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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석류의 계절이 오면

작성자박미정|작성시간26.06.16|조회수22 목록 댓글 0

석류의 계절이 오면

석류의 계절이 오고 있다. 푸른 잎 사이로 매달린 작은 석류 하나가 햇살을 머금고 있다. 둥근 몸체 아래 붉게 물든 꽃받침은 마치 작은 왕관 같다. 아직 완전히 익지 않았지만 그 안에는 이미 가을이 들어앉아 있다. 여름 끝자락의 바람이 스칠 때마다 석류는 조용히 계절을 익혀 간다.

봄에는 꽃이었다. 붉은 꽃잎을 활짝 열고 햇살을 맞으며 피어났다. 불꽃처럼 화려한 그 꽃은 어느새 꽃잎을 떨구고 작은 열매가 되었다. 세상 모든 열매가 그렇듯 석류 역시 꽃의 시간을 견딘 뒤에야 결실의 자리에 도달한다.

사람의 삶도 닮아 있다. 누구나 열매만을 바라보지만 정작 아름다운 결실은 보이지 않는 시간 속에서 만들어진다. 견디고 기다리고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켜 낸 시간이 모여 비로소 하나의 열매가 된다.

어릴 적 시골집 마당에는 석류나무가 있었다. 초가을이 되면 붉게 익은 석류가 가지마다 매달렸다. 아이들은 그것이 언제 터질지 기다렸다. 어느 날 아침 나무 아래를 지나가다 보면 석류 하나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붉은 보석 같은 알갱이들이 빼곡하게 들어찬 모습은 어린 눈에도 신비로웠다.

석류를 반으로 가르면 수많은 씨앗들이 반짝인다. 마치 작은 루비를 한가득 담아 놓은 보물상자 같다. 자연은 참 신기하다. 투박한 껍질 속에 그렇게 아름다운 세상을 숨겨 두었으니 말이다. 사람도 그렇다. 겉모습만으로는 알 수 없는 마음의 보석을 품고 살아간다.

석류를 바라보면 늘 어머니가 떠오른다. 가을 햇살 아래 앉아 석류를 까 주시던 손길, 붉은 알맹이를 손바닥에 올려 주며 “예쁘지?” 하시던 미소가 생각난다. 세월은 흘렀지만 기억은 아직도 선명하다. 석류는 과일이 아니라 추억의 열매가 되어 마음속에 남아 있다.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라지만 사실은 성숙의 계절이다. 푸르기만 하던 잎이 물들고, 꽃이 열매가 되며, 뜨거웠던 여름이 차분한 빛으로 가라앉는다. 석류도 그 과정 속에서 익어 간다. 서두르지 않고, 조용히 자신의 시간을 받아들인다.

삶 역시 그렇지 않을까. 젊음의 계절에는 꽃처럼 피어나는 것이 중요했다면 나이가 들수록 무엇을 품고 살아왔는지가 더 중요해진다. 화려함보다 깊이가 아름답고, 속도보다 여유가 소중해진다. 석류가 붉은 알갱이를 품듯 사람도 세월 속에서 지혜와 추억을 품는다.

석류의 꽃말은 성숙과 풍요라고 한다. 그 말이 참 잘 어울린다. 하나의 열매 안에 수백 개의 씨앗을 품고 있으니 풍요롭고, 오랜 시간을 견뎌야 비로소 붉게 익으니 성숙하다. 그래서 석류는 가을의 철학을 닮은 과일이다.

햇살 좋은 오후, 석류나무 아래 서 본다. 바람이 잎사귀를 흔들고 열매는 조용히 흔들린다.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그 모습만으로도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조급해하지 말라고,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익어 간다고, 인생도 열매처럼 자신의 계절을 기다리면 된다고.

석류의 계절이 오면 사람은 잠시 걸음을 늦춘다. 붉게 익어 가는 열매를 바라보며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고 다가올 계절을 생각한다. 그리고 마음속에도 하나쯤 잘 익은 석류 같은 추억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꽃으로 피었던 시간도 아름다웠지만, 열매로 익어 가는 시간은 더욱 깊고 아름답다. 그래서 석류의 계절은 단순히 가을이 오는 소식이 아니다. 그것은 삶이 조금 더 무르익고 있다는 조용한 증거다.

오늘도 석류는 푸른 잎 사이에서 붉은 빛을 키워 가고 있다. 바람과 햇살, 비와 시간을 품으며 천천히 익어 간다.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는 우리는 문득 깨닫는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꽃처럼 피어날 때가 아니라 석류처럼 깊고 붉게 익어 갈 때인지도 모른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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