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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능금이 익어 갈 때

작성자박미정|작성시간26.06.19|조회수17 목록 댓글 0

능금이 익어 갈 때

능금이 붉게 익어 가고 있다. 여름의 푸르름을 품고 자란 열매가 어느새 가을의 문턱에서 붉은 빛을 머금는다. 나뭇가지 끝에 매달린 능금은 햇살과 바람, 비와 기다림이 빚어낸 작은 기적이다. 한 알의 열매가 익어 가는 시간 속에는 계절이 지나온 발자국과 자연이 들려주는 삶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능금밭에 들어서면 먼저 싱그러운 향기가 반긴다. 초록 잎 사이로 얼굴을 내민 붉은 열매들은 마치 작은 등불처럼 빛난다. 바람이 불 때마다 잎사귀는 서로 부딪혀 낮은 소리를 내고, 능금은 가지에 매달린 채 조용히 익어 간다. 서두르지도 않고 멈추지도 않은 채 제 속도를 지키며 붉어지는 모습이 참 아름답다.

아이들의 얼굴에도 그런 붉은 기운이 스며 있다. 손에 쥔 능금을 바라보며 웃는 표정은 세상의 어떤 보석보다 맑다. 갓 따낸 열매를 만지는 손길에는 설렘이 있고, 함께 나누는 웃음에는 수확의 기쁨이 담겨 있다. 능금은 단순한 과일이 아니다. 그것은 기다림이 맺은 결실이고, 땀방울이 피워 낸 기쁨이다.

생각해 보면 사람도 능금과 닮아 있다. 어린 시절에는 푸른 잎처럼 여리고, 청년기에는 바람을 맞으며 자란다. 때로는 비를 만나고 때로는 폭염을 견디며 성장한다. 그 과정이 쉽지 않지만 그 시간들이 쌓여야 비로소 자신만의 빛깔을 얻는다. 능금이 하루아침에 붉어지지 않듯 사람 또한 긴 시간을 지나야 성숙해진다.

우리는 종종 결과만 바라본다. 붉게 익은 열매는 보면서도 그 열매가 견뎌 온 시간을 잊는다. 꽃이 피고 지고, 작은 열매가 맺히고, 수없이 흔들리며 자란 과정을 보지 못한다. 그러나 자연은 늘 말없이 가르쳐 준다. 아름다운 결실 뒤에는 반드시 기다림이 있다는 것을.

능금나무 아래에 서면 삶을 재촉하던 마음도 조금 느려진다. 더 빨리 가야 한다는 조바심 대신 지금 내 자리에서 묵묵히 익어 가는 일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은 속도를 말하지만 자연은 성숙을 말한다. 그리고 성숙은 언제나 기다림 속에서 이루어진다.

어린 시절 고향의 능금밭도 떠오른다. 친구들과 나무 사이를 뛰어다니며 익은 열매를 찾던 기억, 입가에 묻은 달콤한 과즙, 저녁노을에 붉게 물든 과수원의 풍경이 아련하게 되살아난다. 그 시절의 능금은 과일이 아니라 계절의 선물이었고, 추억의 한 조각이었다.

능금은 가장 붉을 때 수확된다. 그러나 수확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다. 열매는 사람들의 식탁으로 가고, 씨앗은 다시 새로운 생명을 준비한다. 자연은 그렇게 끝과 시작을 이어 간다. 우리 삶 또한 마찬가지다. 하나의 결실은 또 다른 여정의 출발점이 된다.

능금이 익어 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문득 생각한다. 지금 내 삶도 어딘가에서 천천히 익어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눈에 띄지 않아도, 더디게 보일지라도 계절은 제 길을 가고 있고 시간은 조용히 사람을 성숙하게 만든다. 가을은 갑자기 오는 것이 아니다. 여름의 햇살과 바람이 차곡차곡 쌓여 이루어진 결과다. 능금의 붉은 빛도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긴 기다림이 있었기에 가능한 색이다.

그래서 능금이 익어 갈 때면 나는 삶을 생각한다. 조급함보다 기다림을, 결과보다 과정을, 성공보다 성숙을 떠올린다. 붉게 물든 능금 한 알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단순하다. 인생도 열매처럼 자기만의 계절을 지나야 가장 아름다운 빛깔로 익어 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빛깔은 서두르지 않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자연의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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