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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오타루 운하, 시간의 강을 걷다

작성자박미정|작성시간26.06.09|조회수26 목록 댓글 0

오타루 운하, 시간의 강을 걷다

하늘은 잔뜩 흐려 있다. 비를 품은 구름들이 낮게 내려앉아 있고 바람은 바다의 냄새를 실어 나른다. 사람들은 하나둘 운하를 따라 걷고 있다. 누군가는 사진을 찍고, 누군가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풍경을 바라본다. 일본 홋카이도의 작은 항구 도시 오타루. 그 중심에는 오랜 세월을 품은 운하가 흐르고 있다.

처음 오타루 운하를 마주하는 순간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물이 아니다. 시간이다. 운하 양옆으로 늘어선 석조 창고와 오래된 건물들은 마치 백 년 전 어느 날에서 그대로 걸어 나온 듯한 모습이다. 담쟁이가 벽을 감싸고 있는 건물은 세월의 무게를 고스란히 품고 있고 물결 위에 비친 그림자는 과거와 현재를 하나로 이어 놓는다.

운하는 원래 낭만을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 아니었다. 메이지 시대 이후 홋카이도 개척이 본격화되면서 물자를 실어 나르기 위해 만들어진 산업의 길이었다. 수많은 배들이 이곳을 드나들었고 창고마다 생선과 곡물, 생활용품이 가득 쌓였다. 사람들은 땀을 흘리며 짐을 옮겼고 도시의 경제는 운하를 중심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시대는 변한다. 철도와 도로가 발달하면서 운하의 역할은 점점 줄어들었고 한때 번성했던 공간은 쇠락의 길을 걸었다. 철거 이야기도 나왔지만 시민들은 반대했다. 오래된 것을 없애는 것이 발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오타루 운하는 살아남았고 오늘날 가장 아름다운 관광 명소가 되었다.

나는 운하 옆 산책길을 천천히 걸었다. 물 위에는 작은 관광선이 떠 있고 세계 각국에서 온 여행객들이 저마다의 언어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이곳에는 소란스러움이 없다. 사람이 많지만 고요하다. 아마도 흐르는 물이 모든 소음을 조금씩 품어 안기 때문일 것이다.

운하는 참 이상한 존재다. 강도 아니고 바다도 아니다. 인간이 만들었지만 자연처럼 흐른다. 그래서인지 운하는 인간의 삶과 닮았다. 우리의 인생도 누군가 설계한 길 위를 흘러가지만 결국은 자신만의 물결을 만들어 가기 때문이다.

운하 난간에 기대어 물을 바라본다. 물은 멈춰 있는 것 같지만 끊임없이 움직인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어제와 같은 하루를 사는 것 같아도 우리는 조금씩 변하고 있다. 얼굴의 주름 하나, 생각의 깊이 하나, 기억의 무게 하나가 모두 시간을 증명한다. 흐르는 것은 늙지 않는다. 멈춘 것이 늙는다. 운하의 물결은 조용히 그 사실을 알려 준다.

오타루에는 유난히 오래된 것들이 많다. 가스등이 서 있는 거리와 낡은 창고, 오래된 철길과 유리 공방, 오르골당까지 도시 전체가 거대한 추억의 박물관처럼 느껴진다. 사람들은 새것을 좋아한다고 말하지만 사실 마음은 오래된 것을 향한다. 오래된 것에는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새 물건은 편리함을 주지만 오래된 것은 추억을 준다. 그리고 추억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

나는 창고 벽을 뒤덮은 담쟁이를 바라본다. 담쟁이는 벽을 허물지 않는다. 다만 벽을 감싸 안는다. 세월도 그렇다. 시간은 우리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감싸 안으며 성숙하게 만든다. 젊음은 꽃처럼 아름답지만 나이 듦은 나무처럼 아름답다. 꽃은 계절을 장식하지만 나무는 세월을 품는다. 오타루의 오래된 건물들은 화려하지 않다. 그러나 깊이가 있다. 그래서 아름답다.

멀리서 관광선 한 척이 다가온다. 배는 작은 물결을 남기며 지나가고 물결은 다시 운하의 벽에 부딪혀 잔잔한 원을 만든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문득 생각한다. 사람의 삶도 그렇지 않을까. 우리가 만난 사람들, 나눈 말들, 흘린 눈물과 웃음들은 모두 누군가의 마음에 물결이 되어 남는다. 세상에 흔적 없는 삶은 없다. 작은 물결이라도 반드시 누군가의 가슴에 닿는다. 그래서 우리는 조금 더 따뜻하게 살아야 한다. 조금 더 다정하게 말해야 한다. 조금 더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

오타루 운하에는 특별한 철학이 있다. 그것은 경쟁의 철학이 아니다. 속도의 철학도 아니다. 기다림의 철학이다. 천천히 흐르는 물처럼 삶도 서두르지 말라고 말한다. 빨리 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디로 가고 있는지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바람은 운하를 따라 흐르고 구름은 낮게 내려앉아 있지만 마음은 오히려 가벼워진다.

여행의 힘은 바로 이런 것인지도 모른다. 낯선 곳에 가는 것이 아니라 잊고 있던 자신을 다시 만나는 것. 오타루 운하는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다. 시간이 흐르는 모습을 눈으로 볼 수 있는 장소이며 과거와 현재가 함께 걷는 길이고 삶의 속도를 잠시 늦추어 주는 쉼표 같은 공간이다.

해가 지면 가스등이 하나둘 켜지고 운하는 황금빛으로 물든다. 사람들은 그 아름다움을 사진으로 담지만 진짜 풍경은 사진 속에 남지 않는다. 진짜 풍경은 그곳에서 느꼈던 마음속에 남는다. 나는 다시 한번 운하를 바라본다. 물은 여전히 흐르고 있다. 백 년 전에도 흘렀고 지금도 흐르며 백 년 후에도 흐를 것이다.

인생은 짧지만 시간은 길다. 그러나 짧은 인생도 아름답게 흐를 수 있다. 오타루 운하의 물결처럼 조용히 그러나 깊게, 천천히 그러나 멈추지 않으며 자신의 길을 향해 흘러간다. 그리고 그 흐름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깨닫는다. 행복은 멀리 있는 목적지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흐르고 있는 삶 자체라는 것을. 오타루 운하는 오늘도 말없이 흐르며 그 오래된 진실을 여행자들의 마음속에 조용히 새겨 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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