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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감자꽃 필 무렵

작성자박미정|작성시간26.06.21|조회수20 목록 댓글 0

감자꽃 필 무렵

하지가 지나고 있다. 일 년 중 가장 낮이 길다는 날, 들녘은 어느새 짙은 초록으로 물들었다. 물을 머금은 논에는 어린 벼들이 반듯하게 줄을 서 있고, 산자락 아래 마을은 여름의 품 안에서 조용히 숨을 고른다. 바람은 논물을 스치며 지나가고, 햇살은 초록의 결을 따라 반짝인다.

이맘때면 문득 감자가 생각난다. 어린 시절 감자꽃이 피기 시작하면 어머니는 감자밭을 자주 둘러보셨다. 하얗고 연보랏빛 작은 꽃들이 밭둑을 따라 피어 있으면 감자가 알을 굵히고 있다는 뜻이었다. 꽃은 크지 않았지만 어머니의 얼굴에는 풍년을 기다리는 미소가 번졌다. 감자꽃은 화려하지 않다. 장미처럼 향기를 뽐내지도 않고, 연꽃처럼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 꽃은 늘 땅을 향해 겸손하게 피어 있다. 마치 자신의 아름다움을 자랑하기보다 땅속에서 자라고 있는 열매를 더 소중히 여기는 것 같다.

생각해 보면 사람의 삶도 감자꽃을 닮아야 하는지 모른다. 세상은 꽃처럼 보이는 것에 주목한다. 화려한 성공과 빛나는 결과를 이야기한다. 하지만 정작 삶을 지탱하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뿌리와 땀방울이다. 감자가 땅속에서 영글 듯 사람의 성숙도 보이지 않는 시간 속에서 자란다.

하지의 들녘을 바라본다. 논에는 아직 벼 이삭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농부는 안다. 지금 자라는 초록이 가을 황금 들판의 시작이라는 것을. 자연은 늘 결과보다 과정을 먼저 준비한다. 논두렁을 걷는 농부의 발걸음이 보인다. 그는 오늘도 물길을 살피고 모의 상태를 살핀다. 누군가는 그저 평범한 풍경이라 말하겠지만, 그 안에는 한 해 농사를 책임지는 간절함이 숨어 있다. 풍년은 하루아침에 오지 않는다. 작은 관심과 정성이 쌓여 만들어지는 것이다.

감자꽃도 그렇다. 꽃이 피었다고 감자를 캐지 않는다. 기다림이 더 필요하다. 햇살과 바람, 비와 시간을 견디며 땅속의 감자가 단단해질 때까지 참고 기다려야 한다. 자연은 늘 기다림의 가치를 가르친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기다림을 잊고 살아간다. 빠른 결과를 원하고 즉각적인 만족을 추구한다. 하지만 삶의 가장 깊은 결실은 시간이 빚어낸다. 나무의 나이테가 그러하고, 익어 가는 벼가 그러하며, 땅속의 감자가 그러하다.

멀리 산 위로 구름이 흘러간다. 하지의 햇살은 강하지만 구름은 여전히 여유롭게 떠다닌다. 들녘의 초록은 바람을 따라 흔들리고, 논물은 하늘을 품은 채 반짝인다. 자연은 서두르지 않는다. 자신의 시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감자꽃이 피던 시절의 어머니도 그랬다. 풍년을 걱정하면서도 조급해하지 않았다. 때가 되면 감자가 영글고, 벼가 여물고, 가을이 온다는 것을 믿었다. 그 믿음이 삶을 지탱하는 힘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를 지나며 초록 들녘을 바라본다. 아직은 어린 벼들이지만 그 안에는 황금빛 가을이 숨어 있다. 아직은 작은 감자꽃이지만 그 아래에는 알찬 결실이 자라고 있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지금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꽃보다 중요한 것은 뿌리이고, 결과보다 소중한 것은 성장의 시간이다.

그래서 하지의 들녘 앞에 서면 감자꽃이 떠오른다. 소박하지만 묵묵하게 피어나는 꽃. 화려하지 않지만 결실을 준비하는 꽃. 어쩌면 우리가 배워야 할 삶의 지혜도 바로 그 작은 감자꽃 속에 숨어 있는지 모른다. 꽃은 잠시 피었다 지지만, 땅속의 열매는 사람들의 밥상이 되어 오래도록 생명을 이어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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