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2026. 06.15)
팔십 이쪽, 저쪽인 형제 넷이 모여 차를 마시며
구상 시인의 “임종고백”을 나누었다. 직전 옛 직장 동료 10여명이 모여
점심과 곡주를 나눈 후 이어진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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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 고백 - 구상
나는 한평생 내가 나를 속이며 살아왔다.
이는 내가 나를 마주하는 게 무엇보다도 두려워서였다.
나의 한 치 마음 안에 천 길 벼랑처럼 드리운 수렁
그 바닥에 꿈틀거리는 흉물 같은 내 마음을
나는 마치 고소공포증 폐쇄공포증 환자처럼
눈을 감거나 돌리고 살아왔다.
실상 나의 지각(知覺)만으로도 내가 외면으로 지녀 온
양심, 인정, 명분, 협동이나 보험에나 들 듯한 신앙생활도
모두가 진심과 진정이 결한 삶의 편의를 위한 겉치례로서
그 카멜레온과 같은 위장술에 스스로가 도취마저 하여 왔다.
더구나 평생 시를 쓴답시고 기어(綺語) 조작에만 몰두했으니
아주 죄를 일삼고 살아왔달까!
그러나 이제 머지않아 나는 저승의 관문, 신령한 거울 앞에서
저런 추악 망측한 나의 참 모습과 마주해야 하니 이 일을 어쩌랴!
하느님, 맙소사!
출처: https://raincat.com/poem/7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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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신자 구상시인 신앙고백
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010322/7666316/1
동아일보 업데이트 2009-09-21 01:32
◇"신을 제대로 알게 된 후부터 오히려 고민 속에 살았어요"
“기독교는 인간적인 종교입니다. 나사렛 예수는 우리에게 해탈(解脫)이나 도통(道通)을 요구하지 않았어요. 그냥 ‘너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했을 뿐이지요.”
가톨릭 신자인 구상(具常·82)시인이 사순절을 맞아 20일 서울 동숭동 크리스찬 아카데미의 ‘생명 목회 콜로키움’에서 ‘한 기독교 시인의 체험적 문제의식’이란 주제로 강연을 했다. 힘든 노구를 이끌고 나와 잔잔한 감동의 자리를 만들었던 것.
가톨릭 집안에서 모태신앙을 갖고 태어난 시인은 “… 하숙방 다다미에 누워/나는 신의 장례식을/날마다 지냈으며….”라는 자작시를 읽으면서 일본 유학시절 신에 대해 가졌던 치열한 고민의 흔적을 보여줬다.
그러던 어느날 프랑스 시인 폴 클로델의 글을 읽고 신에 대한 회의가 오히려 신앙의 한 가운데로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클로델은 18세 때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에서 ‘성서에 씌어진 것보다 더 명백히 하느님을 체험한’ 사람입니다. 이런 신비체험의 소유자가 ‘우리가 신을 참되게 알았을 때 신은 우리를 오히려 동요와 불안 속으로 밀어넣는다’고 말하다니 제게는 너무 뜻밖이었습니다.”
시인은 영국 가톨릭 시인 프랜시스 톰슨의 작품 ‘하늘의 사냥개’를 인용했다.
“나는 그로부터 도망쳤다/밤과 낮과 오랜 세월을/그로부터 도망쳤다/…서두르지 않고 흐트러짐이 없는 걸음으로/유유한 속도, 위엄있는 긴박감으로/그 발자국 소리는 울려왔다/이어 그보다도 더 절박하게 울려오는 한 목소리/나를 저버린 너는 모든 것에게 저버림을 당하리라….”
신을 하늘의 사냥개에 묘사한 것이 불경스럽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톰슨은 역설적으로 신은 그로부터 아무리 달아나고 뿌리치고 숨어도 자기를 좇아온다는 사실을 고백한 것이다.
시인은 이어 최근 작고한 시인 서정주의 ‘내가 돌이 되면’이라는 시를 읽었다.
“내가 돌이 되면/돌은 연꽃이 되고/연꽃은 호수가 되고/내가 호수가 되면/호수는 연꽃이 되고/연꽃은 돌이 되고….불교적 범신론적 세계관에서는 모든 존재의 차별이나 차등이 완전히 해소되고 맙니다. 하지만 기독교적 인식에서 하느님은 영원히 하느님이요, 사람은 영원히 사람이요, 산천초목은 영원히 산천초목인 것입니다.”
시인은 결국 소박한 고백으로 말을 맺었다.
“저는 지각이 생긴 후, 즉 크리스마스 밤에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머리맡에 선물을 놓고간다는 사실을 믿지 않게 된 때부터 여든이 넘은 지금까지 신자이기 때문에 평안을 누렸다기 보다는 오히려 고민 속에 살았다고 하는 것이 정직한 고백일 것입니다.”
생명목회 콜로키움은 크리스찬 아카데미가 목회자의 영성 심화를 목적으로 교파를 초월해 운영하는 공동 세미나프로그램으로 매월 세째주 화요일 오후 4시부터 7시까지 진행된다.
<송평인기자>pi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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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과 저승의 비밀을 엿본 사나이, 구상
https://www.catholic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243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 기자명 한상봉 기자. 입력 2013.08.08 10:34
▲ 구상 시인 (사진출처/구상문학관 홈페이지)
오늘… 영원을 찾는 수행자, 시인 구상(具常) - 마지막
일상에서 건져올린 시어
구상이 정치참여에서 본격 시인으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 박정희의 집권이다. 이어 전두환 정권의 시작은 구상 시인의 몰골마저 바꾸어놓았다. 1980년 이른 봄, 구상 시인은 고질인 천식이 도져 석달째 자리보전을 하고 누워 있었는데, 제5공화국 출범시기에 허문도 등이 시인을 찾아와서 민정당 창당 발기인이 되어 달라고 졸랐다. 완강히 거절해도 “선생님이 거절하셔도 우리는 우리의 결정을 그대로 발표한다”고 했지만, “이런 폐물을 내세운들 무슨 일을 치르겠느냐”며 턱밑 수염까지 무성하게 자란 모습을 보여주었고, 결국 “나는 시인으로서 이 땅의 세파를 또 한 고비 무사히 넘겼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구상 시인은 이후 또 다른 강요나 유혹이 있을까 싶어 이조시대 늙은이처럼 흰 수염을 그대로 기르기로 마음먹었다.
시인 구상은 일상을 사랑하고, 가족은 물론 일상에서 만난 사람들을 아끼고, 그 일상에서 오히려 깊은 하늘 뜻을 헤아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의 친구 가운데는 박정희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박정희가 최고권력자여서 관계가 부각되었을 뿐 오히려 절친은 화가 이중섭, 시인 공초 오상순, 우리나라 아동문학의 선구자이자 ‘어린이 헌장’의 기초자인 마해송, 걸레 스님 중광 등이었다. 이들은 하나같이 기인(奇人)이어서 구상은 그 시대의 아웃사이더들과 사귀는 즐거움을 알았다. “모두 규격품만 있으니까 재미가 없잖아. 비(非)규격품인 기인(奇人)들은 재미없는 사회에 재미도 주지만 거리에 청량감을 주는 살수차 역할도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중섭과의 우정은 남달랐다. 구상의 서재에 걸려 있던 그림은 이중섭이 담뱃갑의 은박지에 연필로 그린 천도복숭아 그림이다. "왜 어떤 병이든지 먹으면 낫는다는 천도복숭아 있지 않아. 그걸 먹고 우리 상(常)이 어서 나으라는 말씀이지"하며 이중섭은 구상 시인이 폐 절단 수술을 했을 때 병원에 찾아와 이 그림을 던져 주고 갔다. 구상 시인은 이후 ‘비의’(秘儀)라는 시를 통해 이렇게 전했다.
‘복숭아 천도 복숭아
님자 상이, 우리 구상이
이걸 먹고 요걸 먹고
어이 빨리 나으란 그 말씀이지’
그의 그 말씀을 가만히 되뇌이기도 하고 되씹기도 한다.
그런데 차차 그 가락은 무슨 영절스러운 축문으로 변해가더니
어느덧 나에겐 어떤 경건과 그 기쁨마저 주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또한, 내가 태중에서부터 숙친한 또 다른 한 분의 음성과 한데 어울려 오는 것이다.
‘이것은 내 몸이니 받아 먹으라.
이것은 내 피니 받아 마시라.
나를 기억하기 위해
이 예를 행하라‘
구상에겐 ‘입버릇’에 대한 재미난 글도 있다. 한국전쟁 때 일인데, 이계환 공군대령이 “세상 못마땅한 일을 보거나 들으면 언성을 높여 ‘저런 죽일 놈’하고는, 깜짝 놀라는 상대에게 이번엔 아주 상냥한 음성으로 ‘노래 한마디 부르겠습니다’라고 하여서 크게 웃겨 고약한 우리 심정을 달래곤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구상 시인 역시 그분의 입버릇이 부지중(不知中) 옮아서,
행길에서도 “저런 죽일 놈”
버스에서도 “저런 죽일 놈”
모임에서도 “저런 죽일 놈”
심지어는 성당에서도 “저런 죽일 놈”
매일 저녁의 신문을 읽다가는
“저런 죽일 놈” “저런 죽일 놈들”
남의 귀에 들릴 정도는 아니지만 때도 곳도 가리지 않고 연발한다.
하였단다. 구상 시인은 “이 말이 씨가 된달까, 저런 증세가 날로 심해지면서 이번엔 내 마음속에 소리 안 나는 총이 있으면 정말 없애고 싶은 사람이 하나 둘 불어나고 그 욕망이 구체화 되어서 집단살인도 자행(恣行)할 기세라 이 밑도 끝도 없는 살의에 스스로가 놀라게끔 되었다”고 하는데, 그러다가 머리에 떠올린 것이 “저런 죽일 놈”하고선 “노래 한 마디 부르겠습니다”라고 엉뚱한 후렴(後斂)을 되풀이하는 그분의 말이 해독제(解毒劑)였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이제부터 나도 ‘저런 죽일 놈’ 소리가 나오면 애송시 한 편이라도 읊어서 비록 마음속에서일망정 살인은 안 해야겠다”고 말한다.
구상 시인의 시 중에서 산문시가 오히려 더 와서 닿는다. 관상적인 시어보다는 구체적 일상을 탐색하고 있는 까닭일 것이다. 거기서 시인의 다른 시선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다듬이’라는 시를 읽어보자.
역시 대여섯 살 때의 추억이다.
이웃집 사랑채에서 서른이 됐을까말까 한 청상과부가 혼자 세 들어 있었는데 그녀는 가톨릭의 독신녀로서 수도원 세탁부 노릇을 하며 살고 있었다.
늦둥이로 노부모 슬하에 홀로 자라고 있던 나는 그녀를 몹시 따랐고 그녀도 나를 몹시 귀여워해서 그 집에는 무상출입이었을 뿐 아니라 가끔은 밤에도 그녀와 함께 지냈는데 집에서도 이를 책잡지 않았다.
그런 어느 가을, 오늘 저녁 같은 휘영청 달밤, 나는 다듬이질하는 그녀 곁에서 놀다가 잠이 들었었는데 한밤중 눈을 뜨니 그녀는 아직도 똑딱, 똑딱이라 잠에 취한 내가 반 응석으로
--아줌마 안 자?
하고 돌아누웠더니 등 뒤에서
--응, 가슴의 불을 끄고서!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물론 그때 그녀 가슴 속의 불이 무엇인지, 그것을 어찌 끈다는 것인지 그 뜻을 알 바 없었으나 그 말만은 내 머리 한 구석에 박혀 있다가 이렇듯 잠 안 오는 달밤이면 또렷이 떠오른다.
이승, ‘영원’을 향해 걸어가는 길목
구상 시인에게 이승에서 지낸 한 생애는 천국도 지옥도 아니었다. 영 기분 좋은 곳도 영 기분 나쁜 곳도 아니었다. 그저 “일상은 계속 된다”는 것이고, 여기서 만난 이들과 이런저런 인연을 엮고 자잘한 기쁨과 후회 속에서 ‘영원’을 향해 걸어가는 길목일 따름이다. ‘도형수(徒型囚) 짱의 독백’이라는 부제가 달린 ‘드레퓌스의 벤취에서’라는 시에서는, 상식이 전하는 자유와 속박의 경계를 넘어선 삶에 대해 관조한다.
빠삐용! 이제 밤바다는 설레는 어둠뿐이지만 코코야자 자루에 실려 멀어져간 자네 모습이야 내가 죽어 저승에 간들 어찌 잊혀질 건가!
빠삐용! 내가 자네와 함께 떠나지 않은 것은 그까짓 간수들에게 발각되어 치도곤이를 당한다거나, 상어나 돌고래들에게 먹혀 바다귀신이 된다거나, 아니면 아홉 번째인 자네의 탈주가 또 실패하여 함께 되얽혀 올 것을 겁내 무서워해서가 결코 아닐세.
빠삐용! 내가 자네를 떠나보내기 전에 이 말만은 차마 못했네만 가령 우리가 함께 무사히 대륙에 닿아 자네가 그리 그리던 자유를 주고, 반가이 맞아주는 복지(福地)가 있다손, 나는 우리에게 새 삶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단 말일세. 이 세상은 어디를 가나 감옥이고 모든 인간은 너나없이 도형수(徒刑囚)임을 나는 깨달았단 말일세.
이 죽음의 섬을 지키는 간수의 사나운 눈초리를 받으며 우리 큰 감방의 형편없이 위험한 건달패들과 어울리면서 나의 소임인 200마리의 돼지를 기르고 사는 것이 딴 세상 생활보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는 것을 터득했단 말일세.
빠삐용! 그래서 자네가 찾아서 떠나는 자유도 나에게는 속박으로 보이는 걸세. 이 세상에는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 창살과 쇠사슬이 없는 땅은 없고, 오직 좁으나 넓으나 그 우리 속을 자신의 삶의 영토(領土)로 삼고 어려 모양의 밧줄을 자신의 연모로 변질(變質)시킬 자유만이 있단 말일세.
빠삐용! 그것을 알고 난 나는 자네마저 홀로 보내고 이렇듯 외로운 걸세.
2004년 5월 11일 84세로 이승을 하직한 시인 구상은 이렇게 자신의 임종을 고백했다. 여전히 남은 것은 회한뿐이다.
나는 한평생 내가 나를 속이며 살아왔다 .
이는 내가 나를 마주하는 게 무엇보다도 두려워서였다.
나의 한 치 마음 안에 천 길 벼랑처럼 드리운 수렁
그 바닥에 꿈틀거리는 흉물 같은 내 마음을
나는 마치 고소 공포증 폐쇄 공포증 환자처럼 눈을 감거나 돌리고 살아왔다.
실상 나의 지각만으로도 내가 외면으로 지녀 온
양심, 인정, 명분, 협동이나 보험에나 들 듯한 신앙생활도
모두가 진심과 진정이 결한 삶의 편의를 위한 겉치레로서
그 카멜레온과 같은 위장술에 스스로가 도취마저 하여 왔다.
더구나 평생 시 쓴답시고 시어 조작에만 몰두했으니
아주 죄를 일삼고 살아왔달까!
그러나 이제 머지않아 나는 저승의 관문, 신령한 거울 앞에서
저런 추악 망측한 나의 참모습과 마주해야 하니 이 일을 어쩌랴!
하느님, 맙소사!
(구상, 임종고백)
마지막으로 2001년 <문학사상>에 실렸던 구상 시인의 대표작 하나를 통해 죽음을 넘어서는 시인의 혜안을 되새겨 봄직하다.
오늘도 신비의 샘인 하루를 맞는다
이 하루는 저 강물의 한 방울이
어느 산골짝 옹달샘에 이어져 있고
아득한 푸른 바다에 이어져 있듯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하나다
이렇듯 나의 오늘은 영원 속에 이어져
바로 시방 나는 그 영원을 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죽고 나서부터가 아니라
오늘부터 영원을 살아야 하고
영원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이 가난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을 비운 삶을 살아야 한다.
(구상, 오늘)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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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구상시인의 인적사항 등
가-1.
namu.wiki
구상(시인) - 나무위키
대한민국의 시인, 기자이다. 본명은 구상준(具常浚)이며 본관은 능성 구씨다. 종교는 가톨릭이며, 세례명은 세례자 요한이다.
본명: 구상준
출생: 1919년 9월 16일, 경기도 경성부 이화동 642번지
사망: 2004년 5월 11일(향년 84세)
위키 백과
본명 구상준 具常浚
출생 1919년 9월 16일 일제강점기 경성부
사망 2004년 5월 11일(84세)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국적 대한민국
직업 시인, 언론인, 문학평론가, 사회평론가, 수필가, 극작가
학력 일본 니혼 대학교 종교학과 학사
종교 천주교 (세례명: 세례자 요한)
필명 호(號)는 운성(暈城)
활동기간 1946년 ~ 2004년
배우자 서영옥
자녀 구홍(장남) 구성(차남) 구자명(딸)
친지 김의규(사위)
주요 경력
前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객원교수
생애
1919년 서울에서 출생하였지만 일가족과 함께 서울을 떠나 지난날 한때 함경남도 함흥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으며 그 후 그 이외에는 대부분 함경남도 원산부에서 성장하였다. 독실한 로마 가톨릭교회 신자로서 1938년 원산 덕원 성 베네딕도회 수도원 부설 신학교 중등과를 수료하고 1941년 니혼 대학교 전문부 종교과에서 학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이후 귀국하여 여러 직업을 전전하면서 문학활동을 시작하였다. 해방후 원산의 작가동맹에서 펴낸 시집 《응향》에 자신의 시를 실었으나, 1946년 응향 사건이 발생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당국으로부터 반동적이라는 비판을 받고 월남하였다. 이후 언론계에 투신하였고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종군기자단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제자들에게 아무리 사회에 올바름이 없더라도, 기독교인은 차라리 바르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칠만큼 올바름에 대한 올곧은 추구를 중요하게 생각한 구상 시인은 이승만 정권에 반대하는 민주언론 운동을 하다가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기도 했지만 곧 무죄로 석방되었다.[1]
그 뒤로는 현실 정치와는 거리를 두고 언론과 문학활동에만 몰두하였다. 1960년 4·19 혁명 이후 그의 반독재 경력을 높이 산 민주당 정권과, 1949년 육군정보국에서 일하던 시절부터 친분을 쌓은 박정희가 정계입문을 권하기도 하였으나 모두 거절하였다. 미국 하와이 대학교에서 한국문학을 강의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화가 이중섭, 승려 중광, 장애인 화가 김기창, 시인 고은 등 다양한 방면의 예술가와 교류하였다. 2004년 5월 11일에 지병인 폐질환과 교통사고 후유증이 악화되어 향년 8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며, 경기도 안성시 천주교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2]
그의 작품은 주로 가톨릭 신앙에 바탕한 것으로 세계 각국의 언어로 번역되었고 프랑스 문부성에서 선정한 세계 200대 시인에 들기도 하였다.
가-2.
https://www.aladin.co.kr/author/wauthor_overview.aspx?AuthorSearch=@64296
구상
1919년 서울 이화동에서 출생했으며, 본명은 구상준(具常浚)이다. 1938년 원산 근교 덕원의 성 베네딕도 수도원 부설 신학교 중등과 수료 후 일본으로 밀항했으며, 1941년 일본 니혼대학(日本大學) 전문부 종교과를 졸업한다. 1942∼1945년 ≪북선매일신문≫ 기자 생활을 했으며, 1946년 북한 원산에서 시집 ≪응향≫ 필화 사건을 겪은 뒤 월남한다. 월남 이후 1948∼1950년 ≪연합신문≫ 문화부장, 한국전쟁 기간인 1950∼1953년 국방부 기관지 ≪승리일보≫ 주간, 1953∼1957년 ≪영남일보≫ 주필 겸 편집국장, 1961∼1965년 ≪경향신문≫ 논설위원 겸 도쿄지국장을 역임하는 등 20여 년 넘게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교육인으로서는 1952∼1956년 효성여대 부교수, 1956∼1958년 서울대 강사, 1960∼1961년 서강대 강사, 1970∼1986년 하와이대학교 극동어문학과 교수, 1973∼1975년 가톨릭대 신학부 대학원 강사, 1976∼1998년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대우교수 등으로 대학에서 교육을 담당했다.
1951년 첫 시집 ≪구상≫을 펴낸 뒤, 1953년 사회평론집 ≪민주고발≫, 1956년 시집 ≪초토의 시≫, 1960년 수상집 ≪침언부어(沈言浮語)≫, 1975년 ≪구상 문학선≫, 1976년 수상집 ≪영원 속의 오늘≫, 1977년 수필집 ≪우주인과 하모니카≫, 1978년 신앙 에세이 ≪그리스도 폴의 강(江)≫, 1979년 묵상집 ≪나자렛 예수≫, 1980년 시집 ≪말씀의 실상≫, 1981년 시집 ≪까마귀≫, 시문집 ≪그분이 홀로서 가듯≫, 1982년 수상집 ≪실존적 확신을 위하여≫, 1984년 자전 시집 ≪모과 옹두리에도 사연이≫, 1985년 수상집 ≪한 촛불이라도 켜는 것이≫, 1986년 ≪구상 시전집≫, 수상집 ≪삶의 보람과 기쁨≫, 1987년 시집 ≪개똥밭≫, 1988년 수상집 ≪시와 삶의 노트≫, 시집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신다면≫, 시론집 ≪현대시창작 입문≫, 이야기 시집 ≪저런 죽일 놈≫, 1993년 자전 시문집 ≪예술가의 삶≫, 1994년 희곡 시나리오집 ≪황진이≫, 1995년 수필집 ≪우리 삶, 마음의 눈이 떠야≫, 1996년 연작 시선집 ≪오늘 속의 영원, 영원 속의 오늘≫, 1998년 시집 ≪인류의 맹점에서≫, 2001년 신앙 시집 ≪두 이레 강아지만큼이라도 마음의 눈을 뜨게 하소서≫, 2002년 시집 ≪홀로와 더불어≫ 등에 이르기까지 많은 시집과 산문집을 펴낸다.
영국, 프랑스, 스웨덴, 독일, 일본, 이탈리아 등에서 시집이 번역 출간되었으며, 1955년 금성화랑무공훈장, 1957년 서울시 문화상, 1970년 국민훈장 동백장, 1980년 대학민국 문학상 본상, 1993년 대학민국 예술원상 등을 수상했으며 2004년 5월 11일 작고했고, 금관 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시인 구상은 서울에서 출생해 북의 원산, 일본의 도쿄, 미국 하와이 등을 거치면서, 동서양의 철학이나 종교에 조예가 깊은 명상가였다. 초기의 낭만주의적 지향은 해방 공간 좌우익의 대립과 북한 문단 재편기에 ≪응향≫ 필화 사건을 입으며 상처를 입게 되고, 기자로서의 직분과 신앙적 고민을 아우르면서 이후 형이상학적 인식에 기반한 시 세계를 구축하게 된다. 폐허적 분단 현실의 참담함을 노래한 <초토의 시> 연작에서 시작된 그의 시적 여정은 ‘영원한 오늘’을 노래한 구도자적 인식으로 마무리된다. 그리하여 그는 ‘영원한 오늘’을 사는 낭만적 구도자의 표정으로 우리 앞에 살아 있다.
나. 구상 시인의 종교는? *
구상 시인의 종교는 가톨릭(천주교)입니다. 그의 세례명은 세례자 요한이며, 평생 독실한 가톨릭 신앙을 바탕으로 구도자적인 시 세계를 펼쳤습니다.
구상 시인의 신앙 배경과 특징을 정리해 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집안 대대로 이어진 독실한 신앙
구상 시인의 집안(특히 외가)은 전통적인 가톨릭 집안이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매우 종교적인 분위기 속에서 자랐으며, 그의 친형인 구대준 신부 역시 가톨릭 사제였습니다. (구대준 신부는 광복 후 북한에서 전교 활동을 하다가 순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2. 신학교 입학과 방황
구상 시인 본인도 15세 때 사제가 되기 위해 소신학교(신학생을 기르는 학교)에 입학해 3년간 수학했습니다. 하지만 엄격한 규율과 종교적 회의감 등으로 인해 신학교를 자퇴하게 됩니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대학교 종교학과에 입학하여 종교의 철학적 근거를 학문적으로 탐구했습니다.
3. 불교 등 타 종교에 대한 열린 태도
가톨릭 신자였음에도 대학 시절 학점을 이수하며 깊이 접한 불교 사상은 그의 정신세계에 큰 자양분이 되었습니다. 이 덕분에 구상 시인은 종교적 도그마(교리)에 갇히지 않고, 동양적 사유와 무상(無常)의 세계를 가톨릭적 신앙과 융합하는 독창적인 시 세계를 구축했습니다. 실제로 불교계 인사들과도 두터운 친분을 유지했습니다.
4. 문학과 삶에 투영된 신앙
그의 대표작인 《초토의 시》, 《그리스도 폴의 강》 등에는 인간의 죄와 구원, 전쟁의 비극을 초월하는 하느님의 자비가 깊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말년에는 사형수들의 영적 아버지가 되어 교화 운동에 앞장서는 등, 신앙을 삶 속에서 실천하는 성자(聖者) 같은 면모를 보여주었습니다.
구상 시인은 종교적 고뇌를 문학으로 승화시켜 프랑스 문인협회 선정 '세계 200대 시인'에 이름을 올리기도 한, 한국 현대문학사와 종교문학의 거목입니다.
다. 재속프란치스코회 회원이라는 소리를 들었는데 사실인가요 *
네,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구상 시인은 가톨릭 평신도이자, 성 프란치스코의 정신을 삶 속에서 실천하는 재속프란치스코회(과거 명칭: 프란치스코 제3회)의 종신서약 회원이었습니다.
그의 삶과 문학에서 나타나는 재속프란치스칸으로서의 면모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재속(在俗) 수행’으로서의 삶
구상 시인은 일상적인 삶의 공간을 곧 하느님을 만나는 영성 수련의 장으로 삼았습니다. 그는 말년에 턱수염을 길게 기르고 소박한 한복이나 일상복을 입은 채 구도자적인 삶을 살았는데, 이는 세속에 살면서도 복음적 완덕을 추구하는 재속프란치스칸의 전형적인 '재속 수행'의 모습이었습니다.
2. 가난과 안심(安心)의 영성
그의 문학과 신앙의 핵심은 프란치스코 성인의 핵심 영성인 '철저한 가난(청빈)'과 '겸손'에 맞닿아 있습니다. 그는 세상의 권력이나 물질적 풍요에 초연했으며, 자연과 이웃 안에서 하느님의 신비를 발견하고자 했습니다. 그의 유명한 연작시 《강(江)》이나 《오늘》 같은 작품들을 보면, 만물 안에서 하느님의 섭리를 찬미했던 프란치스코 성인의 《태양의 노래》와 매우 닮아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3. 소외된 이들을 향한 자비 실천
말년에 구상 시인은 사형수들의 영적 아버지가 되어 그들을 돌보고, 장애인 시인들을 후원하는 등 사회의 가장 낮고 소외된 이들을 향해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이는 이웃의 고통을 내 몸처럼 여기고 발아래서 섬기고자 했던 프란치스칸 영성의 구체적인 실천이었습니다.
보여주신 교재 자료("참된 작은 형제의 모습") 역시 프란치스코회의 영성을 공부하는 구역 모임 자료인데, 구상 시인이 평생 추구하고 살아냈던 내적 가난과 겸손의 삶이 바로 이 책자에 담긴 가르침들과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 나. 다. 는 ‘제미나이’에 질문하여 얻은 대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