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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지옥계곡에서 만난 생명의 숨결

작성자박미정|작성시간26.06.09|조회수27 목록 댓글 0

지옥계곡에서 만난 생명의 숨결

비가 내린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하늘과 땅 사이에 안개와 빗방울이 함께 떠다닌다. 회색 구름은 산허리를 감싸 안고 있고, 하얀 수증기는 땅속 깊은 곳에서 끝없이 솟아오른다. 사람들은 우산을 들고 나무 데크를 따라 천천히 걸어간다. 저마다 신기한 표정으로 계곡을 바라보지만, 이곳에 서면 누구나 잠시 말을 잃게 된다.

일본 홋카이도 노보리베쓰의 지옥계곡. 이름부터 범상치 않다. 지옥계곡이라니. 처음 들으면 두려움이 앞선다. 그러나 막상 그곳에 서면 두려움보다는 경외심이 먼저 밀려온다. 자연이 인간에게 보여 줄 수 있는 가장 원초적인 모습이 눈앞에 펼쳐지기 때문이다.

계곡 곳곳에서는 하얀 김이 피어오른다. 땅은 누런빛과 회색빛, 붉은빛이 뒤섞여 있다. 바위틈에서는 쉭쉭 소리를 내며 증기가 솟고, 유황 냄새가 바람을 타고 코끝에 스며든다. 마치 지구가 아직도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듯 땅은 뜨거운 숨을 토해낸다.

사람들은 흔히 산과 강, 숲을 보며 자연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지옥계곡은 아름다움보다 먼저 생명의 힘을 보여 준다. 꽃도 없고 푸른 초원도 없다. 오히려 황량하다. 하지만 그 황량함 속에는 수천 년 동안 멈추지 않은 지구의 심장이 뛰고 있다.

나는 데크 난간에 기대어 계곡을 바라본다. 수증기 너머로 보이는 산의 능선은 흐릿하고, 계곡 아래는 마치 다른 행성의 풍경처럼 낯설다. 인간이 만든 어떤 건축물도 이 압도적인 풍경 앞에서는 작아 보인다.

문득 생각한다. 우리는 늘 자연을 정복한다고 말한다. 높은 빌딩을 세우고 산을 뚫어 터널을 만들고 바다를 메워 도시를 만든다. 그러나 지옥계곡 앞에 서면 그런 생각이 얼마나 작은 착각인지 깨닫게 된다. 자연은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공존의 대상이다.

지구는 인간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존재했고 앞으로도 훨씬 오래 살아갈 것이다. 계곡에서 피어오르는 수증기를 바라보며 나는 인생을 떠올린다. 사람의 삶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겉으로는 고요해 보여도 마음속에는 늘 뜨거운 무엇인가가 끓고 있다. 꿈일 수도 있고 사랑일 수도 있으며 상처일 수도 있다.

겉은 차분해 보여도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지옥계곡이 있다. 아픔과 좌절, 후회와 그리움이 끓어오르는 시간들. 하지만 그 뜨거운 시간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성장한다. 용암이 식어 새로운 땅을 만들 듯 고통은 인간을 더 깊고 단단하게 만든다.

지옥계곡은 그래서 역설적인 장소다. 이름은 지옥이지만 실제로는 수많은 생명을 살리는 온천의 근원지다. 이곳에서 솟아난 뜨거운 온천수는 노보리베쓰 전역으로 흘러가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치유한다.

지옥이 천국을 만드는 셈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의 삶도 그렇다. 가장 힘들었던 시절이 오히려 가장 큰 깨달음을 준다. 가장 어두운 시간이 가장 밝은 내일을 준비한다. 고난은 벌이 아니라 성장의 과정인지도 모른다.

계곡을 따라 걷다 보면 군데군데 뜨거운 물줄기가 흐른다. 자연은 신기하게도 파괴와 창조를 동시에 품고 있다. 뜨거운 열기는 바위를 깎고 땅의 모습을 바꾸지만, 그 열기 덕분에 새로운 생태계가 만들어진다.

삶 역시 끊임없는 변화의 과정이다. 변화를 두려워하는 순간 우리는 멈춘다. 흐르는 물이 썩지 않듯 변화하는 삶은 살아 있다. 비는 점점 굵어진다. 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와 계곡에서 솟아오르는 증기의 소리가 하나로 어우러진다. 사람들은 사진을 찍으며 지나가지만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머문다.

풍경 때문만은 아니다. 그곳에는 인간이 잊고 사는 진실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너무 빨리 산다. 경쟁하고 비교하며 앞만 바라본다. 그러나 지옥계곡은 말없이 이야기한다.

“천천히 걸어도 괜찮다.”

“인생에도 뜨거운 시간이 필요하다.”

“상처도 결국은 새로운 길을 만든다.”

그 가르침은 어떤 철학자의 강의보다 깊고, 어떤 책의 문장보다 오래 마음에 남는다. 안개가 잠시 걷히자 계곡의 윤곽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 순간 나는 마치 지구의 맨얼굴을 바라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화장도 장식도 없는 본래의 모습. 거칠지만 진실하고, 투박하지만 아름다운 풍경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진짜 아름다움은 꾸밈에 있지 않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는 데 있다. 지옥계곡이 자신의 상처와 뜨거움을 숨기지 않듯 우리 역시 삶의 흔적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 여행은 새로운 장소를 보는 일이 아니다. 새로운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일이다.

노보리베쓰 지옥계곡은 나에게 자연의 위대함을 보여 주었고 동시에 삶의 철학을 가르쳐 주었다. 가장 뜨거운 곳에서 가장 따뜻한 온천이 태어나듯, 인생의 고난 또한 언젠가는 누군가를 품어 주는 온기가 된다는 사실을. 계곡에서는 지금도 쉼 없이 하얀 김이 피어오른다. 수천 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나는 마지막으로 계곡을 바라본다. 사람들은 그곳을 지옥이라 부르지만, 내게 그곳은 생명의 숨결이 피어오르는 거대한 자연의 성전이었다. 그리고 그날 내 마음속에도 작은 깨달음 하나가 뜨거운 온천수처럼 조용히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삶이란 결국 뜨거움을 견디며 자신만의 온기를 만들어 가는 긴 여행이라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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