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목정, 백일홍 필 무렵
백일홍이 피기 시작하는 계절이면 시간도 꽃을 닮는다. 서둘러 피었다가 금세 지는 꽃이 아니라 백 일을 붉게 머무는 꽃처럼 하루하루를 천천히 쌓아 간다. 대구 달성의 오래된 정자 하목정에도 그런 시간이 흐른다. 나무는 계절을 품고, 정자는 세월을 품고, 사람은 그 사이에 앉아 자신의 이야기를 품는다.
하목정에 들어서는 길은 조용하다. 오래된 돌길과 흙길이 이어지고, 굽은 나무들은 마치 오랜 친구처럼 방문객을 맞이한다. 수백 년의 바람을 견딘 나무들은 말없이 서 있지만 그 침묵 속에는 숱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조선의 선비들이 오가고, 시를 짓고, 세상을 논하던 시간이 아직도 나뭇결 사이에 남아 있는 듯하다.
정자 곁의 배롱나무에는 붉은 꽃이 피어난다. 백일홍이라 불리는 이 꽃은 여름과 가을의 경계를 오랫동안 지켜 내는 꽃이다. 짙은 초록 잎 사이로 분홍빛 꽃송이가 피어나면 정원의 풍경은 한층 깊어진다. 꽃은 화려하지만 결코 요란하지 않다. 오히려 오래 머물 줄 아는 품격이 느껴진다.
정자 난간에 기대어 바라보는 풍경은 한 폭의 수채화 같다. 나뭇가지가 자유롭게 뻗어 나가고, 연둣빛 잎사귀들은 바람이 지날 때마다 작은 파문처럼 흔들린다. 그 사이로 비치는 햇살은 꽃과 잎에 머물렀다가 천천히 땅으로 내려앉는다. 세상은 분주하게 움직이지만 이곳의 시간은 조금 다르게 흐른다.
정자에 앉아 백일홍을 바라보고 있으면 문득 삶도 꽃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늘 화려한 순간만을 기억하려 하지만 정작 인생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오래 견디는 힘이다. 꽃이 백 일을 피어 있기 위해서는 뜨거운 햇살도 견뎌야 하고 비바람도 이겨 내야 한다. 사람 역시 마찬가지다. 견딘 시간만큼 깊어지고, 기다린 시간만큼 아름다워진다.
나뭇가지 사이로 열린 작은 석류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아직 익어 가는 중인 어린 열매다. 꽃이 지고 난 자리에 열매가 맺히듯 삶도 지나간 계절 위에서 새로운 의미를 만든다. 젊은 날의 꿈과 설렘이 꽃이었다면 오늘의 평온함은 열매에 가깝다. 꽃보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더 깊고 단단하다.
정자에 앉은 한 사람의 미소도 풍경의 일부가 된다.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좋다. 자연은 언제나 사람의 마음을 먼저 읽어 주기 때문이다. 바람은 머리끝을 스치고, 나무는 그늘을 내어 주고, 꽃은 눈길을 머물게 한다. 그 속에서 사람은 잠시 삶의 무게를 내려놓는다.
하목정은 단순히 오래된 건축물이 아니다. 시간의 쉼표 같은 공간이다. 바쁘게 달려온 사람들에게 잠시 멈추어 서라고 말하는 곳이다. 빨리 가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을, 때로는 꽃 한 송이를 바라보는 시간이 인생을 더 풍요롭게 만든다는 것을 조용히 일깨워 준다.
백일홍은 오늘도 피어 있다. 어제도 피어 있었고 내일도 피어 있을 것이다. 꽃은 자신의 시간을 다투지 않는다. 누구보다 빨리 피려 하지도 않고, 누구보다 늦게 지려 하지도 않는다. 다만 자신에게 주어진 계절을 성실하게 살아갈 뿐이다.
그래서 하목정의 백일홍 앞에 서면 마음이 잔잔해진다. 인생이란 결국 더 높이 오르는 일이 아니라 자기만의 계절을 아름답게 살아 내는 일인지도 모른다. 오래된 정자와 붉은 꽃, 그리고 초록빛 나무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하나다.
“서두르지 말아라. 꽃도 자신의 때를 기다리며 백 일을 피어 있지 않느냐.”
하목정의 오후가 깊어 간다. 바람은 나뭇잎 사이를 지나고, 백일홍은 변함없이 피어 있다. 그 풍경 속에서 사람은 비로소 잊고 있던 자신의 속도를 되찾는다. 그리고 마음 한구석에 작은 꽃 한 송이를 다시 피워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