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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경주 기림사를 걷다

작성자박미정|작성시간26.06.15|조회수45 목록 댓글 0

천년 숲길 끝에서 만난 고요

경주 기림사를 걷다

경주를 찾는 사람들은 대개 불국사와 석굴암을 먼저 떠올린다. 천년 신라의 화려한 문화유산이 여행자의 발길을 이끌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금만 시선을 돌려 토함산 동쪽 자락으로 향하면 또 다른 시간이 흐르는 공간을 만날 수 있다. 숲이 품고 있는 고찰, 천년의 침묵이 머무는 절집, 기림사다.

기림사로 가는 길은 여행이라기보다 순례에 가깝다. 도심을 벗어나 숲길로 접어들면 풍경이 달라진다. 도로를 따라 늘어선 나무들은 푸른 터널을 만들고, 바람은 잎사귀 사이를 지나며 부드러운 소리를 낸다. 자동차 소음 대신 새소리가 들리고, 사람의 말소리 대신 계곡물 흐르는 소리가 귀를 채운다.

절은 늘 숲속에 있어야 한다는 옛사람들의 지혜를 새삼 실감하게 된다. 산과 나무, 바람과 물이 함께 있어야 수행의 공간도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일주문에 이르자 먼저 거대한 노송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하늘을 향해 곧게 뻗지 않고 한쪽으로 몸을 기울인 소나무는 오히려 더 강인해 보인다. 굽은 줄기에는 수백 년 세월이 새겨져 있고, 거친 나무껍질에는 숱한 비바람의 흔적이 남아 있다.

마치 오랜 수행자가 세월을 견디며 묵묵히 서 있는 모습 같다.

소나무 아래에서 잠시 발길을 멈춘다. 나무는 말이 없지만 오래된 친구처럼 편안한 위안을 건넨다.

천왕문을 지나 경내로 들어서자 고즈넉한 풍경이 펼쳐진다. 오래된 전각들은 화려함보다 단아함을 간직하고 있다. 단청은 세월에 바래 더욱 깊은 색을 띠고, 나무 기둥은 천년 가까운 시간을 견디며 묵직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기림사는 신라 선덕여왕 때인 643년 원효대사가 크게 중창한 사찰로 알려져 있다. 원래 임정사라 불렸으나 이후 기림사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오랜 역사 속에서 수많은 전란과 재난을 겪었지만,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며 경주 불교문화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대적광전 앞에 서면 절집의 품격이 느껴진다. 넓은 마당을 중심으로 전각들이 질서 있게 배치되어 있고, 처마선은 하늘을 향해 우아하게 곡선을 그린다.

문득 하늘을 올려다본다.

이날의 하늘은 유난히 아름답다. 흰 구름이 양털처럼 흩어져 있고, 푸른 하늘은 한없이 높다. 처마 끝은 그 하늘과 맞닿아 있는 듯하다.

절집에서 만나는 하늘은 도시의 하늘과 다르다. 더 넓고 더 깊다. 아마도 마음이 고요해지기 때문일 것이다.

경내를 천천히 둘러보다 수국이 피어 있는 작은 마당을 만난다. 푸른빛 수국은 오래된 한옥 담장과 묘한 조화를 이룬다. 화려하지 않지만 눈길을 끄는 풍경이다.

수국은 계절을 말하고, 절집은 시간을 말한다.

꽃은 잠시 피었다 지지만 절은 천년을 견딘다. 순간과 영원이 한 공간에서 만나는 셈이다.

기림사의 또 다른 이야기는 오정수에 있다. 예로부터 절 안에는 다섯 개의 맑은 샘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까마귀가 바위를 쪼아 발견했다는 오탁수, 눈을 밝게 해 준다는 명안수, 마음을 맑게 한다는 화정수, 하늘의 밝음을 담았다는 감로수, 기운을 북돋운다는 장군수까지.

지금은 대부분 옛 모습을 잃었지만, 물에 담긴 이야기는 여전히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물은 흐르지만 이야기는 남는다.

기림사의 매력도 바로 그런 데 있다. 눈에 보이는 건축물보다 보이지 않는 시간이 더 깊게 다가온다.

대적광전 앞 삼층석탑 앞에 선다. 수백 년 동안 한 자리를 지켜 온 탑은 말없이 서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앞에서 소원을 빌고 기도를 올렸을까.

누군가는 가족의 안녕을 기원했을 것이고, 누군가는 나라의 평화를 빌었을 것이다.

탑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모든 마음을 품고 지금까지 남아 있다.

절집을 걷다 보면 종소리가 들리는 듯한 착각이 든다. 실제로는 바람이 처마 끝 풍경을 흔드는 소리일 뿐인데, 마음은 그 소리를 종소리로 받아들인다.

불교에서는 모든 존재가 인연으로 이어져 있다고 말한다.

숲과 나무, 바람과 구름, 사람과 절집도 결국 하나의 인연으로 만난다. 오늘 내가 이곳을 찾은 것도 어쩌면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작은 인연 때문인지 모른다.

기림사는 화려한 관광지가 아니다. 눈길을 압도하는 웅장함도 없다. 그러나 오래 머물수록 더 깊은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된다.

절집은 사람을 붙잡지 않는다. 다만 잠시 쉬어 가라고 자리를 내어 줄 뿐이다.

그래서 떠날 시간이 되어도 쉽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숲길을 따라 다시 내려오며 뒤를 돌아본다. 기림사는 여전히 푸른 숲 속에 고요히 앉아 있다. 천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세상은 빠르게 변한다. 건물은 높아지고 기술은 발전하며 사람들의 삶도 달라진다. 그러나 어떤 가치는 변하지 않는다. 자연 앞에서 겸손해지는 마음, 고요 속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 그리고 천천히 걸으며 삶의 의미를 되새기는 순간들이다.

경주 기림사는 그런 가치를 품고 있는 곳이다.

숲길 끝에서 만난 천년 고찰은 여행자에게 화려한 볼거리가 아니라 깊은 울림을 선물한다. 그리고 조용히 말한다.

천년을 견딘 것은 돌과 나무만이 아니라, 마음을 쉬게 하는 고요의 힘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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