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해
봄은 늘 희망의 계절로 불린다. 얼어붙었던 땅이 숨을 쉬고, 나뭇가지마다 연둣빛 새순이 돋아난다. 꽃은 피고 열매는 맺히며 생명은 새로운 시간을 준비한다. 그러나 봄은 언제나 따뜻하지만은 않다. 때로는 꽃이 진 자리보다 더 아픈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딸기밭에 들어섰다. 비닐하우스 안에는 붉게 익어 가야 할 딸기들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어떤 것은 반쯤 붉어지다 말았고, 어떤 것은 꽃받침 아래가 검게 변해 있었다. 싱싱한 초록 잎 사이에 매달린 열매들은 마치 힘없이 주저앉은 아이들처럼 보였다. 며칠 전 찾아온 늦서리가 남긴 흔적이었다.
농부는 말없이 딸기를 살펴본다. 손끝으로 상한 열매를 만져 보고는 조용히 떼어낸다. 긴 겨울을 견디고 꽃을 피우며 기다려 온 시간들이 한순간에 무너진 것이다. 농부의 마음도 그 열매들과 함께 얼어붙었을지 모른다.냉해는 소리 없이 찾아온다. 태풍처럼 요란하지도 않고 폭우처럼 눈에 띄지도 않는다. 밤사이 살짝 내려앉은 찬 공기가 꽃을 얼리고 어린 열매를 상하게 한다. 아침 햇살이 비추면 겉모습은 멀쩡해 보이지만 생명의 속살은 이미 상처를 입어 버린다.
사람의 삶에도 그런 냉해가 있다. 크게 다치거나 무너지는 일이 아니라 작은 말 한마디, 뜻하지 않은 오해, 오래 품어 온 기대의 좌절 같은 것들이다. 겉으로는 아무 일 없는 듯 살아가지만 마음 한구석은 이미 얼어붙어 있는 경우가 있다. 남들은 모르는 상처가 조용히 자라기도 한다.
딸기꽃은 열매를 위해 핀다. 꽃이 지는 것은 슬픈 일이 아니다. 그러나 열매가 영글기도 전에 냉해를 입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서 농부들은 밤새 온도를 살피고 바람을 막으며 어린 열매를 지켜 낸다. 생명을 키운다는 것은 결국 기다림과 돌봄의 다른 이름인지도 모른다. 붉게 익지 못한 딸기 하나를 바라본다. 그것은 실패한 열매가 아니다. 비록 끝까지 자라지 못했지만 그 안에는 꽃 피우고 열매 맺기 위해 애쓴 시간이 담겨 있다. 결과보다 과정이 더 아름다운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 인생에도 끝내 익지 못한 꿈들이 있다. 이루지 못한 사랑이 있고, 도착하지 못한 길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모두 헛된 것은 아니다. 그 시간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조금 더 단단해지고 조금 더 깊어졌기 때문이다. 냉해를 입은 딸기밭 사이로 햇살이 비친다. 상처 입은 열매들 곁에서는 또 다른 꽃이 피고 있다. 생명은 포기하지 않는다. 한 번의 추위가 모든 계절을 빼앗아 갈 수는 없다. 얼어붙은 밤이 지나면 다시 따뜻한 아침이 오고, 상처 입은 자리에서도 새로운 열매는 자라난다.
그래서 자연은 늘 우리에게 희망을 가르친다. 냉해를 견딘 딸기밭처럼 삶도 그렇다. 때로는 예기치 않은 추위가 찾아와 마음을 얼게 하지만, 그 시간을 견디고 나면 다시 꽃은 피고 열매는 익는다. 중요한 것은 상처가 없었던 삶이 아니라 상처를 안고도 다시 자라나는 삶이다. 오늘도 딸기밭에는 바람이 분다. 그리고 그 바람 속에서 붉은 열매 하나가 조용히 익어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