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박(碇泊)
어둠이 내려앉은 갯벌 위에 작은 배 한 척이 멈추어 있다. 밀물이 빠져나간 자리에는 검은 흙이 드러나고, 배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고요히 숨을 죽이고 있다. 멀리 산등성이들은 검푸른 그림자가 되어 하늘과 맞닿아 있고, 지평선 너머에서는 아직 남아 있는 빛이 하루의 마지막 온기를 품고 있다.
누군가는 저 배를 보며 멈춤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정박이라고 말하고 싶다. 멈춤과 정박은 닮은 듯하지만 다르다. 멈춤은 끝을 뜻하지만 정박은 다시 떠나기 위한 기다림이다. 항해를 포기한 배는 버려진 배가 되지만, 정박한 배는 언젠가 다시 바다를 향해 나아갈 꿈을 품고 있다.
인생에도 그런 시간이 있다. 아무리 노를 저어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날이 있다. 바람은 멎고 물길은 사라지고 삶은 갯벌처럼 단단하게 굳어 버린다. 사람들은 그 시간을 실패라고 부르지만 지나고 보면 그것은 실패가 아니라 정박의 시간인 경우가 많다.
배는 왜 항구에 머무를까. 폭풍을 피하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부서진 곳을 고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때로는 방향을 다시 정하기 위해 머문다. 바다는 넓고 길은 많기 때문이다. 무작정 나아가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젊은 날에는 멈추지 않는 것이 용기라고 생각한다. 쉼 없이 달리고 끊임없이 성과를 내고 누구보다 빨리 목적지에 도착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 알게 된다. 멈추지 않는 삶보다 더 어려운 것은 제대로 쉬는 삶이라는 것을.
정박은 게으름이 아니다. 오히려 다시 떠나기 위해 힘을 비축하는 지혜다. 사진 속 배는 갯벌 위에 조용히 놓여 있다. 엔진도 꺼져 있고 물살도 없다. 하지만 그 침묵 속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다. 새벽마다 바다를 누볐던 기억, 파도와 싸웠던 시간, 만선의 기쁨과 빈손의 아쉬움이 배의 몸체에 켜켜이 쌓여 있다.
그 모든 시간을 지나온 뒤 배는 지금 말없이 쉬고 있다. 삶도 그러하다. 열심히 살아온 사람일수록 정박의 의미를 안다. 쉼 없이 일한 사람만이 휴식의 가치를 알고 수많은 길을 걸어본 사람만이 멈춤의 깊이를 안다. 바람이 없는 날에도 배는 존재하고 성과가 없는 날에도 인생은 계속된다.
우리는 종종 자신을 남과 비교한다. 누군가는 이미 먼 바다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데 자신은 갯벌에 멈춰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초조함이 밀려온다. 뒤처지는 것은 아닐까. 영영 떠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자연은 서두르지 않는다. 밀물이 빠지면 썰물이 오고 썰물이 가면 다시 밀물이 찾아온다. 바다는 기다림을 통해 순환한다. 지금 물길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영원히 길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배는 그것을 안다. 그래서 조급해하지 않는다. 묶여 있는 밧줄을 원망하지도 않고 드러난 갯벌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때가 되면 물은 다시 차오를 것이고 바다는 다시 길을 열어 줄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삶에도 밀물과 썰물이 있다. 성공의 밀물이 밀려오는 날이 있는가 하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것 같은 썰물의 날도 있다. 그러나 그 둘은 서로를 완성한다. 썰물이 없으면 밀물도 없고 정박이 없으면 항해도 없다.
어쩌면 인생의 가장 깊은 성장은 달릴 때가 아니라 멈출 때 이루어지는지도 모른다. 고요 속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침묵 속에서 길을 찾고 외로움 속에서 마음의 소리를 듣는다. 바람 소리가 사라진 뒤에야 비로소 자신의 노랫소리를 들을 수 있듯이 말이다.
어둠이 조금씩 깊어지고 있다. 갯벌 위의 배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 모습은 쓸쓸하기보다 평온하다. 마치 자신의 시간을 믿는 노인처럼, 내일 아침을 기다리는 농부처럼, 계절을 기다리는 나무처럼 담담하다.
나는 그 배를 바라보며 생각한다. 삶은 끊임없는 항해가 아니라 정박과 항해가 반복되는 긴 여정이라고. 지금 내 삶이 갯벌 위에 멈추어 있는 것처럼 보여도 괜찮다. 바다가 길을 잃은 것이 아니듯 인생도 방향을 잃은 것이 아니다. 단지 다음 항해를 준비하고 있을 뿐이다.
언젠가 다시 밀물이 들어오면 저 배는 조용히 밧줄을 풀고 바다를 향해 나아갈 것이다. 그리고 우리 또한 그럴 것이다. 잠시 멈추어 있을 뿐, 결코 끝난 것이 아니다. 정박은 멈춤이 아니라 다시 떠나기 위한 가장 깊은 준비이기 때문이다.
갯벌 위에 홀로 놓인 작은 배는 오늘도 아무 말 없이 삶의 진실 하나를 가르쳐 준다.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고, 멈추어 있는 시간 또한 인생의 일부라고. 물이 빠진 자리에서 바다를 기다리는 배처럼 우리도 때로는 고요 속에서 자신을 다독이며 다음 계절을 준비해야 한다고. 어쩌면 가장 아름다운 항해는 가장 긴 정박 끝에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