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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능소화 사랑

작성자박미정|작성시간26.06.16|조회수27 목록 댓글 0

능소화 사랑

장맛비가 지나간 여름 아침, 붉은 벽돌담 위로 능소화가 피어 있다. 짙푸른 잎 사이로 주황빛 꽃들이 폭포처럼 흘러내린다. 하늘을 향해 피는 꽃도 많지만 능소화는 담장을 타고 오르며 세상과 가까워진다. 그래서일까. 능소화를 바라보고 있으면 꽃을 본다기보다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듯한 기분이 든다.

능소화는 여름의 한가운데서 핀다. 가장 뜨거운 계절, 가장 강한 햇살을 견디며 피어난다. 봄꽃들이 이미 떠난 자리를 묵묵히 지키다가 자신의 시간을 맞이한다. 기다림 끝에 피어나는 꽃이기에 그 아름다움은 더욱 깊다.

담장 아래 벤치에 앉아 있는 여인의 모습이 꽃과 닮아 있다. 화려하게 드러내지 않지만 존재만으로 풍경을 완성한다. 꽃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오래된 추억이 머물고, 미소에는 지나온 계절들이 담겨 있다. 사람도 꽃처럼 자신의 시간을 살아간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어릴 적 시골집 담장에도 능소화가 있었다. 여름이면 담벼락을 가득 덮으며 피어났고, 아침 햇살을 받으면 꽃잎마다 작은 불씨가 켜진 듯 빛났다. 그 아래에서 놀던 아이들은 꽃잎을 주워 손바닥에 올려놓고 작은 나팔이라고 부르곤 했다. 세월은 흘렀지만 그 풍경은 아직도 마음 한편에 남아 있다.

능소화에는 전설 같은 사랑 이야기가 따라다닌다. 임금을 그리워하던 궁녀의 애달픈 마음이 꽃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사실 여부를 떠나 그 이야기가 오래도록 전해지는 이유는 꽃이 품고 있는 분위기 때문일 것이다. 능소화는 화려하지만 어딘가 쓸쓸하고, 아름답지만 어딘가 그리움을 머금고 있다.

사랑은 닮아 있다. 가까이 있을 때보다 기다릴 때 더 깊어진다. 매일 만나는 사람보다 문득 생각나는 사람이 더 오래 기억된다. 능소화가 담장을 오르며 하늘을 향해 손을 뻗듯 사랑도 늘 닿지 않는 곳을 향해 자란다.

한 송이 꽃은 오래 피지 못한다. 하지만 능소화는 수많은 꽃을 차례로 피워 여름을 길게 채운다. 꽃 하나가 지면 또 다른 꽃이 피어난다. 마치 사랑도 그런 것 같다. 한 번의 기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이해와 기다림, 용서와 배려가 이어질 때 비로소 오래 지속된다.

벽돌담과 능소화의 만남도 아름답다. 차가운 벽돌은 꽃을 품어 따뜻해지고, 꽃은 벽돌 덕분에 더 높이 오른다. 서로 기대어 더욱 아름다워지는 풍경이다. 사람의 인연도 그렇다. 혼자서는 닿을 수 없는 곳을 함께라서 오를 수 있다.

여름 바람이 불어오자 꽃송이 하나가 조용히 떨어진다. 그러나 슬프지 않다. 떨어진 꽃은 또 다른 꽃을 위한 자리를 남기기 때문이다. 삶의 이별도 어쩌면 그런 것인지 모른다. 끝이 아니라 새로운 계절을 준비하는 과정일 뿐이다.

능소화 아래에 서면 사람은 잠시 시인이 된다. 바람을 읽고, 햇살을 바라보고, 지나온 시간을 떠올린다. 꽃은 말을 하지 않지만 수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래서 사람들은 매년 여름이면 다시 능소화를 찾아온다.

사랑도 꽃처럼 피고 진다. 그러나 진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꽃은 기억으로 남고, 사랑은 추억으로 남는다. 능소화가 해마다 같은 자리에서 다시 피어나듯 진실한 사랑 역시 마음속에서 오래도록 다시 피어난다.

오늘도 능소화는 붉은 벽돌담 위에서 여름을 노래하고 있다. 그 꽃 아래 앉아 있노라면 문득 알게 된다. 사랑이란 거창한 약속이 아니라 누군가를 오래 그리워하는 마음이며, 기다림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잃지 않는 일이라는 것을. 그래서 능소화는 여름꽃이 아니라 사랑의 꽃인지도 모른다. 꽃이 지고 계절이 바뀌어도 그 그리움만은 오래도록 마음속 담장을 타고 오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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