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섬에 일몰이 지면
서해로 향하는 발걸음은 언제나 묘한 설렘과 경건함을 동반한다. 하루의 끝을 알리는 장엄한 의식을 치르러 가는 구도자의 마음이랄까. 특히 그 목적지가 부안의 솔섬이고, 바닷바람이 제법 옷깃을 여미게 하는 계절이라면 기대감은 더욱 짙어진다. 변산반도의 구불구불한 해안도로를 따라 달리며, 창밖으로 언뜻언뜻 비치는 바다의 색이 푸른빛에서 옅은 황금빛으로 변해가는 것을 눈으로 좇는다. 목적지에 다다를 즈음, 귓가를 채우는 일정한 해조음 사이로 마침내 바다 한가운데 우뚝 솟은 작은 섬 하나가 모습을 드러낸다. 바로 일몰의 성지, 솔섬이다.
솔섬은 이름 그대로 소나무를 이고 있는 바위섬이다. 썰물 때면 육지와 이어져 걸어 들어갈 수 있고, 밀물 때면 온전히 바다의 품에 안겨 고립되는 작고 외로운 섬. 하지만 그 섬이 뿜어내는 존재감은 결코 작지 않다. 마치 거북이가 바다를 향해 엎드려 있는 듯한 기암괴석 위로, 척박한 환경을 이겨내고 뿌리를 내린 노송(老松)들이 굽이치며 뻗어 나간 자태는 한 폭의 정교한 수묵 담채화를 연상케 한다. 낮 동안 푸른 바다와 하늘 사이에서 청량한 기운을 내뿜던 섬은, 태양이 서쪽 하늘로 기울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마법 같은 변화를 준비한다.
태양이 해수면과 가까워질수록 하늘의 색은 시시각각 얼굴을 바꾼다. 옅은 주황색에서 짙은 오렌지색으로, 그리고 이내 온 세상을 삼킬 듯한 선홍빛으로 타오르기 시작한다. 하늘을 캔버스 삼아 번져가는 그 강렬한 색채의 향연 아래, 일렁이는 파도는 수만 개의 붉은 보석을 흩뿌려 놓은 듯 윤슬을 반짝인다. 빛이 강렬해질수록 솔섬의 디테일은 지워지고, 오직 빛과 어둠의 극명한 대비만이 남는다. 역광을 받은 바위와 소나무는 가장 완벽하고 짙은 검은색의 실루엣으로 변모하여 불타는 하늘에 자신의 존재를 선명하게 각인시킨다.
숨을 죽이고 기다리던 찰나의 순간이 다가온다. 하늘을 붉게 물들이던 태양이 서서히 고도를 낮추며, 섬 우측에 홀로 길게 뻗어 나온 소나무 가지 끝으로 다가선다. 사진기의 뷰파인더 너머로, 혹은 멍하니 바라보는 두 눈 위로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진다. 거대한 불덩어리 같은 해가 굽은 소나무 가지에 사뿐히 내려앉는 순간. 마치 수백 년 세월을 묵묵히 바다를 지켜온 노송이, 하루의 치열한 여정을 마치고 스러져가는 태양을 따뜻하게 품어 안는 듯한 형상이다. 나무가 해를 삼키는 것일까, 해가 나무에게 위로를 건네는 것일까. 빛의 궤적과 나무의 선이 만들어내는 이 기하학적이고도 서정적인 교차 앞에서, 해변에 모인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 셔터 소리마저 줄인 채 벅찬 경외감에 빠져든다.
그 붉은빛은 단순히 망막을 자극하는 시각적 유희를 넘어, 마음속 가장 깊고 여린 곳을 어루만진다. 척박한 바위틈에서 거센 해풍과 짠물에 맞서며 옹이 지고 뒤틀린 채 뻗어 나간 소나무. 그 질긴 생명력의 실루엣 뒤로 매일매일 자신을 온전히 불태우고 재처럼 사그라지는 태양의 순환이 겹쳐진다. 굳건한 인내와 찬란한 소멸의 대비. 그 풍경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노라면, 지난 하루 동안 어깨를 짓누르던 피로와 마음속에 켜켜이 쌓였던 작고 큰 번뇌들이 저 용광로 같은 바다 너머로 조용히 녹아내리는 기분이 든다. 자연이 건네는 가장 웅장하고도 무언(無言)의 위로다.
어느덧 태양은 소나무 가지를 지나 해수면 아래로 그 모습을 완전히 감춘다. 짧지만 강렬했던 절정의 순간이 지나간 자리, 하지만 솔섬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어쩌면 해가 진 직후의 여운에 있는지 모른다. 이른바 '매직 아워(Magic Hour)'. 태양이 남기고 간 짙은 잔광이 하늘을 보랏빛과 자홍빛으로 물들이고, 섬의 검은 실루엣은 그 몽환적이고 신비로운 배경 속에 스며들 듯 녹아든다. 시끌벅적했던 갯바위에도 짙은 고요가 내려앉고, 철썩이는 파도 소리만이 일정한 박자로 마음을 차분히 다독인다.
차가워진 저녁 공기가 옷깃을 파고들 때쯤, 아쉬운 발걸음을 돌린다. 뒤를 돌아보면 여전히 붉은 기운을 머금은 하늘 아래 솔섬이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오늘 솔섬에서 목도한 것은 단순한 일몰이라는 자연 현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빛과 시간, 그리고 억겁의 인내가 빚어낸 한 편의 장엄한 서사였다. 다시 치열한 일상으로 돌아가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고 지치는 날이 오면, 나는 눈을 감고 소나무 가지 끝에 걸려 찬란하게 타오르던 솔섬의 저 붉은 해를 꺼내어 볼 것이다. 묵묵히 하루를 견뎌낸 이 땅의 모든 것들에게 대자연이 내어주는, 그 눈부시고 따뜻한 위로를 기억하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