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빛 모자를 쓴 동심의 여행자
초록빛 모자를 쓴 한 여인이 있다.
그녀는 어디 먼 나라를 여행하는 사람도 아니고, 세상의 비밀을 찾아 떠도는 모험가도 아니다. 그저 햇살 좋은 날 길 위에 서서 바람을 맞고, 꽃을 바라보고, 나무 그늘 아래 잠시 머물 줄 아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녀를 바라보는 순간 문득 생각하게 된다.
사람은 나이를 먹어도 여행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세월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흘러간다. 검은 머리에 은빛이 내려앉고, 얼굴에는 시간이 남긴 가느다란 흔적들이 하나둘 새겨진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세월 속에서도 마음속 동심을 잃지 않는다.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품고, 작은 꽃 한 송이에도 눈을 반짝이며, 길가에 핀 들꽃을 보며 발걸음을 멈춘다.
그런 사람은 늙지 않는다.
몸은 나이를 먹어도 마음은 여전히 여행 중이기 때문이다.
초록빛 모자는 마치 숲의 색을 담은 듯하다. 봄날 새순이 돋아나는 색이고, 여름 들녘이 품고 있는 생명의 색이다. 그래서일까. 그녀의 얼굴에는 묘한 싱그러움이 깃들어 있다. 어린아이처럼 해맑지는 않지만, 어린아이처럼 세상을 바라보는 눈빛은 여전히 살아 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너무 많은 것을 잃는다.
순수함을 잃고, 설렘을 잃고, 기다림의 기쁨도 잃는다. 처음에는 작은 상처 하나가 마음을 닫게 만들고, 시간이 흐를수록 현실이라는 이름의 벽은 점점 높아진다. 어느 순간 사람들은 더 이상 하늘을 올려다보지 않고, 꽃이 피어도 무심히 지나친다.
그러나 동심은 나이를 모른다.
어떤 이는 칠십이 되어도 꽃을 좋아하고, 어떤 이는 여든이 되어도 구름을 바라본다. 세상이 시끄러워도 바람 소리를 들을 줄 알고, 인생이 바빠도 노을 앞에 서서 한참을 머문다.
그런 사람은 세월보다 아름답다.
여행이란 꼭 먼 곳으로 떠나는 것만이 아니다. 새로운 풍경을 만나는 것이 여행이라면, 새로운 마음을 만나는 것도 여행이다. 오늘 처음 본 꽃에게 인사를 건네고, 오래된 나무 아래서 삶을 생각하고, 스치는 사람의 미소에 마음이 따뜻해지는 순간도 여행이다.
초록빛 모자를 쓴 여인은 그런 여행을 하고 있는 듯하다.
그녀의 발걸음은 길 위에 있지만 마음은 꽃밭을 걷고 있다. 눈앞의 풍경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풍경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나무는 무엇을 견디며 살아왔는지, 꽃은 왜 저토록 아름답게 피어나는지, 바람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생각한다.
그래서 그녀의 여행은 목적지가 없다.
도착보다 과정이 소중하고, 결과보다 순간이 아름답다. 길가에 핀 작은 개망초 한 송이도 그녀에게는 하나의 세계가 된다. 벤치에 앉아 마시는 커피 한 잔도 긴 여정의 쉼표가 된다.
문득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그때 우리는 모두 여행자였다. 골목길 끝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했고, 산 너머 세상이 궁금했다. 이름 모를 꽃을 보면 따서 냄새를 맡아 보고, 하늘을 나는 새를 보며 어디로 가는지 상상했다.
그러나 어른이 되면서 우리는 점점 여행자가 아니라 관리자가 되어 간다. 일정표를 관리하고, 시간을 관리하고, 걱정을 관리한다. 삶은 편리해졌지만 설렘은 줄어든다.
그래서 동심은 더욱 귀하다.
동심은 나이를 거스르는 힘이 아니라 삶을 사랑하게 만드는 힘이다. 세상이 아름답다고 믿게 만드는 힘이다.
초록빛 모자를 쓴 여인을 보며 생각한다.
진짜 젊음은 피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있다는 것을. 젊음은 주름이 없는 얼굴이 아니라 새로운 하루를 기대하는 마음이라는 것을. 나이가 들수록 더 많은 것을 품을 수 있고, 더 깊이 사랑할 수 있으며, 더 따뜻하게 웃을 수 있다는 것을.
바람이 머리카락 사이를 스친다.
햇살은 모자 위에 내려앉고, 미소는 얼굴 가득 번진다. 그 모습은 마치 긴 여행길에서 잠시 쉬어 가는 한 사람의 풍경 같다. 목적지에 서 있는 사람이 아니라 여전히 길 위를 걷고 있는 사람의 풍경이다.
인생도 결국 여행이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길을 걷는다. 누군가는 빠르게 걷고, 누군가는 천천히 걷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얼마나 멀리 갔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아름답게 걸었느냐일 것이다.
초록빛 모자를 쓴 동심의 여행자는 오늘도 길을 걷는다.
꽃을 만나면 웃고, 바람을 만나면 귀를 기울이며, 노을을 만나면 잠시 걸음을 멈춘다. 그리고 세상이 잊고 사는 가장 소중한 비밀 하나를 조용히 품고 살아간다.
나이가 들어도 사람은 여행자가 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마음속 동심만 꺼지지 않는다면, 우리의 인생은 언제까지나 봄날의 여행일 수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