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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봄밤

작성자박미정|작성시간26.06.12|조회수16 목록 댓글 0

봄밤

봄은 낮보다 밤에 더 깊어진다. 햇살 아래 피어난 꽃은 눈으로 먼저 다가오지만, 밤에 만나는 꽃은 마음으로 스며든다. 어둠이 세상을 조용히 덮으면 낮 동안 숨겨 두었던 향기와 그리움이 비로소 깨어난다. 그래서 사람들은 봄밤을 사랑하는지도 모른다.

벚꽃이 만개한 길목에 서 있다. 검은 밤하늘 아래 분홍빛 꽃송이들이 별처럼 매달려 있다. 나뭇가지는 거대한 우산이 되어 하늘을 가리고, 꽃잎들은 달빛을 품은 채 환하게 빛난다. 마치 밤이 꽃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세상은 온통 분홍빛으로 물들어 있다.

벚꽃 아래 한 여인이 나무에 기대어 서 있다. 연분홍 베레모와 머리끝에 묶인 리본은 꽃과 닮았고, 환한 미소는 봄보다 먼저 피어난 꽃처럼 보인다. 사람들은 흔히 꽃이 아름답다고 말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꽃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꽃을 바라보는 사람의 표정일 때가 있다. 마음이 맑은 사람은 어떤 풍경 속에서도 봄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봄밤의 길은 낮과 다르다. 자동차 소리도 줄어들고, 바람조차 발소리를 죽이며 지나간다. 그 적막 속에서 꽃은 더욱 선명해진다. 낮에는 미처 보지 못했던 꽃잎의 결이 보이고, 스쳐 지나쳤던 향기가 코끝에 머문다. 봄밤은 풍경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들여다보게 만든다.

문득 살아온 시간들을 돌아본다. 인생에도 봄밤 같은 순간이 있었다. 바쁘게 달려가는 동안에는 알지 못했지만, 잠시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니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들은 대개 조용한 시간 속에 숨어 있었다. 누군가와 나누었던 짧은 대화, 따뜻한 눈빛 하나, 이름 없는 길가의 꽃 한 송이. 행복은 언제나 거창한 곳이 아니라 사소한 순간에 머물러 있었다.

벚꽃은 오래 피어 있지 않는다. 며칠 후면 꽃잎은 바람에 흩어지고, 분홍빛 터널도 기억 속 풍경이 된다. 그래서 벚꽃은 더욱 아름답다. 영원하지 않기에 더 소중하고, 곧 사라질 것을 알기에 더 애틋하다. 어쩌면 인생도 벚꽃과 다르지 않다. 끝이 있기에 오늘이 귀하고, 헤어짐이 있기에 만남이 빛난다.

바람이 불어온다. 꽃잎 몇 장이 어둠 속에서 나비처럼 날아오른다. 그 모습은 마치 시간이 흘러가는 모습을 눈으로 보는 것 같다. 붙잡을 수는 없지만 바라볼 수는 있는 것. 그것이 시간이고, 계절이며, 우리의 삶이다.

여인은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다. 꽃은 언젠가 지겠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가장 아름답게 피어 있다. 그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일까. 그녀의 미소에는 조급함이 없고, 아쉬움도 없다. 다만 현재를 온전히 누리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평온함이 깃들어 있다.

우리는 종종 내일을 걱정하느라 오늘을 놓친다. 아직 오지 않은 계절을 기다리느라 지금 피어 있는 꽃을 보지 못한다. 그러나 봄밤의 벚꽃은 조용히 말해 준다. 행복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 있다고.

분홍빛 꽃그늘 아래 서 있으면 세상은 잠시 느려진다. 마음속 근심도 꽃잎처럼 가벼워지고, 바람은 오래된 상처를 어루만지며 지나간다. 그렇게 봄밤은 사람을 위로한다. 말없이, 소리 없이, 그러나 가장 따뜻한 방식으로.

오늘 밤 벚꽃은 다시 피어 있다. 어둠 속에서도 환하게 빛나며 누군가의 마음을 기다린다. 그리고 그 꽃 아래 선 사람은 깨닫는다. 봄은 계절이 아니라 마음의 온도라는 것을. 꽃이 피는 순간보다 꽃을 바라보며 미소 짓는 순간이 더 아름답다는 것을.

그래서 봄밤은 짧지만 오래 남는다. 꽃은 지고 계절은 지나가도, 그 밤의 향기와 미소는 마음속에서 오래도록 꽃으로 피어난다. 마치 한 편의 수채화처럼, 은은한 분홍빛 기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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