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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거제 저구항, 바람의 언덕에 오르다

작성자박미정|작성시간26.06.12|조회수24 목록 댓글 0

거제 저구항, 바람의 언덕에 오르다

남해의 바다는 언제 보아도 넉넉하다. 하늘과 맞닿은 수평선은 끝이 보이지 않고, 바람은 먼바다에서 긴 여행을 마친 사람처럼 조용히 육지로 스며든다. 거제도 남쪽 끝자락 저구항에 도착한 날도 그랬다. 초여름 햇살은 눈부시게 쏟아지고 있었고, 바다는 유리처럼 맑은 푸른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항구에는 작은 어선들이 평화롭게 정박해 있었고, 방파제 너머로는 잔잔한 물결이 햇살을 받아 은빛 비늘처럼 흔들렸다.

저구항은 크지 않은 포구지만 남해가 품은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간직한 곳이다. 항구를 둘러싼 산자락에는 수국이 한창 피어나고 있었다. 연보라와 하늘빛, 분홍빛 꽃송이들이 초록 잎 사이에서 둥글게 피어나 바다를 향해 고개를 들고 있었다. 꽃은 바람을 따라 흔들리고, 바다는 꽃빛을 품은 채 잔잔히 숨 쉬고 있었다.

수국길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꽃들은 마치 오래전부터 이곳을 지키던 마을 사람들처럼 여행객을 반갑게 맞이한다. 가까이 다가가 바라보면 한 송이 꽃 속에 수십 개의 작은 꽃들이 모여 있다. 혼자서는 작은 존재이지만 함께 모였을 때 하나의 아름다운 꽃송이가 된다. 사람의 삶도 이와 다르지 않다. 서로 기대고 살아가며 하나의 풍경을 이루는 것이 인생인지도 모른다.

언덕으로 향하는 길목에는 아기자기한 풍차 모형이 눈길을 끈다. 수국과 풍차가 어우러진 풍경은 마치 동화책의 한 장면 같다. 아이들은 사진을 찍으며 웃고, 어른들은 꽃길을 걸으며 잠시 어린 시절의 마음으로 돌아간다. 여행은 멀리 떠나는 것이 아니라 잊고 있던 감성을 다시 만나는 일인지도 모른다.

나무 계단을 따라 바람의 언덕으로 오른다. 계단은 생각보다 길지만 주변 풍경이 발걸음을 가볍게 만든다. 계단 양옆으로는 수국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고, 소나무 숲에서는 솔향기가 바람을 타고 내려온다. 계단을 오를수록 바다는 조금씩 넓어지고 하늘은 더욱 가까워진다.

정상에 가까워질 무렵 붉은 풍차가 모습을 드러낸다. 바람의 언덕을 상징하는 풍차다. 푸른 바다와 초록 언덕, 그리고 붉은 풍차가 만들어 내는 색의 조화는 한 폭의 그림 같다. 풍차는 움직이지 않아도 바람의 존재를 말해 준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이 풍차를 돌리고, 보이지 않는 시간이 사람의 삶을 움직이는 것처럼 말이다.

언덕 위에 서니 남해의 풍경이 한눈에 펼쳐진다. 에메랄드빛 바다는 햇살을 머금고 반짝이고, 멀리 섬들은 바다 위에 떠 있는 초록 배처럼 보인다. 해안선을 따라 이어지는 숲은 짙은 녹음으로 여름을 품고 있고, 하늘은 그 위를 넉넉하게 덮고 있다. 그 풍경 앞에 서면 누구나 잠시 말을 잃게 된다.

바다는 늘 같은 자리에 있지만 결코 같은 모습이 아니다. 시간에 따라 색이 달라지고 계절에 따라 표정이 바뀐다. 사람의 삶도 그렇다. 같은 하루를 살아가는 것 같지만 사실은 매 순간 달라지고 성장한다. 바람의 언덕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면 삶이란 결국 변화하는 풍경을 받아들이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언덕을 스치는 바람은 쉼 없이 지나간다. 붙잡을 수 없지만 분명히 존재한다. 행복도, 사랑도, 추억도 어쩌면 바람과 비슷하다. 손에 쥘 수는 없지만 마음속에는 오래 머문다. 그래서 사람들은 바람을 느끼기 위해 높은 곳에 오르고, 바다를 보기 위해 먼 길을 떠나는지도 모른다.

한참 동안 풍차 곁에 앉아 바다를 바라본다. 파도 소리는 멀리서 들려오는 오래된 노래처럼 귓가를 스친다. 수국은 바람에 흔들리고, 소나무는 낮은 숨결로 여름을 이야기한다. 자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가장 깊은 위로를 건넨다.

다시 저구항으로 내려오는 길. 수국길은 여전히 아름답고 바다는 여전히 푸르다. 그러나 오르기 전과 내려오는 후의 마음은 조금 다르다. 풍경은 그대로인데 바라보는 사람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여행의 진짜 의미는 새로운 장소를 만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는 데 있다.

거제 저구항과 바람의 언덕은 화려하지 않다. 그러나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수국이 피어나는 언덕길과 바다를 품은 풍차, 그리고 남해의 바람이 전해 주는 조용한 철학 때문이다. 삶이 답답하고 마음이 무거운 날, 이곳을 다시 찾고 싶다. 언덕 위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바람 한 줄기에 마음을 맡기면, 잊고 지냈던 여유와 평온이 다시 돌아올 것만 같다. 바람의 언덕은 그렇게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작은 쉼표 하나를 남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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