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락에 접시꽃이 피면
초여름의 뜨락에 접시꽃이 피기 시작하면 마음 한구석에 잠들어 있던 그리움도 함께 깨어난다. 어느 날 문득 고개를 들어 담장 곁을 바라보면, 연분홍 꽃잎이 바람에 흔들리며 오래된 기억의 문을 두드린다. 꽃은 해마다 같은 자리에 피지만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은 해마다 달라진다. 그래서 접시꽃은 꽃이면서 동시에 추억이고, 계절이면서 동시에 그리움이다.
어린 시절 우리 집 뜨락에도 접시꽃이 있었다. 장독대 옆 좁은 흙마당에서 키보다 높게 자란 접시꽃은 마치 집을 지키는 수문장 같았다. 새벽이면 이슬을 머금고 서 있었고, 저녁이면 노을빛을 품은 채 하루를 마감했다. 그 꽃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지만, 나는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존재인지 알지 못했다.
사람은 늘 곁에 있는 것의 소중함을 늦게 깨닫는다.
어머니도 그랬다.
어머니는 아침이면 뜨락을 쓸고, 접시꽃 곁에 쪼그리고 앉아 풀을 뽑았다. 꽃이 피면 환하게 웃었고, 꽃잎이 떨어지면 아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 모습이 너무도 자연스러워 나는 그것이 영원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어느새 뜨락은 변했고, 사람도 변했고, 계절도 여러 번 지나갔다. 그리고 어머니는 더 이상 뜨락에 서 계시지 않는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접시꽃이 피는 계절이 오면 어머니의 모습이 가장 선명하게 떠오른다.
꽃은 기억을 품고 피는 것일까.
연분홍 꽃잎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어머니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뜨거운 여름날 부채를 부치며 마루에 앉아 계시던 모습, 저녁 무렵 된장 냄새가 풍기던 부엌 풍경, 해 질 녘 장독대에 기대어 하늘을 바라보시던 모습이 하나둘 떠오른다.
그리움은 언제나 작은 것에서 시작된다.
꽃 한 송이, 바람 한 줄기, 오래된 노래 한 곡이 마음속 깊은 곳에 묻어 두었던 시간을 불러낸다. 접시꽃도 그렇다. 화려하지도 않고 향기가 짙은 꽃도 아니지만 이상하게 사람의 마음을 오래 붙잡는다.
아마도 접시꽃은 기다림의 꽃이기 때문일 것이다.
긴 줄기를 따라 차례로 피어나는 꽃들은 마치 삶의 시간을 닮았다. 어떤 꽃은 막 피어나고, 어떤 꽃은 활짝 웃고 있으며, 어떤 꽃은 조용히 시들어 간다. 시작과 절정과 이별이 한 줄기에 함께 있다.
우리 인생도 그렇다.
누군가는 태어나고, 누군가는 성장하며, 누군가는 떠난다. 그러나 떠났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꽃이 지고 난 자리에도 향기가 남듯이 사람도 떠난 뒤 기억으로 남는다.
그래서 그리움은 슬픔만이 아니다.
그리움은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이다.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리워할 이유도 없다. 오래도록 마음속에 남아 있다는 것은 그만큼 깊이 사랑했다는 뜻이다. 접시꽃을 볼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지는 이유도 결국 사랑의 흔적 때문일 것이다.
햇살이 꽃잎을 비추면 연분홍 빛이 투명하게 번진다. 마치 누군가의 따뜻한 미소를 보는 것 같다. 바람이 불면 꽃은 흔들리지만 꺾이지 않는다. 그 모습은 평생 가족을 위해 살아온 어머니의 삶을 닮았다.
수많은 바람을 견디고도 묵묵히 서 있는 꽃.
아무 말 없이 자신의 자리에서 피어나는 꽃.
접시꽃은 화려한 장미처럼 자신을 자랑하지 않는다. 들꽃처럼 소박하고 정직하다. 그래서 더 마음을 끈다.
삶도 그런 것이 아닐까.
눈에 띄는 성공보다 묵묵한 성실함이 더 오래 남는다. 큰 목소리보다 따뜻한 마음이 더 깊은 울림을 준다. 접시꽃은 그런 진실을 조용히 가르쳐 준다.
나는 꽃 앞에 한참을 서 있다.
연분홍 꽃잎 사이로 어린 봉오리들이 보인다. 아직 피지 않은 꽃들은 저마다의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서두르지 않는다. 조급해하지도 않는다. 때가 되면 피고, 때가 되면 진다.
그 모습이 참 아름답다.
우리는 늘 서두르며 살아간다. 남보다 빨리 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더 많이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접시꽃은 말한다.
“꽃은 경쟁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계절에 피어날 뿐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이 조금 가벼워진다.
어쩌면 그리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억지로 잊으려 할 필요도, 붙잡으려 할 필요도 없다. 꽃이 피고 지듯이 마음도 자연스럽게 흘러가면 된다.
어머니를 생각하면 아직도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하지만 그 슬픔마저 감사하게 느껴진다. 그만큼 사랑했고, 그만큼 행복한 시간을 함께 보냈기 때문이다.
초여름 햇살 아래 접시꽃이 바람에 흔들린다.
마치 먼 곳에서 누군가 손을 흔드는 것 같다.
“잘 지내고 있느냐.”
그 인사를 듣는 순간 가슴 깊은 곳에 숨어 있던 그리움이 조용히 꽃을 피운다.
해마다 뜨락에 접시꽃이 피면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춘다. 그리고 꽃 너머로 지나간 시간을 바라본다. 그곳에는 어린 시절의 나도 있고, 장독대 곁의 뜨락도 있으며, 환하게 웃고 계신 어머니도 있다.
접시꽃은 오늘도 말없이 피어 있다.
하지만 그 침묵 속에는 수많은 이야기와 사랑, 그리고 세월을 건너온 그리움이 담겨 있다.
그래서 나는 안다.
뜨락에 접시꽃이 피는 것은 단순히 꽃이 피는 일이 아니라, 마음속 그리움이 다시 한 번 세상 밖으로 걸어 나오는 일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