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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분꽃처럼

작성자박미정|작성시간26.06.19|조회수24 목록 댓글 0

분꽃처럼

해가 서산으로 기울 무렵이면 분꽃은 비로소 눈을 뜬다. 아침 햇살을 받으며 피어나는 꽃들이 있는가 하면, 분꽃은 저녁을 기다리는 꽃이다. 하루 종일 초록 잎 사이에 숨어 있다가 해가 낮아지고 바람이 부드러워질 즈음 조심스레 꽃잎을 연다. 마치 세상이 조금 조용해지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빗방울이 머물다 간 잎 위에 작은 분꽃 하나가 피어 있다. 연분홍도 아니고 주황도 아니다. 노랑과 분홍이 한데 어우러져 있다. 마치 누군가 붓끝에 여러 색을 묻혀 조심스레 그려 놓은 수채화 같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같은 꽃인데도 무늬가 다르고 색의 번짐도 다르다. 그래서 분꽃은 더욱 사람을 닮았다.

세상에 똑같은 사람이 없듯 똑같은 분꽃도 없다. 어린 시절 저녁 무렵이면 골목 담장 아래 분꽃이 피어 있었다. 낮에는 보이지 않던 꽃들이 어둠이 내릴 무렵 하나둘 피어나는 모습이 신기했다. 우리는 검은 씨앗을 따서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장난감처럼 굴리기도 했다. 씨앗 속 하얀 가루를 분이라 부르며 얼굴에 바르던 기억도 있다.

그 시절 분꽃은 꽃이기 전에 놀이였다.저녁밥 먹으라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릴 아이들은 골목을 뛰어다녔다. 분꽃은 그런 저녁 풍경 속에 늘 함께 있었다. 해 질 녘의 노을빛과 아이들 웃음소리, 밥 짓는 연기와 함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세월은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 골목길은 사라지고 높은 건물이 들어섰다. 아이들은 흙길보다 스마트폰 화면에 더 익숙해졌다. 그러나 분꽃은 여전히 예전 모습 그대로 피어난다. 해가 지기를 기다렸다가 조용히 꽃잎을 열고, 밤이 깊어지면 향기를 내뿜는다.

나는 그런 분꽃이 좋다. 세상은 늘 앞서가기를 요구한다. 더 빨리, 더 높이, 더 많이 이루라고 말한다. 하지만 분꽃은 서두르지 않는다. 다른 꽃들이 이미 하루를 시작하고 있을 때 조용히 기다린다. 그리고 자신의 시간이 오면 가장 자연스럽게 꽃을 피운다.

인생도 그렇지 않을까. 누군가는 젊은 날에 꽃을 피우고, 누군가는 중년에 빛을 내며, 또 누군가는 늦은 나이에야 비로소 자신의 향기를 세상에 전한다. 꽃마다 피는 계절이 다르듯 사람마다 빛나는 시간도 다르다.

분꽃은 그 사실을 가르쳐 준다. 남보다 늦었다고 조급해하지 말라고. 지금 꽃이 피지 않았다고 낙심하지 말라고.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저녁이 오고, 자신만의 계절이 찾아온다고. 빗물이 맺힌 잎 사이에서 분꽃 한 송이가 더욱 선명하게 빛난다.

화려한 장미처럼 크지도 않고, 백합처럼 고고하지도 않다. 그러나 작은 꽃잎 안에는 기다림의 미학이 담겨 있다. 자신의 시간을 알고, 자신의 자리에서 피어나는 지혜가 담겨 있다. 문득 돌아보니 우리 삶에도 분꽃 같은 순간들이 있었다.

오랫동안 준비해 온 일이 뒤늦게 결실을 맺었던 날, 포기하지 않고 걸어온 길 끝에서 비로소 빛을 보았던 날, 늦게 핀 꽃처럼 찾아온 인연과 행복들. 생각해 보면 가장 아름다운 것은 가장 빨리 피는 꽃이 아니었다.

자신의 시간을 알고 끝내 피어나는 꽃이었다. 오늘도 분꽃은 해가 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누구에게 보이기 위해서도 아니고 누구와 경쟁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그저 자신의 계절과 시간을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가끔 분꽃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다짐한다. 조금 늦어도 괜찮다고. 남들보다 천천히 걸어도 괜찮다고. 분꽃처럼 자신의 시간에 피어나는 삶이라면 그것으로 충분히 아름답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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