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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능소화 폭포 아래서

작성자박미정|작성시간26.06.15|조회수21 목록 댓글 0

능소화 폭포 아래서

여름은 꽃으로 기억된다. 봄이 벚꽃의 계절이라면 여름은 능소화의 계절이다. 무더운 햇살 아래서도 지치지 않고 피어나는 꽃, 붉은빛과 주황빛 사이를 오가는 뜨거운 색채를 품은 꽃. 그 능소화가 대구 대봉동의 한 건물 외벽을 가득 뒤덮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길을 나선다.

도심의 골목길을 따라 걷는다. 자동차 소리와 사람들의 발걸음이 이어지는 평범한 거리다. 그런데 모퉁이를 돌아서는 순간 눈앞에 믿기 힘든 풍경이 펼쳐진다. 마치 작은 산 하나가 도심 한가운데 솟아 있는 듯하다. 가까이 다가가자 그것이 산이 아니라 능소화로 뒤덮인 건물임을 알게 된다.

회색 콘크리트 건물은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 수십 년을 자란 덩굴이 벽면을 타고 오르며 거대한 녹색 숲을 만들었고, 그 사이사이 능소화가 주황빛 불꽃처럼 피어 있다. 꽃은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리고, 덩굴은 바람에 흔들리며 살아 있는 폭포가 된다.

사람들은 이곳을 ‘능소화 폭포’라 부른다.

이름 그대로다. 물 대신 꽃이 흐르고, 물보라 대신 꽃잎이 반짝인다. 햇살을 받은 능소화는 금빛을 품고, 구름이 지나가면 한결 부드러운 색으로 변한다. 자연은 같은 풍경을 두 번 보여 주지 않는다는 말을 이곳에서 실감한다.

한참 동안 고개를 들어 꽃을 바라본다. 건물 꼭대기까지 올라간 덩굴은 마치 하늘과 맞닿아 있는 듯하다. 주황빛 꽃들이 초록 잎 사이에서 얼굴을 내밀고 있다. 화려하지만 요란하지 않고, 강렬하지만 부담스럽지 않다.

능소화는 예로부터 양반집 담장을 장식하던 꽃이다. 담장 너머로 피어나는 꽃을 보며 사람들은 신분과 계층을 떠나 같은 아름다움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능소화에는 그리움과 동경, 기다림의 정서가 함께 담겨 있다.

꽃 아래 서 있으니 어린 시절 풍경이 떠오른다. 시골 마을 담벼락에 기대어 피어 있던 능소화, 장독대 옆을 지키던 능소화, 장마가 끝난 후 더욱 붉게 피어나던 꽃의 기억이 되살아난다.

그 기억들은 세월 속으로 사라진 것이 아니라 마음속 어딘가에 조용히 머물고 있었던 모양이다.

능소화 폭포를 바라보며 사람들도 걸음을 멈춘다. 휴대전화를 꺼내 사진을 찍고, 꽃 아래 서서 미소를 짓는다. 어떤 이는 연신 감탄사를 내뱉고, 어떤 이는 말없이 하늘을 올려다본다.

한 시민은 이렇게 말한다.

“매년 능소화를 보러 오지만 이렇게 큰 규모는 처음이에요. 꽃이 건물을 덮은 것이 아니라 건물이 꽃을 떠받치고 있는 것 같네요.”

그 말이 참 인상적이다.

정말 그렇다. 이곳의 주인공은 건물이 아니라 꽃이다. 인간이 만든 구조물은 배경이 되고 자연이 주인공이 된다. 도시는 꽃에게 자리를 내어 주고, 꽃은 도시를 아름답게 바꾸어 놓는다.

잠시 벽 아래에 앉아 하늘을 바라본다. 구름이 천천히 흐르고 있다. 능소화는 바람을 따라 흔들리고, 꽃잎 몇 장이 천천히 땅으로 내려온다.

문득 삶도 능소화를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누구나 높은 곳을 향해 오르며 살아간다. 때로는 벽을 만나고, 때로는 거친 바람을 견딘다. 그러나 끝내 꽃을 피워 내는 순간이 있다. 그 꽃은 화려한 성공일 수도 있고, 누군가를 향한 따뜻한 마음일 수도 있으며, 하루를 성실히 살아낸 흔적일 수도 있다.

능소화는 자신이 피어난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꽃을 피운다. 다른 꽃과 비교하지 않고, 다른 계절을 부러워하지도 않는다. 그저 여름이 오면 자신의 시간을 살아 낸다.

그래서 아름답다.

대봉동 능소화 폭포는 단순한 포토존이 아니다. 그것은 도심 속에서 만나는 작은 자연이고, 바쁜 일상 속에서 발견하는 계절의 선물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잠시 멈춰 하늘을 바라보라고, 꽃 한 송이의 아름다움을 느껴 보라고 조용히 말을 건네는 공간이다.

돌아서는 길에도 능소화는 여전히 바람 속에서 흔들리고 있다. 주황빛 꽃들은 여름의 한가운데서 뜨겁게 피어나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또 하나의 계절이 아름답게 저장된다.

어쩌면 여행은 멀리 떠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평범한 골목길에서 뜻밖의 풍경을 만나는 것, 그리고 그 풍경 속에서 잊고 있던 마음 하나를 발견하는 것. 대봉동 능소화 폭포는 그런 여행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여름의 명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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