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귀꽃의 철학
초여름 숲길을 걷다 보면 문득 시선을 붙드는 꽃이 있다. 연둣빛 잎 사이에서 분홍빛 꽃술을 한껏 펼친 자귀꽃이다. 꽃잎이라기보다 가느다란 실오라기가 모여 만든 작은 불꽃처럼 보이는 그 꽃은 화려하면서도 부드럽고, 강렬하면서도 고요하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자귀꽃은 단순한 꽃이 아니라 하나의 철학처럼 다가온다.
세상에는 존재를 드러내는 방식이 여러 가지다. 장미는 향기로 자신을 알리고, 해바라기는 커다란 얼굴로 태양을 향해 선다. 그러나 자귀꽃은 조금 다르다. 높이 뻗은 가지 끝에서 바람과 함께 흔들릴 뿐이다. 크게 외치지 않으면서도 충분히 아름답다. 그 모습은 우리에게 삶의 중요한 질문 하나를 던진다.
과연 사람은 얼마나 드러나야 존재하는 것일까. 오늘날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을 보여주며 살아간다. 더 많은 관심을 받고, 더 큰 성공을 이루고, 더 화려한 삶을 증명하려 애쓴다. 그러나 자귀꽃은 말없이 다른 길을 보여준다. 존재의 가치는 크기가 아니라 깊이에 있다고. 소리의 크기가 아니라 향기의 진실함에 있다고.
자귀꽃 아래 서 있으면 문득 노자의 말이 떠오른다. “높은 것은 낮은 곳을 근본으로 삼는다.” 자귀꽃은 하늘 가까이 피어 있지만 그 뿌리는 깊은 땅속에 있다. 사람 역시 마찬가지다. 겉으로 드러나는 성취보다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내면이다. 뿌리가 약하면 나무가 쓰러지듯 마음이 빈약하면 삶 또한 쉽게 흔들린다.
흥미로운 것은 자귀꽃의 잎이다. 낮에는 활짝 펼쳐져 햇빛을 받고 밤이 되면 조용히 오므라든다. 그래서 예로부터 합환목이라 불렸다. 서로 마주 보며 잠드는 모습이 화목한 부부를 닮았기 때문이다. 자연은 여기서 또 하나의 철학을 가르친다. 펼침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늘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을 성장이라 생각한다. 더 많이 일하고 더 많이 얻고 더 많이 경쟁하려 한다. 하지만 자연은 안다. 쉼이 없는 성장은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낮에 잎을 펼쳤다면 밤에는 접어야 한다. 움직였다면 멈출 줄도 알아야 한다. 채웠다면 비울 줄도 알아야 한다. 삶이 힘겨운 이유는 어쩌면 접어야 할 때를 모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꽃 위를 맴도는 벌 한 마리를 바라본다. 벌은 꽃에게서 꿀을 얻고 꽃은 벌에게서 생명을 이어갈 기회를 얻는다. 자연에는 경쟁보다 공존이 먼저 존재한다. 살아 있는 것들은 서로 기대며 살아간다. 그러나 인간은 종종 혼자 서야 강한 사람이라고 믿는다.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숲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나무는 바람에 기대고 새는 나무에 기대며 꽃은 벌에 기대어 살아간다. 의존은 약함이 아니라 생명의 방식이다.
자귀꽃은 짧게 핀다. 여름 한철 피었다가 어느새 바람 속으로 스러진다. 처음에는 그것이 아쉬웠다. 이렇게 아름다운 꽃이 왜 오래 머물지 못하는지 궁금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알게 되었다. 아름다움은 영원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유한함에서 온다는 사실을.
만약 자귀꽃이 사계절 내내 피어 있다면 지금처럼 가슴을 흔들 수 있을까. 언젠가 지기 때문에 꽃은 더욱 눈부시다. 끝이 있기 때문에 순간은 소중하다. 사람의 삶도 다르지 않다. 우리는 영원히 살 수 없기에 오늘을 사랑한다. 젊음이 지나가기에 더욱 빛나고, 만남이 끝날 수 있기에 더욱 애틋하다. 죽음은 삶의 적이 아니라 삶의 가치를 완성하는 그림자일지도 모른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인간을 죽음을 향해 가는 존재라고 말했다. 언뜻 우울하게 들리지만 사실은 반대다. 끝을 아는 사람만이 현재를 진실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뜻이다. 자귀꽃은 그 사실을 조용히 증명한다. 꽃은 자신이 오래 피어 있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주어진 계절을 망설임 없이 살아낸다. 피어야 할 때 피고, 흔들려야 할 때 흔들리고, 져야 할 때 미련 없이 진다.
인생의 지혜도 어쩌면 거기에 있다. 억지로 붙잡지 않는 것. 지나가는 계절을 보내줄 줄 아는 것. 피어나는 순간을 온전히 누리는 것. 초여름 바람이 불어온다. 자귀꽃은 가느다란 꽃술을 흔들며 빛을 머금는다. 그 모습은 마치 삶에 대한 한 편의 묵언 수행 같다. 말하지 않지만 가장 깊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행복은 더 많이 갖는 데 있지 않다. 자신의 계절을 받아들이는 데 있다. 성공은 더 높이 오르는 데 있지 않다. 뿌리를 깊게 내리는 데 있다. 삶은 오래 사는 데 있지 않다. 주어진 시간을 아름답게 피워내는 데 있다. 그래서 자귀꽃 필 무렵이면 나는 걸음을 늦춘다. 그리고 생각한다.
인생은 거대한 산을 오르는 일이 아니라, 한 송이 꽃처럼 자기 계절을 살아내는 일인지도 모른다고. 자귀꽃은 오늘도 바람 속에서 흔들리며 그 오래된 진실을 조용히 말하고 있다. 꽃이 피는 이유를 묻지 않듯, 삶 또한 살아내는 것만으로 이미 충분히 의미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