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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펌프가 있는 풍경

작성자박미정|작성시간26.06.19|조회수18 목록 댓글 0

펌프가 있는 풍경

공원 한쪽에 오래된 펌프가 서 있다. 검게 녹슨 몸체와 길게 뻗은 손잡이, 그리고 그 곁의 둥근 돌확. 한때는 마을 사람들의 목을 축이고 밥을 짓게 했을 펌프지만 지금은 더 이상 물을 길어 올리지 못한다. 세월은 그 역할을 멈추게 했지만 이상하게도 그 곁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머문다.

그리고 고양이 한 마리가 있다. 노란 털을 가진 고양이는 펌프 곁에 앉아 있다가 어느새 몸을 웅크리고 눕는다. 마치 오래전부터 그 자리를 지켜 온 주인처럼 태연하다. 사람들은 오가지만 고양이는 서두르지 않는다. 바람을 듣고 햇살을 쬐며 조용히 시간을 보낸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문득 어린 시절 마을 우물이 떠오른다.

아침이면 양동이를 든 사람들이 우물가로 모여들었다. 펌프 손잡이를 위아래로 움직이면 쿨럭쿨럭 소리를 내며 물이 올라왔다. 아이들은 물장난을 치고 어른들은 안부를 나누었다. 물을 길으러 갔다가 소식 하나를 얻어 오고, 이웃의 근황도 듣고 오던 시절이었다.

그때의 펌프는 단순한 기계가 아니었다. 사람과 사람을 이어 주는 마을의 중심이었다. 물이 흐르는 곳에는 이야기가 있었고 웃음이 있었으며 살아가는 냄새가 있었다. 지금은 수도꼭지만 틀면 물이 나온다. 버튼 하나로 세상이 움직인다. 편리해졌지만 그만큼 기다림은 사라졌다. 사람들은 더 빨라졌고 더 많은 것을 가지게 되었지만 정작 서로의 안부를 묻는 시간은 줄어들었다.

펌프를 바라보며 생각한다. 세상은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지만 모든 것이 새것일 필요는 없다고. 때로는 쓸모를 다한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 우리에게 더 깊은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한다고. 녹슨 펌프는 물 대신 추억을 길어 올린다. 그 곁에 서면 잊고 있던 풍경들이 하나둘 떠오른다. 고무신을 신고 뛰놀던 골목길, 양철 대야에 담긴 시원한 우물물, 여름날 펌프 물에 수박을 담가 두던 어머니의 손길. 펌프는 그렇게 기억 속 시간을 끌어올린다.

고양이는 여전히 말이 없다. 그러나 그 침묵 속에는 묘한 평화가 있다. 어디로 가야 할지 고민하지도 않고 무엇을 더 가져야 할지 욕심내지도 않는다. 그저 지금 이 순간 햇살이 좋은 곳에 몸을 맡긴다. 어쩌면 행복도 그런 것인지 모른다. 우리는 늘 더 많은 것을 찾아 헤매지만 행복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다. 바람 한 줄기, 나무 그늘 하나, 편안히 누울 수 있는 자리 하나만으로도 삶은 충분히 아름다워질 수 있다.

펌프가 있는 풍경은 그래서 정겹다. 그곳에는 속도가 없다. 경쟁도 없다. 대신 오래된 시간의 결이 남아 있다. 녹슨 쇠의 빛깔과 돌확의 질감, 그리고 그 곁을 지키는 고양이의 느긋한 눈빛은 잊고 지낸 여유를 떠올리게 한다.

인생도 펌프와 닮았다. 젊은 날에는 쉼 없이 물을 길어 올리듯 앞만 보고 살아간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 비로소 알게 된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물을 길었느냐가 아니라 누구와 함께 그 물을 나누었느냐는 사실을. 공원 한쪽의 오래된 펌프는 오늘도 묵묵히 서 있다.
더 이상 물은 나오지 않지만 사람들의 기억은 마르지 않는다. 그리고 그 곁에 앉은 고양이는 아무 말 없이 우리에게 속삭인다.

조금 천천히 살아도 괜찮다고. 햇살 좋은 오후, 펌프가 있는 풍경은 그렇게 오래된 우물처럼 마음속 깊은 곳의 추억을 길어 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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