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플러스방에 글을 올릴수가 없어서....이곳에 올립니다 나중에 글 이동시켜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루이 자크 망데 다게르 (Louis Jacques Mande Daguerre 1787~1851)
만약 1839년 8월 19일에 물리학자이자 천문학자인 프랑수아 도미니크 아라고가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에 등장하지 않았다면, 그보다 몇 년 전에 생긴 작은 비밀 하나는 결코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1825년에서 1826년으로 해가 바뀔 무렵, 실험정신이 강한 지방귀족인 조제프 니세포르 니에프스는 친척인 로랑 니에프스에게 샤를 슈발리에와 뱅상 슈발리에가 운영하는 파리의 유명한 안경점을 잠깐 방문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자신의 사진실험을 위해 좀 더 괜찮은 렌즈를 얻고 싶어 했다. 로랑은 안경사들에게 자신이 왜 그런 렌즈를 찾는지 설명했고, 안경사들은 그의 말을 경청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의 단골고객인 다게르도 온갖 노력을 했지만 바로 이와 유사한 문제 때문에 실패했던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다게르에게 저 멀리 부르고뉴 지방의 한 소도시에 발명에 재간이 있는 재야학자 한 명이 살고 있으며, 그 사람의 목표도 다게르처럼 카메라 옵스큐라에 맺힌 잠상을 기술적 방법으로 영구히 고정시키는 것이라고 슬쩍 털어놓았다.
이날부터 오랫동안 사진술의 창시자가 되고자 했던 다게르의 성공 스토리가 시작된다. 사실 이 다게레오 타입이라는 사진기술의 기원은 그의 이름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이 두 실험자가 처음으로 만난 것은 1827년이었다. 마침 니에프스는 자신이 만들어 자칭 “빛으로 그린 그림”이라고 부르던 헬리오그래피 선전차 영국으로 가던 길이었고, 파리의 유명한 디오라마 극장 경영자를 만나기 위해 잠시 파리에 들렀다. 두 사람은 그때까지 편지 왕래만 하고 있었다.
이 성공한 파리인은 그의 도움으로 부족한 자신의 광학지식을 개선하려 했던 니에프스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다. 다게르는 의심이 많은 성격의 니에프스를 동업자로 만드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게르 경은 니에프스 경이 발견한, 화가의 도움 없이 복제한 자연모사품의 고정방법을 개선하기 위하여 니에프스 경에게 공동출자자의 신분을 제공한다”라고 명시한 유효기간 10년의 계약을 1829년 12월 14일 성사시킨다.
4년 뒤 니에프스는 갑작스러운 뇌졸중으로 사망하고, 그때부터 다게르는 홀로 “시행착오”의 원칙에 따라 잠상고정에 적당한 방법을 계속 찾아나간다. 니에프스의 생존 당시 다게르는 우연히 요오드화은의 감광성을 접했고, 약 3분간의 노출로 “정반대의 사진”(네거티브) 형태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지속적으로 고정시킬 수는 없었다. 그는 자신이 촬영한 주형석고상으로 만든 정물, 바구니에 들어 있는 병, 액자틀 속의 그림과 천의 주름장식들을 요오드화은 판 위에 잡아내어 수은증기 속에서 현상한 다음 따뜻한 소금물에서 상을 정착시키는 데 성공한 1837년에야 잠상을 고정시킬 수 있었다.
다게르가 마침내 이 방법을 발견하기는 했지만 니에프스의 아들이자 유산상속자인 이지도르가 넘겨받은 니에프스와의 계약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수완 좋은 상인이었던 다게르는 1835년에 이지도르를 종용하여 자신이 이 방식을 발견한 최초의 인물임을 인정하는 동업계약 수정안에 동의하게 한다. 그러나 니에프스의 유산은 계속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1837년에 다게르는 마침내 이지도르를 파리로 불러 “다게르 경은....... 나에게 그가 발명한 새로운 방식을 보여 주었습니다”라는 내용이 들어 있는 ‘최종계약’에 서명케 한다. 이로써 다게르는 다게레오 타입이라고 칭해진 방식에 대한 단독권리를 지킬 수 있었다.
다게르는 1838년부터 여론의 관심을 끌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비록 자신이 처음으로 시도한 주문예약은 별 관심을 끌지 못했지만, 루이 필립 궁정과의 긴밀한 관계로 유명한 물리학자 아라고로 하여금 구체적 사항은 공개하지 않은 채 이것을 과학 아카데미에 제출하도록 하는 데 성공한다. 어쨌든 간교한 상인이었던 다게르는 사전에 자신의 사진처리방식에 대한 정보를 여러 차례 조금씩 대중매체에 흘렸고, 그렇게 해서 온갖 소문을 만들었다. 사람들은 1839년 1월 6일에 파리에서 출간되는 <<가제트 드 프랑스>>에서 “그의 발견은 실로 믿기 어려운 기적 같아 보인다. 그것은 빛과 광학에 관한 모든 학술이론을 조소하고 있는데, 만약 그것이 사실로 입증된다면 예술에는 엄청난 혁명이 야기될 것이다”라는 글을 읽을 수 있었다. 동시대인들 중에서 최초의 다게레오 타입 사진인 <파리의 템플 큰 길> 두 장을 다게르로부터 친히 선물 받을 정도로 특권을 누렸던 알렉산더 폰 훔볼트와 사무엘 F. B. 모르스도 이와 비슷한 낙관적인 반응을 보였다. 다게레오 타입을 처음으로 본 프랑스의 역사화가 폴 들라로슈의 “오늘부터 회화는 죽었다”라는 외침은 거듭 역사적으로 중요해졌다. 그만큼 국가 전체가 열광했던 것이다. 다게르는 아라고의 적극적인 후원에 힘입어 프랑스에 자신의 특허를 매각하려는 목적에 점점 접근해 갔다. 그는 1839년에 자신이 운영하던 디오라마 극장이 방화로 전소되어 파산직전이었기 때문에 특허를 꼭 팔아야만 했다.
아라고는 이미 1839년 1월에 하원을 설득하여 프랑스 정부가 특허매입에 동의하도록 하였다. 디오라마 극장의 전소 후에는 니에프스의 아들뿐만 아니라 다게르에게도 4천 프랑의 종신연금 지급이 결정되었다. 다게르는 이밖에도 ‘디오라마의 비밀들’이라 불리는 사용설명서를 프랑스 국가에게 양도하는 대가로 2천 프랑을 더 얻었다.
아라고가 8월 19일에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와 미술 아카데미에서 세부사항을 공개하고 이 사진처리방식을 누구나 사용할 수 있도록 대중에게 양도하자 갑자기 일대 소동이 일어났다.
몇 달 되지 않아 97장이나 되는 특허명세서가 8개국 언어로 번역되었고, 결과적으로 전 유럽과 미국에서 30부가 넘게 발행되었다. 이미 1839년 10월에는 다게르가 바이에른의 왕 루드비히 1세에게 보냈던 다게레오 타입 사진 몇 장을 뮌헨 예술협회에서 볼 수 있었다.
다게르는 처남인 알퐁스 지로와 카메라 축조와 장비에 관한 약정을 맺었고, 그들은 공동으로 ‘다게레오 타입’이라고 불리는 장치에 대한 독점권을 공고히 했다. 카메라 매각대금과 영국에서 들어오는 특허수입, 그리고 연금으로 수입이 많아지자, 다게르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개별적인 다게레오 타입을 완성했고, 교회 한 채를 유명한 자신의 눈속임 그림들로 장식했다. 그리고 1851년 프랑스의 귀족처럼 많은 훈장을 가슴에 단 채 숨을 거두었다.
오리지날에 가까운 프랑스 초기의 다게레오타입 카메라, 1845년경
다게르: <정물>, 1837 다게레오타입
배비트: <나이아가라 폭포>, 1853 다게레오타입
(칼로타입은 폭스 탈보트글 중 <열린문> 참조)
#1.
다게레오 타입 사진제판술 = 잘 닦고 광택을 낸 은도금 동판 한 장을 상자 속에 넣고 5분에서 30분간 동판의 색이 감광단계의 마지막을 알리는 황금빛 노란색을 띨 때까지 요오드 증기를 쏘인다. 그러면 아주 얇고 빛에 민감한 요오드화은 층이 생겨난다. 카메라 속에 부착된 이 판을 렌즈를 열어 몇 분간 빛에 노출시킨다. 아직 볼 수 없는 상(잠상)을 열고 닫을 수 있는 다른 상자에 넣어서, 가열되어 김이 오르는 수은으로 현상한다. 마지막으로 미지근한 소금물이나 티오황산나트륨으로 고정시킨다. 그 후 판은 세척 후 물에 담갔다가 건조한다. 마지막 고정 작업은 염화금으로도 할 수 있다.
#2.
조제프 니세포르 니에프스 = 프랑스의 아마추어 연구자 니에프스(1765~1833)는 다게르, 톨벗, 베야르와 함께 위대한 사진 개척자 네 명 중 한 사람으로 간주된다. 그는 1816년부터 카메라 옵스큐라의 상을 영구 고정시켜 인화지에 옮길 수 있는 방법을 찾는 데 전념했다. 석판인쇄용 돌이 부적당하다는 것이 입증되자 그는 감광성질이 있는 아스팔트 층을 덮어씌운 금속판이나 유리판과 같은 다른 전달물질로 실험했다. 그는 1822년에 아스팔트 층을 입힌 유리판 위에서 동판화를 사진으로 모방해 내는 데 성공했으나 그 상을 고정할 수는 없었다. 1826년경에야 마침내 아스팔트 층을 입힌 주석 판을 사용해 상을 고정하는 것에 성공했다. 노출시간이 8시간 이상이나 소요되었다. 이 상은 니에프스의 작업실 창문에서 바라본 풍경으로, 사진이라는 이름을 얻을 만한 최초의 사진으로 간주된다.
#3.
[생애] 루이 자크 망데 다게르는 1787년 11월 18일 파리의 북서쪽에 위치한 코르메유 장 파리지에서 태어났다. 1801년부터 1803년까지 오를레앙에 있는 건축사사무소에서 수습교육을 받고, 1804년에는 무대배경화가가 되기 위해 파리로 온다. 그는 3년간 무대배경화가인 외젠 마리 드고티에게 수습교육을 받은 후, 1807년에는 파노라마 화가인 피에르 프레보의 조수가 된다.
다게르는 1814년에 화가로서 대형 파리 예술전시회 살롱에 유화 벽화를 전시한다. 그는 1816년부터 1820년까지 랑지귀 코미크 극장의 무대장식가로서 자신의 무대장치와 빛 효과로 상당한 성공을 거둔다. 1819년에는 파리 오페라하우스의 무대화가 감독이 된다. 3년 뒤에 극장 일을 그만두고, 1822년에는 샤를 마리 부통과 함께 파리에서 디오라마 극장을 개관한다.
다게르는 1824년부터 카메라 옵스큐라의 상을 고정해 줄 얇은 층을 입힌 금속판으로 실험한다. 두 사람은 런던에서도 디오라마 극장을 운영한다. 그는 1826년에 파리의 안경사인 슈발리에를 통해 자신과 같은 문제로 고심하던 니세포르 니에프스를 알게 된다. 1829년에 니에프스와 헬리오 동판연구를 계속하기 위한 파트너 계약을 맺는다. 니에프스의 돌연사 후 다게르는 우연히 잠상을 얻게 된다. 그는 1837년에서야 이 상을 요오드화은 판 위에서 현상하고 고정할 수 있었다. 1839년 방화로 인해 디오라마 극장이 소실된다. 같은 해에 그의 사진처리방식이 언론에 의해 알려지고 프랑스가 이것을 매입한다. 다게르는 1841년에 낙향하고, 그곳에서 1844년에 자신의 마지막 다게레오 타입을 만든다. 1851년 7월 10일 마린느 강변의 브리에서 숨을 거둔다.
Louis JACQUES MANDE DAGUERRE. Boulevard du Temple, Paris, c. 1838.
Daguerreotype. Bayerisches NationaJmuscum, Munich.
다게르의 방식에 대한 소식이 1839년 1월 영국에 전해지자,
톨벗은 그의 ' 발광성의 그림' 방식에 대한 발표를 서둘렀고 이어서 왕립학회 회원들에게 자신의 기술에 대해 완벽하고 상세하게 설명했다. 이것은 프랑스 정부가 다게레오타이프의 제작방법을 공표하기 6개월 전의 일이었다.
이와 유사한 기술을 가지고 우선권을 주장한 다른 많은 사람들이 있었으나, 가장 손쉽고 믿을 만한 방법으로 화상을 만들어냄으로써 사진술을 확립한 2가지 기본방식은 톨벗과 다게르에 의한 것이다.
#4.
[정보] 파노라마와 디오라마 = 파노라마와 디오라마는 19세기 초반부터 가장 대중적인 오락수단에 속했다. 이 장치들은 가능한 한 가장 완벽하게 현실을 모방하여 관객에게 보여 주는 데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파노라마는 배에 장착되어 관객들은 배의 사령교에서 상을 관찰할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관객의 시선은 높은 위치에서 방 중앙에 360도로 펼쳐진 기념비적 상을 향하게 되어 있었다. 그것은 관객에게 마치 자신이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의 일부인 듯한 착각을 심어 주었다. 그림들은 대부분 카메라 옵스큐라의 도움으로 복제된 도시나 풍경그림들이었다.
파노라마는 비교적 정적인 효과를 사용했으나, 다게르의 디오라마는 훨씬 더 생생하게 현실을 체험하게 해 주었다. 움직이지 않는 그림에 생동감이 부여 되는 복잡한 조명방식을 통해 일출과 일몰, 흘러가는 구름과 안개가 투명한 색을 칠한 영사막 위에서 그럴 듯하게 보였다. 실제로 알프스 산에 있는 작은 집들과 젖소의 방울소리, 벼랑 앞에 서 있는 염소 그리고 스위스 노래를 부르는 합창대로 이루어진 가상풍경은 다게르의 몽블랑 디오라마 극장에서 관객을 경탄하게 했다. 그것은 완벽한 환상을 창조하려는 다게르의 욕구와도 맞아떨어졌다.
#5.
[평가] 다게르는 카메라 옵스큐라에 포착된 상을 자신이 발전시킨 다게레오 타입이라는 최초의 실용적인 사진처리방식을 사용하여 영구 고정시키는 데 성공함으로써 사진발명에 중대한 기여를 했다.
#6.
[추천] 읽을 만한 책 = 『사진의 역사』, 보먼트 뉴홀 지음, 정진국 옮김, 열화당, 2003년.
자료 : <해냄 클라시커 50 사진가 - 카메라 렌즈에서 탄생된 순간의 기적, 사진의 역사를 이룩한 세계의 거장 50> 빌프리트 바츠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