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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말을 들을 것인가? 사도행전 5:17~42

작성자yoonyeong choi|작성시간26.06.13|조회수41 목록 댓글 0

누구의 말을 들을 것인가? 사도행전 5:17~42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은 초대교회 역사 가운데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신 후 성령께서 강림하셨습니다. 사도들은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담대히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성전 미문에서 앉은뱅이가 일어났고, 수많은 병자들이 치유를 받았으며, 귀신들린 자들이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교회는 날마다 부흥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사람들이 하나님께 돌아올수록 종교지도자들은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교회가 살아날수록 그들은 불편해했습니다. 복음이 확장될수록 그들은 분노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들의 귀가 하나님의 음성보다 자기 욕심의 소리를 듣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누구의 말을 들을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창세기 3장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그러나 뱀은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고 말했습니다. 그 순간 하와는 선택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것인가? 뱀의 말을 들을 것인가? 인간의 비극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뱀의 말을 더 신뢰한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귀에는 수많은 소리가 들려옵니다. 세상은 말합니다. "돈이 최고다." "즐길 수만 있으면 된다." "절대 손해 보지 말고 살아라." "전도해도 소용없다." "요즘 누가 교회에 오느냐." "교회 다니려면 적당히 믿어라."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

문제는 이 두 소리가 우리 귀에 충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사도들도 바로 그러한 갈림길에 서 있었습니다. 공회는 복음을 전하지 말라 말합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말씀을 전하라 하십니다. 사도들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누구의 말을 들을 것인지 묻고 계십니다.

1. 시기와 두려움의 소리를 들을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것인가?(17~26)

17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일어나서" 여기서 "시기"라는 단어는 헬라어 젤로스(ζλος)로 원래는 열정, 열심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죄로 인해 왜곡되면 부정적인 의미인 질투와 시기가 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종교지도자들이 지금 무엇을 보고 듣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바로 앞 절인 16절입니다. “예루살렘 부근의 수많은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그렇다면 기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들은 기뻐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보다 사람들이 치유되고 괴로움에서 해방되는 것보다 자기 입장이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만드는 가장 무서운 것 중 하나가 시기라는 거 아십니까? 시기심은 하나님의 역사를 보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만듭니다. 인류최초의 살인자 가인은 시기 때문에 아벨을 죽였습니다. 사울은 시기 때문에 사위 삼은 다윗을 죽이려 했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시기 때문에 요셉을 죽이려 했고 노예로 팔아먹습니다. 시기심은 언제나 사람의 눈을 멀게 합니다.

영화 아마데우스를 보면 18세기 유럽 황실 음악가 살리에리가 있었습니다. 그는 누구보다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명예도 있었고 부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젊은 음악가 모차르트가 나타났고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은 순간 살리에리는 충격을 받습니다. 그는 깨달았습니다. "이것은 내가 평생 노력해도 가질 수 없는 재능이다." 그때부터 그는 모차르트를 시기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그의 마음은 질투로 가득 찼고 평생 괴로움 속에 살게 됩니다. 모차르트의 재능은 축복이었지만 살리에리에게는 고통이 되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시기심 때문입니다. 시기심은 다른 사람의 축복을 자신의 고통으로 바꾸어 버립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 헌신하면 기뻐해야 합니다. 누군가 은혜를 받으면 함께 감사해야 합니다. 누군가 전도를 잘하면 격려해야 합니다. 그런데 시기가 들어오면 하나님의 역사보다 사람만 보게 됩니다. 그 순간부터 은혜는 사라지고 이 시기심은 결국 하나님의 일을 대적하게 만듭니다.

18"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더니" 사도들이 대체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병든 자를 고쳤습니다. 영혼들을 구원했습니다. 그런데 감옥에 갇힙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영적 원리를 발견합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커질수록 사탄의 방해도 커집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15:18) 믿음의 길에는 반드시 세상의 반대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반대에도 불구하도 자신의 일을 이루시는 줄 하나님이신 줄 믿습니다.

19, 20"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 이르되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 정말 놀라운 장면입니다. 하나님은 옥문을 여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더 놀라운 것은 무엇입니까? 그들을 감옥에서 꺼내주신 목적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쉬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도망가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숨어 있으라고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다시 성전으로 보내셨습니다. 다시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복음 전하면 다시 잡힐 것이 분명할 것인데도 가서 생명의 말씀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우리는 종종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 문제만 해결해 주십시오." "하나님 이 고난만 지나가게 해주십시오." 그런데 하나님은 단지 문제를 해결하는 데 관심이 있으신 것이 아니라 그 상황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십니다. 믿으십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을 감옥에서 건지신 목적은 편안함이 아니라 사명 때문이었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영국의 청교도 설교자 존 번연도 복음을 전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혔습니다. 당국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설교만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내일이라도 석방해 주겠다." 그에게는 사랑하는 아내가 있었습니다. 장애를 가진 딸도 있었습니다. 가족들은 굶주리고 있었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설교를 포기하고 가족 곁으로 돌아가는 것이 옳아 보였습니다. 그러나 존 번연은 말했습니다. "오늘 석방된다 하더라도 내일 또 복음을 전할 것입니다." 결국 그는 12년 동안 감옥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감옥에서 세계적인 고전 천로역정이 탄생했습니다. 사람은 감옥에 가둘 수 있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가둘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존 번연을 감옥에 가두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를 위해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사람들은 두려운 상황 속에서도 즉각적인 순종을 하게 되어있습니다. 21절 앞부분에 "그들이 듣고 새벽에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치더니" "그들이 듣고" 그리고 즉시 순종했습니다. 새벽에 성전에 들어갔습니다. 어제 감옥에 갇혔던 사람들입니다. 오늘 또 잡힐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두려움보다 하나님의 음성이 더 크게 들렸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두려운 상황이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믿음은 두려움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신뢰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모세도 여호수아도 두려운 상황에 처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나아갔습니다. 여호수아 19절에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오늘도 두려움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택하는 교회가 될 때 하나님은 오늘도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이루실 줄 믿습니다.

2. 사람의 명령을 따를 것인가, 하나님의 명령을 따를 것인가?(27~32)

감옥문은 열렸고 천사가 사도들을 꺼내 주었지만 모든 문제가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더 큰 시험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믿음의 사람에게 진짜 시험은 고난이 아닙니다. 그 고난의 상황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셨을 때 끝까지 그 말씀을 붙들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즉 순종의 시험인 것입니다.

사도들은 다시 붙잡혀 사람의 권위를 앞세우는 공회 앞에 세워집니다. 27~28절입니다. "그들을 끌어다가 공회 앞에 세우니 대제사장이 물어 이르되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너희의 가르침을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 돌리고자 함이로다"

대제사장은 끝까지 "예수"라는 이름을 말하지 않습니다. "이 이름"이라고만 말합니다. 예수의 이름이 너무나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으니 끝난 줄 알았을 것입니다. 무덤에 장사지냈고 제자들을 다 흩어 버렸으니 끝난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예수의 이름은 예루살렘을 뒤덮고 있었습니다. 병든 자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납니다. 귀신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떠나갑니다.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모여듭니다. 결국 그들은 예수의 이름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상 권력의 한계를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4:35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역사를 보면 수많은 왕과 황제들이 성경을 없애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라졌고 말씀은 남았습니다. 복음은 인간의 작품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18세기 프랑스의 계몽사상가 볼테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100년 안에 기독교는 사라질 것이다." 그는 성경을 비웃었습니다. 교회를 조롱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볼테르가 죽은 후 그의 집이 성경을 인쇄하고 배포하는 창고로 사용되었고 그가 부정하고 조롱했던 성경이 그의 집에서 인쇄되어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는 것입니다. 볼테르는 죽었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살아계시고 하나님의 역사는 계속되는 줄 믿습니다.

29절입니다.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구절은 사도행전 전체를 대표하는 말씀 가운데 하나입니다. "순종하다"는 말은 헬라어로 페이다르케인(πειθαρχεν)입니다. "통치자의 권위에 복종하다" 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마땅하니라"의 데이(δεῖ)라는 단어는 "반드시 의무적으로 해야 한다" 라는 뜻으로 도적적인 필연성을 보여줍니다. 즉 베드로의 말은 "우리는 통치자이신 하나님께 복종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은 선택사항이 아닌 필연적인 의무입니다." 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30~31절에서는 그 순종의 결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승천과 높아지심을 사도들이 담대히 증언합니다. 그 후 32절에서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라고 말합니다.

베드로와 사도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했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명령보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랐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예수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도 그 사실을 증언하고 계십니다.” , 32절은 그들이 단순히 오순절에 성령을 받은 사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명령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사도들의 삶 속에서 성령께서 충만히 역사하시며 그 성령께서 복음을 증언하고 계심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들은 이미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있었고 그 순종의 현장에 성령께서 함께하셨습니다. 성령은 편안함과 안일 속에 머무는 교회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믿음의 걸음을 내딛는 교회 가운데 역사하시는 걸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성령의 능력을 경험하기 원한다면 먼저 말씀에 대한 순종의 자리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결국 신앙은 누구의 말을 더 크게 듣느냐의 문제입니다. 사람의 명령은 일시적입니다. 세상의 유행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합니다. 다가오는 새생명축제를 준비하면서 우리는 세상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순종해야 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가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이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반드시 역사하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사람의 평가를 들을 것인가, 하나님의 칭찬을 들을 것인가?(33~42)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의 말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던 사도들은 이제 또 다른 시험 앞에 서게 됩니다. 첫 번째 시험은 두려움의 시험이었습니다. 두 번째 시험은 순종의 시험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 시험은 평가의 시험입니다.

우리는 생각보다 사람들의 평가에 민감합니다. 칭찬 한 마디에는 기분이 좋아지고,

비난 한 마디에는 마음이 무너집니다. 인정받으면 힘이 나고, 무시당하면 낙심합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평생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달라야 합니다. 사람들의 평가보다 하나님의 평가를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사도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33절입니다. "그들이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할새"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공회원들은 회개하기는커녕 도리어 분노했습니다. 여기서 "크게 노하여"라는 말은 헬라어로 디에프리온토(διεπρίοντο)인데 직역하면 "마음이 톱으로 켜지는 것처럼 잘렸다"는 의미입니다. 한마디로 양심이 찔려 오히려 분노가 골수에 사무쳤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말이 틀렸기 때문에 화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맞았기 때문에 화가 난 것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삼천 명이 회개하고 오천 명이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같은 말씀을 들은 공회원들은 크게 노하였다는 겁니다. 왜 그랬을까요? 인간은 본성적으로 죄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은 언제나 인간의 교만과 충돌하게 되어있습니다. 칼빈도 인간의 본성을 "끊임없이 우상을 만들어 내는 공장"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죄인은 자신의 죄가 드러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죄를 드러나게 하는 진리를 거부합니다. 그러나 같은 말씀이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회개의 역사를 일으키며 오늘도 이 시간 하나님께서 지금 내게 주시는 말씀이라고 마음을 열고 받을 때 풍성한 은혜가 임하게 될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들은 지금 매우 중요한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공회원들은 분노했습니다. 사도들을 죽이려고 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한다고 해서 언제나 형통만 오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손해를 볼 때도 있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오해를 받을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여전히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기 생각을 따르라고 압박하며 강요하며 때로는 유혹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놀라운 사건을 보여 줍니다. 종교지도자들이 사도들을 죽이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가말리엘을 일으켜 사도들을 보호하셨습니다. 가말리엘은 당시 유대 사회에서 가장 존경받던 바리새인 율법교사이자 바울의 스승으로, 사도들을 죽이려는 공회 앞에서 39"만일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 너희가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라며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신중한 조언을 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일은 아무도 막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책임지십니다.

그리고 이후에 더욱 놀라운 장면이 이어집니다. 사도들은 채찍을 맞고 공회에서 나오게 됩니다. 당시 채찍질은 매우 잔인했습니다. 유대법에 따라 보통 마흔 대에서 하나를 감한 서른아홉 대를 때렸습니다. 등이 찢어져 피나가고 살점이 떨어져 나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채찍을 맞고 나오는 사도들은 울지 않았습니다.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두려워하지도 않았습니다. 41"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그들의 귀에는 채찍 소리보다 공회의 협박소리보다 하나님의 칭찬이 더 크게 들렸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여기서 "합당한 자로 여기심"의 헬라어 카텍시오데산(κατηξιώθησαν) "존귀한 자격을 얻다" "영광스러운 특권을 받다"라는 의미입니다. 사도들은 자신들이 예수님 때문에 고난받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가치 있는 것으로 영광으로 여겼습니다. 마태복음 5:11~12"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채찍에 맞고 협박을 당해도 그들은 오히려 기뻐했습니다.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기쁨입니다. 이것은 좋은 상황과 환경 때문에 오는 기쁨이 아닙니다. 순종의 결과로 주어지는 기쁨입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입니다. 사람의 평가보다 하나님의 칭찬을 들은 자에게 주시는 성령의 열매인 희락의 열매, 기쁨으로 충만했던 것입니다.

42절입니다.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 그들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날마다 전도했습니다. 어디서나 전도했습니다. 성전에서도 집에서도 전도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삶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에는 세 가지 음성이 등장합니다. 첫째는 시기와 두려움의 음성입니다. 둘째는 진리를 거스르는 사람의 명령입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사도들은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는 결단으로 분명히 선택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사람의 평가보다 하나님의 칭찬을 들었고, 사람의 위협보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었으며, 사람의 명령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그 순종이 예루살렘을 변화시켰고, 유대를 변화시켰고, 사마리아를 변화시켰고, 마침내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되는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예안교회 성도 여러분, 다가오는 새생명축제를 앞두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묻고 계십니다. "너는 누구의 말을 들을 것인가?"

세상은 말합니다. "전도 하지마, 힘들잖아" "전도해도 사람들 말 안 들어, 절대 안와" "다른 사람이 할 거야 너는 안 해도 돼"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오늘 우리도 사도들처럼 사람의 말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명령보다 하나님의 명령을, 사람의 평가보다 하나님의 칭찬을 선택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날 우리 모두가 주님 앞에 설 때, 마태복음 25: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이 음성을 듣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 음성을 듣는 저와 여러분, 그리고 예안교회가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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