내용입니다. 성서는 ‘착하라’ 하지 않고 ‘지혜로워라’ 말합니다. 착하고 지혜롭고 유능하면 금상첨화 참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반면 심성은 착하나 어리석고 무능하여 무서워하기는커녕 무시당하고 조롱의 대상이 된다면 참 딱하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히려 착하고 무능하여 혼란을 자초하기 보다는 좀 악해도 유능하여 질서가 잡혔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약은 집사의 비유입니다. 어떤 부자의 재산에 큰 손실을 끼쳐 책임 추궁 당할 것을 예상한 약은 집사의 미래를 위한 유비무환의 대책이 참 기민하고 신속하고 지혜롭습니다. 약은 집사의 독백입니다.
“주인이 내게서 집사 자리를 빼앗으려 하니 어떻게 하지? 땅을 파자니 힘에 부치고 빌어먹자니 창피한 노릇이다. 옳지, 이렇게 하자. 내가 집사 자리에서 밀려나면 사람들이 나를 저희 집으로 맞아들이게 해야지.”
생각이 들자 즉시 결행決行하여 주인에게 빚진 자들의 빚을 과감히 탕감해 줍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주인의 반응이 뜻밖이라 놀랍습니다. 책임 추궁하여 벌을 준 것이 아니라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으니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결론같은 말씀이 의미심장합니다.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
그렇다면 빛의 자녀이자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들의 처신은 어떠해야 하겠는지요? 주인은 분명 한없이 너그럽고 자비로운 하느님을 상징합니다. 불의한 집사가 손실을 끼쳤어도 부자가 상징하는 바, 하느님께는 거의 지장이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불의하기는 해도 미래 대책을 세운 약은 집사의 처신을 이해하며 내심 묵인하는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라곤 말을 못해도 알아서 스스로 했으니 속으로는 고마운 생각도 들며 못이기는 채 했을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제 추측입니다만 주인이 상징하는 바, 하느님은 그러하고도 남으리라 봅니다.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느님의 뜻은 아닐지라도 하느님의 허락없이 일어나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할 바는 약은 집사의 부당하고 불의한 처신을 인정하거나 칭찬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빛의 자녀들이 이렇게 세상의 자녀들처럼 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주인으로 상징되는 바 주님이 칭찬하는 것은 미래를 위한 신속하고 기민한 대책입니다.
착하기만 하고 무능하여 불행한 미래라면 주인 마음 편치 못했을 것입니다만 이렇게 좀 나쁘고 부패해도 유능하고 지혜로워 미래 대책을 세웠다면 자비하신 주인도 내심 묵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어제 결혼을 앞둔 젊은이의 카톡 글귀가 생각납니다. 젊은이의 좌우명인 듯 했습니다.
“대장부는 소인배와 논하거나 싸우지 않는다.”
흡사 주인은 대장부를, 약은 집사는 소인배를 상징한다 싶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빛의 자녀들은 어떻게 처신해야 할까요? 어떻게 미래 대책을 세워야 할까요? 유비무환입니다. 영적일수록 현실적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오늘 지금 여기에서 최선을 다한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주변과 평화롭게 공존공생하면서 진리와 진실, 사랑과 연민, 공정과 정의에 바탕하여 책임을 다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오늘이 미래입니다. 착하기만 하고 책임감이 결여한 무능하고 태만한 삶이라면 일고의 가치도 없습니다. 이렇게 하루하루 유비무환의 삶을 살면 미래는 저절로 잘 될 것이니 전혀 걱정할 바 없습니다. 과거와 미래는 우리의 영역이 아닌 하느님 소관이니, 바로 오늘 지금 여기서 최선을 다해 책임을 다하는 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영역이고 지혜롭고 유능한 처신입니다.
바로 오늘이 어제의 과거를 치유하고 내일의 미래를 준비합니다. 오늘 제1독서 로마서의 주인공 바오로 사도가 그 모범입니다. 사도의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위하여 일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그 일은 말과 행동으로, 표징과 이적의 힘으로, 하느님 영의 힘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예루살렘에서 일리리쿰까지 이르는 넓은 지역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일을 완수하였습니다.”
끝까지 시종여일, 복음 선포의 책임을 완수한 선하고 유능하고 지혜로운 바오로 사도가 자랑스럽습니다. 바로 약은 집사같이 불의하게 살 것이 아니라 바오로 사도처럼 주님의 집사가 되어 정의롭고 지혜롭고 민활敏活하게 책임을 다하며 유비무환의 유능한 삶을 살자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끝으로 그 좋은 처방의 기도문을 소개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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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05. 연중 제31주간 금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 지향을 다루시는 하느님의 콜라보를 보여 주십니다.
"어떤 부자가 집사를 두었는데"(루카 16,1)
예수님께서 들려 주시는 이 비유는 사실 우리를 좀 당황스럽게 만듭니다. 올바르고 정당한 결과를 기대하는 우리에게 등장 인물인 집사의 불의하고 얄팍한 꼼수도 불편하기 짝이 없는데 결과적으로 주인에게 칭찬까지 듣기 때문이지요. 성경에 등장하는 비유 속의 아버지나 주인은 대개 하느님을 상징하기 마련인데, 그렇다면 결과만 좋으면 하느님께도 다 좋은 것인가 반문하게 됩니다.
"집사가 자기 재산을 낭비한다는 말을 듣고"(루카 16,1)
주인과 집사의 관계를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로 관상해 봅니다. 사실 피조물에 불과한 우리는 하느님께서 맡겨 주신 그분의 재산(모든 피조물과 재화, 탈렌트와 권력, 명예와 관계 등)을 관리하는 집사일 뿐이지요. 이 재산을 자기 자신만을 위해 쓰는 횡령, 남용은 주인 입장에서는 낭비이고, 주인과 주인의 뜻을 위해 쓰는 것이 선용이지요. 우리는 그 집사가 주인의 재산을 어떻게 낭비했는지 구체적으로는 모릅니다만, 주인의 태도로 보아 그분의 뜻대로 쓰지 않은 것만은 분명합니다.
"내가 집사 자리에서 밀려나면 사람들이 나를 저희 집으로 맞아들이게 해야지."(루카 16,4)
당장 일자리를 잃을 처지에 놓인 집사는 꼼수를 씁니다. 주인의 재산으로 사람들의 환심이라도 사서 앞날을 보전하려는 겁니다. 그래서 그는 주인에게 빚진 이들, 즉 가난한 이들을 불러 그들의 빚 수량을 제멋대로 줄여 줍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지향의 순수성을 보신다고 배웠습니다. 아무리 결과가 그럴듯해도 동기와 과정이 모두 선해야 진정한 선이라고요. 그러니 그릇된 동기에서 시작된 집사의 선행(처럼 보이는 행위)에 후한 점수를 주기는 어렵다고 여깁니다.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루카 16,8)
그런데 동기와 과정과 결과가 모두 선해야 한다는 논리에 붙잡혀 있다면 이 구절에서 좌절 비슷한 심정이 됩니다. 주인은 바보인가? 자기에게 손해를 입한 사람을 칭찬하다니? 게다가 오히려 그의 처신이 영리하다고?
다시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로 돌아가 봅니다. 하느님을 따르는 우리의 지향이 천사처럼 그저 마냥 순수하기만 했던가 되짚어 보면 답이 보일 겁니다. 저마다 고유한 부르심을 받아 살아가지만, 신앙의 태동, 봉사의 시작, 성소의 출발, 직분의 수락은 때때로 아주 허술하고 인간적인 지점에서 시작되기도 하니까요. 하느님은 약하고 부족한 우리를 위해 맞춤형 그물을 던지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나약하고 죄인이기까지 한 우리를 당신 사업에 합류시키시면서 지향을 따져 묻거나 내치지 않으십니다. 그릇된 지향이라도 당신의 섭리 안을 걷다 보면 정화되고 성화될 수 있고, 그렇게 이끄실 자신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집사의 꼼수를 모르지 않으면서 인내하고 견디며 기다려 주는 주인의 마음이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
비록 집사는 자기가 살려고 거짓을 꾸몄지만 결과적으로는 가난한 이들에게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가 평소 정의와 자선에 대한 지향이 있어서가 아니고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거지요. 여기서 우리는 집사와 결탁해 짐을 덜어낸 채무자들의 부정을 윤리적으로 비난하느라 주인의 큰 마음을 놓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주인이신 하느님은 누가 그릇된 지향에서 출발했더라고 그 굽은 자를 가지고 직선을 그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집사의 죄조차도 선익으로 돌려놓는 분이시지요.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루카 16,8)
맞습니다. 세상 물정에 영악한 이들은 서로 결탁해 정보를 독점하고 사회적 경제적 이권을 끼리끼리 주고받습니다. 거짓도 죄악도 불사하면서요. 하지만 길게 보면 결국 그 열매를 쓰시는 분은 세상의 주인이신 하느님이십니다. 그분은 당신이 당하시는 손해는 아랑곳하지 않으시면서 끝내 선으로 흘러가게 하십니다. 그릇된 지향조차도 언젠가 좋은 열매로 바꾸시는 분이시니까요.
다만 여기서 주의할 점은 "주인의 칭찬"은 구원의 동의어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불의한 집사처럼 살아온 이들은 자신의 악도 선으로 쓰시는 하느님께 승복해 지향과 방향을 바꾸는 과정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거기까지가 주인의 그림입니다.
제1독서는 사도 바오로가 받은 이방인 선교의 소명을 이야기합니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을 위하여 일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깁니다."(로마 15,17)
사도는 다른 제자들처럼 예수님께 뽑혀 그분과 삶을 나누지도 못했을 뿐더러 그분을 따르는 새로운 길을 박해하기까지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유다인 중 누구도, 바오로 자신조자도 자기 입에서 이런 고백이 흘러나올 줄 꿈에도 몰랐겠지요. 너무 다른 출발점이었지만, 결국 하느님은 당신의 뜻을 위해, 유다인만 아니라 이방인에게까지 복음을 전하시기 위해 바오로를 쓰십니다. 하느님은, 우리 주인이신 분은 그러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를 집사로 불러 당신의 사람과 재산과 세상을 맡기십니다. 이기심과 탐욕, 자기 영광에 한눈 팔면 주인의 재산은 쉬이 낭비되고 말지요. 부족하나마 주인의 뜻을 헤아려 허락하신 영적 물적 재산을 지혜롭고 선하게 사용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그분께서 잘 써 주시도록 스스로를 기꺼이 내어놓은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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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05. 연중 제31주간 금요일. 이병우 루카 신부님.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루카16,8)
'영리한 대처!'
오늘 복음은 '약은 집사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가 세상 일에 매우 밝은 우리에게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부잣집의 어떤 집사가 주인의 재산을 낭비하다가 주인에게 발각되어 쫓겨날 위기에 처합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이 살기 위해서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하나씩 불러다가 자기 마음대로 빚을 탕감해 줍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야단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잘했다고 칭찬합니다.
주인의 처사가 세상 가치에 눈이 밝은 우리에게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처사로 다가옵니다.
이 비유에 나오는 주인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 오늘 복음은, 자신도 살고 너도 살리는 일에 영리하게 대처한 사람을 예수님께서 칭찬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이 전하는 메시지가 이런 메시지로 다가왔습니다.
너를 바라보지 말고, 먼저 나를 바라보라는 메시지!
내가 죽지 않고 살기 위해서 얼른 영리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메시지!
그 영리한 대처가 바로 회개라는 메시지!
더 나아가 너를 살리는 일에도 영리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메시지!
오늘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다른 민족들을 위한 그리스도 예수님의 종으로서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제직을 수행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그리스도께서 아직 알려지지 않은 이방인 지역에 복음을 전하는 것을 명예로 여긴다고 말합니다.(로마15,14-21 참조)
우리도 사도 바오로처럼 '하느님을 위하여 일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명예로 여깁시다!
하느님을 위한 일은, 하느님께서 보시고 기뻐하실 일에 영리하게 대처하는 것인데, 이 영리한 대처가 바로 '나와 너의 구원인 회개'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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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05. 연중 제31주간 금요일. 최종훈 토마스 신부님.
오늘의 묵상
“무엇을 나누면서 살아가고 있는가?” 한동안 제가 가졌던 묵상거리입니다.
아주 조그마한 것이라도 나누며 하루를 살아가자고 다짐합니다.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내가 가지고 있고,
할 수 있는 것들 가운데 사소한 것 하나라도 나누고 싶었습니다.
열정, 시간, 미소, 마음, 그리고 사랑 ……
물론 제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정기적으로 후원을 하고, 주어진 일을 성실히 하며
다른 이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으려 노력하였습니다.
사람들을 만나 성경에 대한 이야기도
함께 나누고, 위로가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공감해 주며 대화도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성체 앞에 앉아 반성할 때면, 사제로서의
책임감 때문에 그들을 만났고 내 명예를 높이고자
열정을 쏟은 것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자주 듭니다.
나눔에 대한 다짐은 언제나 저의 부족함을 바라보게 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가운데 이기적인
의도와 욕심으로 하루를 살아가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을 돕는 선행이나 봉사, 나눔이라 하더라도,
좀 더 깊이 살펴보면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경우도 자주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우리의
비뚤어진 의도도 괜찮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약은 집사는 자신의 앞날에 대한 걱정 때문에,
인심을 얻고자 문서를 조작하고
주인의 재산을 마음대로 사용하는 잘못을 저지릅니다.
그런데 주인의 반응이 더욱 놀랍습니다.
주인은 어떤 생각으로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을까요?
주인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재산을 손해 보는 일입니다.
그러나 자비로운 주인에게는 자신의 손해보다는,
빚을 진 가난한 사람들이 조금은 풍족해지고,
다시 살아갈 수 있는 희망을 얻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합니다.
바로 불의한 종을 통해서 말입니다.
그가 어떤 의도로 그런 행동을 하였는지는
어쩌면 주인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의 행동이 타인에게 나눔의 행위가 되었다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자신만을 위한 이기적인 의도와 욕심은 분명 잘못이지만,
더 나쁜 것은 나눔을 실천하지 않는 일입니다.
좋은 의도와 자비의 마음으로 나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으면서 아무것도 행하지 않는 것이,
나쁜 의도를 가지고 나눔을 실천하는 삶보다
결코 바람직하지 않음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하루 무엇을 나누며 살았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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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05. 연중 제31주간 금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약은 집사
오늘 복음에 나오는 집사는 교활한 사람이었다. 노예이기는 하였지만, 주인의 큰 재산을 관리하는 책임을 맡아 일했던 사람이었다. 오늘 복음의 집사는 자기가 맡은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면서 횡령을 하고 있다. 그런데 청지기뿐 아니라 빚진 사람들 역시 교활한 모습을 보인다. 당시 지주들에게 지불되는 빚이란 흔히 임대료를 말하는데 그것은 돈으로 내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 나는 소출로 지불되었다.
이때 주인은 자기의 부정을 알아차리고 이제 자기를 해고하겠다고 통고한다. 그래서 그는 그야말로 기발한 생각을 해낸다. 그는 장부를 조작하여 빚진 자들에게 실제로 빚진 액수보다 훨씬 적은 액수로 고쳐 쓰게 했다. 그렇게 해두면 자신에게 해고라는 최악의 불운이 닥치더라도 빚진 자들에게서 자기가 또 받아낼 수 있는 좀 더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이러한 처사에 주인은 충격을 받았지만, 그 약은 집사의 교활한 처사에 감탄하며 그 집사를 칭찬하고 있다. 여기서는 그들이 세속적인 삶을 위해서 얼마나 교묘한 수단 방법을 짜내고 있다는 것이다. 약은 집사의 비유는 중요한 가르침이 있다. 즉 다가올 미래를 생각하는 이 집사와 같이 다가올 하느님의 나라를 준비하면서 오늘을 잘 살아야 한다는 종말론적 가르침이 담긴 말씀이다.
세상의 이익을 위해서 이들이 이처럼 갖은 재주, 갖은 꾀를 다 동원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우리 자신은 우리의 영적인 삶을 위해서 무엇을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즉 사람들이 현세적인 이익을 위해서 돈이나 부귀영화를 얻으려고 노력하는 것만큼 하느님과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노력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영적인 삶, 신앙생활에 얼마나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집사가 횡령하고 사기를 쳐가면서 준비한 그래서 그토록 안전을 보장받으려는 삶은 언젠가 끝나고 말 삶이다. 그러니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기 위해서는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겠는가? 우리의 육체적인 삶을 위해서 노력하는 바와 같이 우리의 영적인 생명을 위해서도 모든 노력을 다할 수 있는 삶을 노력하여야 한다.
우리도 언젠가는 하느님 앞에 우리가 책임을 갖고 관리하던 우리 자신의 집사 일에 대한 셈을 하는 날이 올 것이다. 그 셈을 바치는 날이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날에 대비하여 언제나 준비되어있는 삶을 살도록 노력하고, 항상 깨어있는 삶이 되도록 하여야 한다. 준비가 되어있지 못하다면 우리는 주님께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이 항상 지금 여기에서부터 구원을 체험하고 그 구원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할 수 있는 삶이 되도록 그래서 우리도 그만한 준비를 할 수 있도록 하여야 우리가 맡은 집사 일을 잘하는 것이다. 언제나 깨어있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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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05. 연중 제31주간 금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루카 16, 8)
모든 건 바뀌고
변화합니다.
현실을 바탕으로
하는 소통이
중요합니다.
소통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소통과
관계맺음은
참으로 어려운
숙제입니다.
생각과 마음만
바꾸면 언제나
소통의 길은 보입니다.
약은 집사는
자기자신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처한 현실을
낙담하지 않고
새로운 변화와
새로운 시도를
모색합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우리의 삶을
반성해봅니다.
모든 길은
주님께로
이어져 있습니다.
편견에 갇혀 있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십니다.
기회를 놓치지
않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언제나 기회를
주시는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은
그 어떤 처지에서도
소통하고 관계맺는
새로운 변화의 길임을
잊지마십시오.
아버지 안에
빛의 자녀도
세상의 자녀도
길을 찾으며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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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05. 연중 제31주간 금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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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05. 연중 제31주간 금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민첩하게 서둘러 회개하라 ♣>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루카 16,8)
오늘 복음은 ‘집사의 비유’ 이야기입니다. 어떤 부자가 자기집 집사가 자기 재산을 낭비한다는 것을 알고 해고를 통보합니다(16,1-2). 집사는 자리에서 쫓겨날 경우 살기 위해 땅을 파지도 빌어먹을 수도 없는 신세가 될 자신의 미래를 내다보며(16,3) 영리하게 대책을 세웁니다. 그는 주인의 권위를 이용하여 서둘러 주인의 채무자들의 빚을 탕감해줌으로써 훗날 자기를 환대해줄 친구를 만들어둡니다. 예수님께서는 집사의 부정직한 행동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고 서둘러 미래를 대비하는 예지를 칭찬하십니다(16,8).
예수님께서는 어떤 뜻으로 이 비유를 말씀하셨을까요? 전통적인 해석은 집사가 시종일관 못된 일만 했다고 봅니다. 이와 달리 데렛(Derrett)은 집사가 주인의 재산을 낭비한 것은 잘못된 행동이지만 잘못이 드러난 이후에 취한 그의 행동은 합법적이어서 칭찬을 받을만하다고 봅니다. 데렛은 집사가 원금에 이자를 포함시켜 그것을 삭감해 줌으로써 스스로 합법적으로 행동하고, 채무자들의 빚의 총액을 탕감해줌으로써 그들을 기쁘게 해줌과 동시에 주인을 아주 좋은 입장에 세워주었다고 봅니다.
전통적인 해석과 데렛의 해석 중 어느 것이 타당하냐를 판가름할 만한 충분한 증거는 없습니다(Danker). 아무튼 ‘집사의 비유’의 요지는 예수님의 제자들은 사라져 버릴 세상 것을 얻으려고 집착하지 말고 지혜롭게 최선을 다해 ‘서둘러’ 영원한 생명의 길을 추구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너무 늦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종말이 닥치기 전에 지체하지 말고 하늘나라를 위하여 빨리 결단을 내리고 준비하라는 촉구입니다.
우리는 먹고 살기 위해서나 자기가 원하는 것을 더 빨리 성취하거나 얻으려고 서두릅니다. 그런가 하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거나 다른 사람을 맞이하기 위해서 준비를 서두르기도 합니다. 그렇게 우리의 일상은 바빠지고 자신도 모르는 새에 허둥대며 늘 서둘러 무엇인가를 얻고 손에 쥐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가끔은 멈추어 정말 내가 무엇을 위해 이렇게 서두르고 바쁜지를 물어야 할 것입니다.
아무런 준비도 없는 상태에서, 진정으로 자신을 돌보지도 못하고 소중한 사람을 마음껏 사랑하지도 못하며, 정말 하고 싶은 것에는 손도 못 댄 채 뜻밖의 죽음을 맞는다면 얼마나 가슴 아프고 불행할까요? 건강하고 경제적으로 부족함이 없고 내 힘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을 때에는 내가 만들어가는 기쁨이 천년만년 이어질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은 우리가 사는 지금 이 순간은 죽음 바로 이전의 종말입니다. 죽음은 그렇게 늘 코앞에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집사들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맡겨주신 시간, 사람, 재물, 능력, 자연 이 모든 것들이 이 순간을 은총으로 바꿔주는 선물이 되도록 매 순간 충실함으로써 죽음을 잘 준비해야겠습니다. 바쁜 일상에서 잠시 멈추어 정말 나는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있는지, '있을 때 잘 하라'는 말을 새기며 사랑하기를 미루지 않고 있는지, 정말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일을 '먼저' 하고 있는지 챙겨야겠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서둘러야 할 일’은 주님께로 돌아가 그분을 바라보며 그분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바로 지금 우리 각자가 서둘러 해야 할 회개입니다. 집사가 처음에는 자기 것만 챙겼으나 부정이 발각된 이후에는 그래도 빚진 이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듯이 우리도 ‘서둘러’ 이기적인 내 삶의 중심을 주님과 이웃에게 돌려 주님과의 만남을 준비해야겠습니다. 오늘도 그분께로 눈길을 돌려 그 영을 호흡하며 서로에게 있을 때 잘 하고, 자신을 따뜻이 돌보며, 주님 보시기에 좋은 일을 하는 복된 하루가 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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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05. 연중 제31주간 금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이해할 수 없는 주인의 태도
채무 이행자들에게 주인 몰래 자기 마음대로 막대한 빚을 탕감해준 불의한 집사의 스토리는 우리가 잘 새겨들어야할 복음구절입니다.
자칫 잘못 해석하면 예수님 말씀의 진의를 엉뚱한 방향으로 오해할 가능성이 큽니다.
예수님께서 소개하시는 불의한 집사의 행동 하나 하나를 따라가 보니 참으로 몹쓸 사람이었습니다.
집사란 직책은 당시 유다 사회 안에서 꽤나 비중 있는 직책이었습니다.
아무 집이나 집사를 둘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보통 막대한 재산을 보유한 지역 유지나 명망가 집사를 고용했습니다.
그는 주인을 대신해서 재산을 관리했습니다.
주인 대신 돈을 빌려주기도 했고 거기에 따른 이자도 받아냈습니다.
그런데 이 집사가 주인의 재산을 마구 낭비한다는 소문이 주인의 귀에 들려왔습니다.
죄질이 워낙 좋지 않아 더 이상 그 자리에 둬서는 안 되겠다고 판단한 주인은 집사에게 정식으로 해고를 통고합니다.
기한을 정해주며 그때 까지 모든 것을 정리하고 새로운 집사에게 인수인계할 것을 명했습니다.
해고의 사유는 공금 유용 및 횡령죄입니다.
해고 된 후 앞날이 캄캄해질 것을 예상한 집사는 더 좋지 않은 악수(惡手)를 두게 됩니다.
자신의 잘못을 크게 뉘우치며 조용히 사라져도 부족할 판에 더 큰 비리를 저지릅니다.
주인 허락도 없이 채무자들을 한명 한 명 불러들여 그들이 지고 있는 막대한 빚을 탕감해줍니다.
탕감의 정도도 어마어마합니다.
기름 백 항아리를 오십 항아리로 고칩니다.
밀 백 섬에서 팔십 섬으로 경감시킵니다.
공문서 위조죄에 해당되겠습니다.
그런데 이 일을 알게 된 주인이 그 불의한 집사에게 큰 형벌을 내려야 마땅한데, 오히려 그를 크게 칭찬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주인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포인트가 하나 있습니다.
주인이 칭찬한 것은 불의한 집사의 비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인이 칭찬한 것은 일생일대의 큰 위기 앞에서의 불의한 집사가 취한 신속하고 영리한 대처입니다.
우리는 불의한 집사에 대한 주인의 칭찬을 교회적, 종말론적 시각으로 해석해야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강생을 통한 하느님 나라가 자신들의 목전에 도래했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는 눈먼 지도자들과 백성들을 향한 강한 경고 말씀이 불의한 집사에 대한 칭찬인 것입니다.
불의한 집사의 비리는 세속의 자녀들이 자신의 미래를 위해 죽기 살기로 머리 싸매 고민하고 할 수 있는 백방의 노력을 다하는 모습의 전형입니다.
불의한 집사의 비유가 오늘 우리 신앙인들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목전에 다가온 하느님 나라를 위해 얼마나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까?
언젠가 맞이하게 될 작은 종말인 우리 각자의 죽음을 잘 맞이하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머리를 싸매 고민하고 있습니까?
우리에게 주어진 금쪽같은 시간들, 어찌 보면 그리 많이 남지 않은 시간들을 얼마나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습니까?
우리 각자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관심사인 영원한 생명의 획득과 구원을 위해 얼마나 효과적으로 활용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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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05. 연중 제31주간 금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불의한 재물로만 친구를 사귈 수 있다
오늘 복음도 역시 ‘회개’에 관한 내용의 연속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집사가 주인의 재산을 낭비하고 있었습니다.
주인이 이것을 알고 집사를 내보내려고 합니다.
이것을 안 집사는 주인의 재산으로 자신이 쫓겨났을 때 맞아들일 친구들을 사귑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결론지어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
그래서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거처로 맞아들이게 하여라.”(루카 16,9)
집사가 친구를 사귀기 위해 사용한 재물은 의롭지 못한 재물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재물이 아니라 주인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불의한 재물로만 친구를 사귈 수 있습니다.
하와도 자신이 가진 선악과로 아담을 사귀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내어줌은 죄를 퍼뜨리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그 이유는 선악과를 ‘나의 것’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친구는 나의 것을 내어줄 때가 아니라 주님의 것을 내어줄 때 만들어집니다.
나의 것을 내어주면 언제나 그에 합당한 무언가를 요구하게 되고 그러면 친구가 아닌 거래처가 생기는 것입니다.
천국에서 나를 받아 줄 사람은 거래처 사람들이 아닌 부정한 재물로 사귄 친구들입니다.
초대 교회는 가진 재산을 공동소유하였습니다.
재물이 주님의 것임을 인정한 것입니다.
그러니 나의 것을 주장할 수 없었고 그들은 친구요 가족이었습니다.
이 공동체에 들어오면 어쩔 수 없이 의롭지 못한 재산으로 친구를 사귀게 됩니다.
이렇게 행복한 공동체가 형성된 것이고 수많은 이들이 이 공동체에 들어오려고 하여 그 수가 날로 증가하였습니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는 약삭빠른 청지기를 수없이 만들어내는 것이 교회의 역할인 것입니다.
영화 ‘테이킹 우드스탁’(2009)은 한 청년이 돈의 노예였다고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는 사람으로 각성하는 과정을 그린 실화입니다.
1969년 뉴욕주 한적한 시골 부모님이 파산 직전에 놓여 전 재산인 모텔을 넘겨야 하는 처지가 된 엘리엇은
고민에 사로잡힙니다.
누나는 돈만 밝히고 괴팍한 성격의 어머니를 떠나 독립하였고 동생에게도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며 꿈을 좇으라고 하지만 동생은 부모님의 희망이 자신뿐이라 떠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마을 상인 협회 회장을 맡아 고군분투합니다.
그러던 중 이웃 동네에서 열리기로 한 ‘록 페스티벌’이 취소됐다는 소식을 접합니다.
그것을 유치해 부모님의 힘겨운 재정난을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마을 사람들을 설득에 나선 엘리엇은 우여곡절 끝에 페스티벌을 유치하는 데 성공합니다.
수천 평의 농장을 축제 장소로 제공하고, 부모님의 낡아빠진 모텔은 페스티벌의 공식 숙소가 되며
난생처음으로 마을에는 많은 관광객으로 붐비게 됩니다.
어머니는 그 와중에 주차비까지 다 챙겨가며 돈을 긁어모읍니다.
점점 많이 몰려드는 히피족들과 친분이 생기던 차에 엘리엇은 그들이 준 대마초를 피우고 광고 방송에서 헛소리해버립니다.
페스티벌도 공짜고 음악도 공짜라고 말한 것입니다.
결국, 고요하기만 하던 마을에 무려 50만 명에 육박하는 인원이 몰리면서 아수라장이 됩니다.
히피족은 본래 베트남전 패전을 본 20 30 세대들이 기존 어른들의 경쟁과 성공 문화에 저항하며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자고 생겨난 하나의 불같은 문화였습니다.
엘리엇은 그들 공동체를 보며 무언가 각성하게 됩니다.
그는 어머니가 호텔을 넘기지도 않아도 되는 만큼의 돈이 있으면서 자신을 이용한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는 어머니와 함께 돈의 노예가 되는 길을 겪고 있었고 50만 명이나 되는 자유로운 공동체 안에 있으며 비로소 이 길이 이상한 삶이었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어머니와 돈에 얽매이는 삶이 아닌 히피들처럼 자신의 꿈을 찾고 친구를 사귀는 삶으로 나아간다는 이야기입니다.
엘리엇은 자신이 만난 친구들, 그 수많은 같은 자유를 갈망하는 자신과 같은 젊은이들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가진 것이 없어도 서로 나누고 자유롭고 행복한 모습을 보여주는 공동체였습니다.
만약 한두 명이 그러면 큰 변화를 겪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과 대조되는 50만 명의 공동체는 이제 돈이 그의 것이 아닌 친구를 사귀는 도구로 볼 수 있는 눈을 선물해 준 것입니다.
교회도 이와 같은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라헬은 아버지 라반으로부터 도망치면서 아버지의 우상을 낙타 위에서 깔고 앉았습니다.
라반은 세상을 상징합니다.
그가 섬기는 우상은 돈입니다.
야곱과 결혼한 라헬은 교회입니다.
교회가 돈을 엉덩이로 깔고 앉았을 때 교회는 세상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본래 주님 것이기에 의롭지 못하게 사용하는 것들입니다.
이것으로 친구를 사귈 수 있는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교회는 다른 이들도 자기 것을 주장하며 노예 생활하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하지만 교회가 정당하게 일하여 번 돈은 자기 것이라고 가르치면 더는 세상에서 매력을 발산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완전히 돈에 대해 자유로운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십일조를 강조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십일조는 나머지 십의 구도 주님의 것임을 깨닫게 만들어 내가 가진 모든 것은 의롭지 못한 재물임을
깨닫게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가졌다고 믿는 모든 것이 어차피 내 것도 아닌 것으로 만드는 것이 십일조입니다.
십일조 정신이 죽으면 내가 가진 것이 나의 것이라 믿게 되고 그러면 세상에 대한 영향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이 주님 것이라 믿으면 십일조를 할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바칠 수 있었을 때 그들이 나누는 재물은 진정 그들을 친구로 만들 수 있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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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05. 연중 제31주간 금요일. 이승화 시몬 신부님.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
성실한 사람은
미래에 대한 걱정이 적습니다.
자신이 걷는 길이 올바를수록
그 길에 대한 확신이 분명할수록
흔들림 없이 걸어갈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불성실한 사람은
늘 걱정이 가득합니다.
때로는 요행을 바라고 싶고
누군가가 해결해주기를 바라기도 하며
언제 어떤 일이 생길까 불안하기도 합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과연 옳은 일인지, 잘하는 일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 생활과 성사 생활에 충실할수록
우리는 흔들림 없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 여정의 끝에는 주님이 계시며
여정 중에 행복을 주심을 희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완벽하지 않기에
길을 잃기도 하고 희망을 못 찾기도 합니다.
너무 멀리 가버려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께서는
그런 우리에게도 희망을 주십니다.
불의한 집사의 이야기를 통해
마지막의 마지막이라도 하느님께 돌아선다면,
심지어 하느님의 것을 이용하여 다시 선행을 한다면
그에게도 구원과 자비가 있음을 알려주시기 때문입니다.
그의 영리함이 지금까지 자신을 위했다면
이제 하느님을 위해 영리함을 사용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함께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성실한 자세로 주님께 나아갈 수 있기를
혹시 멀어졌더라도 주님의 자비와 사랑을 기억할 수 있길 바라며
주님을 향한 희망을 키워나가는
그런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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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05. 연중 제31주간 금요일. 김 로마노 형제님.
연중 제31주간 금요일 제1독서 (로마15,14-21)
"이 은총은 내가 다른 민족들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님의 종이 되어,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제직을 수행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다른 민족들이 성령으로 거룩하게 되어 하느님께서 기꺼이 받으시는 제물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16)
사도 바오로는 로마서 15장 16절에서 21절까지 이방인의 사도로서 이방인을 위한 자신의 선교 활동을 간략하게 설명한다.
이것은 로마 교회 신도들이 자신에 대해 좀 더 앎으로써 자신이 비록 그들과 얼굴을 대하지 못했지만, 편지를 써서 권면할 자격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서 바오로는 먼저 자신이 이방인을 위한 복음의 일꾼으로서 사제직을 수행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여기서 '종'으로 번역된 '레이투르곤'(leiturgon)의 원형 '레이투르고스'(leiturgos)는 '백성'을 뜻하는 '라오스'(laos)와 '일'을 뜻하는 '에르곤'에서 유래한 단어로 기본적 의미는 '자신을 희생하여 공적인 일을 행하는 사람'이며, 정치적이고 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70인역(LXX)에서 이러한 단어들은 거의 모두가 성전에서의 사제들과 레위인들의 직무를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고, 특히 사제의 직무와 제사의식을 기술하는 단락에서 나타난다.
사도 바오로는 특히 하느님의 일을 위해 성별(聖別)된 자들에게 사용되는 이 단어를 사용하여 자신의 특별한 임무를 밝힌다.
사도 바오로는 이러한 자신의 직분을 그리스도 예수님의 종으로 인식했으며, 이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다. 희랍 사람들이 종이 된다는 것을 치욕과 불명예로 생각한 것과는 대조가 된다.
한편 사도 바오로는 자신의 종됨이 하느님의 복음의 '사제직'을 수행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사제직'에 해당하는 '히에루르군타'(hierurgunta)의 원형 '히에루르게오'(hierurgeo)는 '사제의 직무를 수행하다', 또는 '사제직 수행으로 봉사하다'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사도 바오로가 이방인의 사도로서의 복음 선교를 마치 구약 시대의 사제와 같은 직무로 인식한 것을 보여준다.
사도 바오로는 자신이 복음으로 얻은 이방인들의 열매, 즉 이방인 회심자들을 하느님께 신성히 바쳐 드리는, 즉 그들로 하여금 하느님을 향한 거룩한 산 제사의 삶을 살도록 헌신케 하는 귀한 사목을 하고 있음을 자각했던 것이다.
'다른 민족들이 성령으로 거룩하게 되어 하느님께서 기꺼이 받으시는 제물이 되게 하는 것'
복음의 사제인 사도 바오로가 하느님께 드린 제물이 바로 다른 민족들, 즉 이방인들임을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다.
이처럼 사도 바오로는 자신을 가리켜서 이방인들이라는 제물을 하느님께 바치는 사제로서 표현한 것이다.
사제가 자신의 직무를 수행할 때에는 반드시 제물을 가지고 가야 한다.
이러한 구약의 제사 제도를 잘 아는 사도 바오로가 자신과 이방인들에 대해서 이렇게 묘사한 것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하느님과 이방인들을 화해하게 하는 것이 자신의 직무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
사도 바오로가 이방인들을 제물로 하느님께 바친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첫째, 먼저 하느님 밖에 있던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들이 회심하여 하느님의 백성이 되게 하는 것이다.
둘째, 그렇게 회심한 이방인들로 하여금 거룩한 산 제사의 삶, 즉 하느님과 성령으로 통교하는 신령한 예배의 삶을 살도록 하는 것이다(로마12,1-2).
하느님께 바쳐지는 제물은 흠이 없어야 한다(레위1,3). 사도 바오로는 바로 이방인들로 하여금 이와 같은 흠없는 제물이 되게 하여 하느님께 기꺼이 받으시도록 하려는 것이다.
한편, 여기서 '거룩하게 되어'로 번역된 '헤기아스메네'(hegiasmene)는 '거룩하게 하다', '성별하여 봉헌하다'는 뜻을 가진 '하기아조'(hagiazo)의 완료 수동태 분사이다.
희랍어에서 완료형은 과거에 이미 이루어진 일이 계속 지속되어 현재까지 이르게 됨을 나타내는 시제이다.
그래서 여기서는 그리스도의 구속 성혈의 공로를 믿음으로써 이루어진 거룩함이 계속 지속되어야 한다는 의미에 강조점이 있다.
또한 수동태가 사용된 것은 이러한 거룩함이 자신의 공로가 아니라 신적인 은혜로 주어진다는 사실을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여기서는 성령과의 관련성이 암시되어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1코린6,11). 예수님을 '구세주와 주님'으로 믿는 사람들에게 성령께서 내려오시며(사도2,38), 이 사람들은 성령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게 됨'을 얻어 입음으로써, 하느님께서 기꺼이 받으시는 흠없는 합당한 제물이 되는 것이다.
연중 제31주간 금요일 복음(루카16,1-8)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 (8ㄱㄴ)
집사는 여전히 불의한 상태로 남아 있었으며, 오히려 더 큰 불의를 저질렀지만, 주인은 이 집사를 칭찬하였다.
여기서 주인이 칭찬한 것은 집사의 도덕적인 부분이 아니라, 앞날을 대비하고 지혜롭게 처신한 행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세상 사람들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는 불의한 집사가 자신의 앞날을 위해, 재물을 지혜롭게 사용하고 있는 데 비해, 오히려 하느님의 나라를 상속받은 하느님의 백성들은 영원한 거처를 준비하는 일에 인색하고 무지하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들어 간접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이 땅에서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데 외에는 관심이 없는 '세상의' 집사들도 이렇게 교활할 정도로 민첩하고 영리하게 미래의 상황을 대처하는데, 하물며 영원한 세상을 바라보며 사는 하느님의 집사들도 적어도 이 정도의 지혜는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식의 책망과 더불어 교훈이 이 구절에 담겨져 있다.
여기서 '영리하게'로 번역된 '프로니모스'(phronimos; wisely; shrewdly)는 '신중하게', '사려깊게'라는 뜻인데, 어떤 이익 등을 위해 약삭빠르고 신중하게 신경을 쓴다는 의미로 복음서에서 사용된다.
불의한 집사는 위기에 직면하여 신속하게 대처함으로써, 미래의 호구지책을 마련하는 지혜를 보였다.
어떤 학자들은 이 구절에 대해 하느님의 임박한 종말 심판을 앞둔 그리스도인들이 심판 이후에 거처하게 될 복된 처소를 확보하기 위해, 현재 주어진 시간이 지나가기 전에 반드시 신속하게 대비해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하였다.
한편, 지금까지는 집사를 수식하는 말이 언급되지 않았는데, 본절에 이르러 '불의한' 이라고 번역된 '아디키아스'(adikias; unjust; dishonest)라는 단어를 쓴 것은 오히려 집사의 지혜를 더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다.
원형인 '아디키아'(adikia)는 주로 하느님의 법에 불순종하는 것 (로마1,18)과 하느님을 거부하고 적대하는 죄(1요한1,9; 5,17)를 가리킨다.
하지만 여기서의 이 집사의 불의는 그의 직책과 관련하여 나온 것으로서, 즉 마땅히 해야 할 집사직을 소홀히 함으로써, 주인의 뜻에 불순종한 것 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사건도 빚을 탕감받는 자들의 입장에서는 기쁜 일이지만, 주인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재물이 예전처럼 낭비되고 있기에 주인에게 집사는 여전히 불의한 사람이다.
하지만 집사의 입장에서 볼 때, 자신의 앞날을 대비하여 민첩하게 처신하고 있는 그 모습만큼은 영리한 대처이기에, 칭찬받을 만한 것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