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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빗소리가 머무는 마루

작성자박미정|작성시간26.06.12|조회수21 목록 댓글 0

빗소리가 머무는 마루

비가 내린다.

처마 끝에 매달린 빗방울들이 하나둘 떨어지며 세상을 적신다. 기와지붕 위로 쏟아지는 빗줄기는 오래된 장단을 연주하듯 규칙적인 소리를 만든다. 마당의 흙길은 금세 젖어 윤기를 띠고, 돌계단 사이로 작은 물길이 생겨난다. 장미꽃은 비를 맞으며 고개를 숙이지만, 이상하게도 더 아름답게 피어 있다.

나는 한옥 마루에 앉아 그 풍경을 바라본다.

세상은 늘 맑은 날만을 꿈꾸지만, 마음은 오히려 비 오는 날에 더 깊어진다. 햇살 아래서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비 오는 날에는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하나도 눈에 들어오고, 젖은 나뭇잎 위를 미끄러지는 빗물의 흔적도 아름다운 풍경이 된다.

마루에 앉아 있으면 시간이 천천히 흐른다.

도시는 늘 바쁘다. 사람들은 무언가를 향해 달려가고, 더 높은 곳을 향해 손을 뻗는다. 그러나 비는 그런 세상을 잠시 멈추게 만든다. 자동차도 느려지고 사람의 걸음도 느려진다. 자연은 비를 통해 우리에게 쉼표 하나를 선물한다.

장미가 피어 있는 뜰을 바라본다.

붉은 장미는 뜨거운 열정을 품은 듯하고, 연분홍 장미는 첫사랑의 기억처럼 수줍다. 노란 장미는 햇살을 닮았지만 오늘만큼은 빗방울을 품은 채 고요히 서 있다. 꽃들은 비를 피하지 않는다.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바람이 불면 바람에 흔들린다.

어쩌면 꽃이 아름다운 이유는 저 순응의 자세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람은 늘 삶을 통제하려 한다. 예상대로 흘러가길 바라고, 계획대로 이루어지길 바란다. 하지만 인생은 비와 같다. 어느 날은 갑자기 쏟아지고, 어느 날은 예고 없이 그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비를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 비를 견디며 지나가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처마 밑은 참 신비로운 공간이다.

비를 맞지도 않고 완전히 피하지도 않는다. 세상과 거리를 두면서도 세상 속에 머무는 자리다. 나는 그곳에 앉아 빗소리를 듣는다. 어린 시절 외갓집에서 들었던 빗소리가 떠오른다. 장독대 위로 떨어지던 빗방울, 마당을 뛰어다니던 병아리들, 부엌에서 풍겨오던 된장국 냄새가 기억 속에서 천천히 걸어 나온다.

비는 추억을 깨우는 힘이 있다.

햇살은 현재를 비추지만 비는 과거를 불러온다. 잊고 지냈던 얼굴들이 떠오르고, 오래전의 풍경들이 마음속에 스며든다. 그래서 사람들은 비 오는 날이면 괜히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는지도 모른다.

빗줄기가 조금 굵어진다.

기와 끝에서 떨어지는 물줄기는 마치 은실처럼 반짝인다. 나무는 젖은 잎을 흔들고, 장미는 꽃잎 위에 작은 호수를 품는다. 자연은 비를 귀찮아하지 않는다. 오히려 비를 통해 더욱 싱그러워진다.

삶도 그러했으면 좋겠다.

상처가 있어도 더 깊어지고, 눈물이 있어도 더 맑아지고, 아픔이 있어도 더 단단해지는 삶. 비를 맞은 장미가 더욱 향기로워지듯, 시련을 견딘 사람도 더욱 아름다워진다.

문득 빗소리 사이로 바람이 지나간다.

젖은 흙냄새와 꽃향기가 함께 스며든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향기다. 자연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순수한 향기. 나는 눈을 감고 그 냄새를 오래도록 맡아 본다.

행복이란 거창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비 오는 날 마루에 앉아 있을 수 있는 여유, 빗소리를 음악처럼 들을 수 있는 마음, 꽃 한 송이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시선. 어쩌면 행복은 늘 우리 곁에 있었는데 바쁜 걸음 때문에 보지 못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한옥은 말없이 비를 받아낸다.

수십 년, 수백 년 동안 수많은 비와 바람을 견디며 이 자리를 지켜 왔다. 사람도 그렇다. 살아간다는 것은 견디는 일이다. 때로는 외롭고 때로는 힘들지만, 결국 견딘 시간들이 삶의 나이테가 된다.

비가 조금씩 잦아든다.

구름 사이 어딘가에서 희미한 빛이 스며든다. 장미꽃은 여전히 피어 있고, 마당은 더욱 맑아졌다. 비는 지나가지만 비가 남긴 흔적은 오래도록 풍경을 아름답게 만든다.

나는 마루 끝에 앉아 마지막 빗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조용히 생각한다.

인생도 비와 같다고.

피할 수 없는 날이 있지만, 그 비를 지나고 나면 더 푸른 하늘이 기다리고 있다고. 오늘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한 방울의 빗물은 그렇게 작은 위로가 되어 마음속으로 스며든다. 마치 오래된 한옥이 들려주는 삶의 이야기처럼, 천천히 그리고 따뜻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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