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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할미꽃을 보면 누렁지탕이 그립다

작성자박미정|작성시간26.06.17|조회수19 목록 댓글 0

할미꽃을 보면 누룽지탕이 그립다

봄이면 어김없이 할미꽃을 찾아간다. 화려한 벚꽃도 좋고 산자락을 물들이는 진달래도 아름답지만, 내 마음은 늘 할미꽃 앞에서 오래 머문다. 고개를 숙인 채 피어 있는 꽃 한 송이를 바라보고 있으면 잊고 지냈던 옛 추억들이 하나둘 되살아난다. 신기하게도 할미꽃을 보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꽃이 아니라 누룽지탕이다.

어린 시절 우리 집 부엌에는 늘 가마솥이 걸려 있었다. 새벽이면 어머니는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밥을 지었다. 장작 타는 냄새가 마당으로 번지고 굴뚝에서는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밥이 다 되면 어머니는 밥을 퍼내고 솥 바닥에 눌어붙은 누룽지를 남겨 두었다.

그 시절 누룽지는 간식이었고 별미였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부엌 한쪽에 놓인 누룽지 조각을 집어 먹곤 했다. 바삭하게 씹히는 소리와 구수한 향은 어떤 과자보다 맛있었다. 겨울이면 뜨거운 물을 부어 누룽지탕을 만들었다.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사발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후후 불어 먹던 기억은 지금도 따뜻하게 남아 있다.

누룽지탕은 가난한 시절의 음식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맛은 풍요로운 오늘보다 더 넉넉했다. 배를 채우는 음식이 아니라 마음을 데워 주는 음식이었기 때문이다. 할미꽃 앞에 서면 그 누룽지탕이 떠오른다. 고개를 숙인 꽃봉오리는 마치 아궁이 앞에 앉아 불을 지피던 할머니의 모습을 닮았다. 흰 솜털은 세월을 머금은 머리카락 같고,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은 손주를 바라보며 웃던 주름진 얼굴을 연상시킨다. 그래서 이름도 할미꽃일까.

꽃은 언제나 아래를 향해 핀다. 자랑하려는 마음이 없다. 봄의 주인공이 되겠다는 욕심도 없다. 다만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피어난다. 마치 평생 가족을 위해 살아온 어머니와 할머니들처럼 말이다. 할미꽃은 화려함 대신 깊이를 품고 있다. 벚꽃이 젊음의 웃음이라면 할미꽃은 세월의 미소다. 장미가 열정이라면 할미꽃은 기다림이다. 그래서인지 꽃을 바라보는 순간 마음이 조용해진다.

누룽지탕도 그렇다. 자극적인 맛은 없다. 화려한 재료도 없다. 그러나 오래 끓일수록 깊은 맛이 난다. 인생의 맛도 어쩌면 누룽지탕과 비슷한 것이 아닐까. 젊은 날의 뜨거움보다 세월이 우러난 담백함이 더 오래 기억되는 것처럼 말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누룽지탕을 먹을 기회도 줄어들었다. 전기밥솥은 편리했지만 누룽지를 남겨 주지는 않았다. 아궁이는 사라졌고 장작 타는 냄새도 추억 속으로 멀어졌다.

대신 할미꽃은 여전히 봄이면 찾아온다. 바위 틈에 뿌리를 내리고 차가운 바람을 견디며 피어난다. 사람들은 꽃을 보며 아름답다고 말하지만, 나는 그 꽃에서 삶을 본다. 고단한 세월을 견디고도 끝내 따뜻함을 잃지 않은 사람들의 얼굴을 본다.

어머니도 그랬다. 가난했던 시절, 좋은 것은 자식에게 먼저 내어 주고 자신은 늘 뒤로 물러섰다. 밥 한 숟가락도 아끼며 가족을 챙겼고, 누룽지탕 한 그릇에도 정성을 담았다. 그 사랑은 특별한 말이 아니라 구수한 냄새로 기억된다. 할미꽃은 그런 사랑의 꽃이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오래 기억되는 꽃. 가까이 다가갈수록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꽃이다.

봄바람이 불어온다. 할미꽃의 솜털이 햇살을 받아 은빛으로 빛난다. 꽃은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나는 그 앞에서 오래전 부엌의 풍경을 본다. 장작불이 타오르고 가마솥에서는 밥 냄새가 나고, 어머니는 누룽지탕을 끓이고 있다. 그 따뜻한 풍경 속에는 사랑이 있고 기다림이 있고 삶이 있다.

그래서일까. 나는 지금도 할미꽃을 보면 누룽지탕이 그립다. 꽃 한 송이가 음식 하나를 떠올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사람과 시간과 추억을 불러내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눈으로 보는 꽃도 있지만 마음으로 피어나는 꽃도 있다. 내게 할미꽃은 그런 꽃이다. 봄마다 찾아와 잊고 지낸 기억의 문을 열어 주고, 누룽지탕처럼 구수한 삶의 향기를 다시 떠올리게 하는 꽃. 오늘도 바위 곁에 고개를 숙인 할미꽃 한 송이가 조용히 봄을 지키고 있다. 그리고 나는 그 앞에서 오래된 누룽지탕 한 그릇의 온기를 다시 꺼내어 마음속에 담아 본다. 마치 어린 시절의 저녁이 아직 끝나지 않은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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