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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그 집 앞

작성자박미정|작성시간26.06.18|조회수20 목록 댓글 0

그 집 앞

골목길을 걷다가 문득 걸음을 멈춘다. 담장을 따라 능소화가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주황빛 꽃송이들은 초여름 햇살을 머금고 환하게 웃고 있고, 담 너머 붉은 기와지붕은 꽃구름 사이에 떠 있는 작은 섬처럼 보인다. 누군가 정성껏 가꾼 집 앞 풍경이다.

그 집 앞에는 계절이 먼저 와 있다. 사람들은 흔히 집을 벽과 지붕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오래 기억에 남는 집은 따로 있다. 그곳에 사는 사람의 마음이 담긴 집이다. 담장 위를 넘실거리는 능소화는 단순한 꽃이 아니다. 그것은 집주인의 취향이고, 삶의 태도이며, 지나가는 사람에게 건네는 조용한 인사다.

골목은 좁지만 풍경은 넓다. 회색 담벼락과 철문 위로 능소화가 흘러내린다. 마치 누군가 붓으로 그려놓은 수채화 같다. 꽃들은 서로 기대어 피어 있고, 가지는 담장을 넘고 지붕을 타고 오르며 여름 하늘을 향해 뻗어 있다. 자연은 늘 경계를 모른다. 담장이 사람의 소유를 나누는 선이라면 꽃은 그 선을 가볍게 넘어선다.

그래서 아름다움은 독점되지 않는다. 그 집 주인만 꽃을 보는 것이 아니다. 골목을 지나는 사람도 보고,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아이도 본다. 우편배달부도 보고, 우연히 길을 걷는 여행자도 본다. 꽃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문득 오래전 시골집 담장이 떠오른다. 어머니는 봉숭아와 맨드라미를 심고, 아버지는 장독대 곁에 해바라기를 키우곤 했다. 그때는 꽃이 왜 필요한지 몰랐다. 먹을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정성을 들이는지 궁금했다. 세월이 흐른 지금은 안다. 꽃은 배를 채우지는 못하지만 마음을 채워 준다는 것을.

삶은 빵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마음을 쉬게 하는 풍경 하나, 눈길을 붙드는 꽃 한 송이, 잠시 머물러 하늘을 올려다보게 하는 나무 한 그루가 있어야 삶은 비로소 사람다운 온기를 갖는다. 능소화는 참 독특한 꽃이다. 한여름 뜨거운 햇살 속에서도 지치지 않고 피어난다. 비가 와도 피고, 바람이 불어도 핀다. 오히려 태양이 강할수록 더욱 선명한 빛을 낸다. 그래서 능소화를 바라보고 있으면 삶의 강인함이 떠오른다.

사람도 그렇다. 편안할 때보다 힘겨울 때 진짜 모습이 드러난다. 순풍 속에서는 누구나 웃을 수 있지만 역풍 속에서도 미소를 잃지 않는 사람이 있다. 능소화는 그런 사람을 닮았다. 화려하지만 교만하지 않고, 강인하지만 거칠지 않다.

꽃들은 담장 아래로 수없이 떨어져 있다. 막 피어난 꽃도 있지만 이미 생을 마친 꽃도 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슬프지 않다. 나무 위에서는 또 다른 꽃들이 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지는 꽃과 피는 꽃이 함께 있는 풍경. 그것이 바로 삶이다.

우리는 종종 끝을 두려워한다. 젊음이 지나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사랑이 변하는 것을 두려워하며, 익숙한 시간이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하지만 자연은 말한다. 끝은 사라짐이 아니라 이어짐이라고. 꽃이 지기에 열매가 맺히고, 계절이 떠나기에 새로운 계절이 온다.

그 집 능소화도 마찬가지다. 오늘 피어난 꽃은 내일 질지 모른다. 그러나 그 자리를 또 다른 꽃이 채운다. 그래서 나무는 비어 보이지 않는다. 삶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은 떠나고, 어떤 기억은 흐려지지만 그 빈자리에 새로운 인연과 새로운 추억이 찾아온다.

골목에는 바람이 분다. 꽃송이 몇 개가 조용히 떨어진다. 붉은 우체통 곁에 내려앉은 꽃잎은 작은 편지처럼 보인다. 누군가에게 보내는 계절의 안부 같기도 하고, 여름이 남기고 간 짧은 인사 같기도 하다. 나는 한참 동안 그 집 앞에 서 있다. 집 안에 누가 사는지는 모른다.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는 알 것 같다. 이 집 사람은 꽃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아름다움을 혼자 간직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
능소화는 담장을 넘으며 지나가는 사람들의 마음까지 물들인다. 그것은 꽃이 가진 힘이자, 나눔이 가진 힘이다. 좋은 마음은 향기처럼 번지고, 따뜻한 풍경은 사람의 기억 속에 오래 머문다.

다시 길을 나선다. 뒤돌아본 그 집은 여전히 꽃구름 속에 잠겨 있다. 능소화는 바람에 흔들리며 햇살을 받아 반짝이고 있다. 마치 세상에 이런 말을 건네는 듯하다.아름다운 삶은 거창한 곳에 있지 않다고. 누군가의 발걸음을 잠시 멈추게 하는 꽃 한 송이, 지나가는 사람에게 기분 좋은 미소를 건네는 풍경 하나, 그리고 담장 너머로 흘러넘치는 따뜻한 마음 속에 있다고.

그래서 나는 오래도록 기억할 것 같다. 그 여름, 능소화가 담장을 넘던 그 집 앞 풍경을. 그리고 말없이 꽃을 피워 세상을 조금 더 아름답게 만들던 한 사람의 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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