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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고목이 남긴 위로

작성자박미정|작성시간26.06.23|조회수19 목록 댓글 0

고목이 남긴 위로

숲길을 걷다가 문득 걸음을 멈춘다. 눈앞에 선 고목 한 그루 때문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두 갈래로 갈라져 하늘을 향해 뻗어 오른 나무다. 굵은 몸통은 세월의 무게를 고스란히 품고 있고, 거친 껍질에는 수많은 계절이 새겨져 있다. 가까이 다가가 올려다보니 마치 두 팔을 벌려 하늘을 안아 올리는 거인의 모습 같다.

나무는 말이 없다. 그러나 오래된 나무는 침묵으로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말이 많아지기도 하지만, 고목은 오히려 침묵 속에서 삶의 진실을 전한다. 그 침묵은 바람이 되어 잎사귀를 흔들고, 햇살이 되어 숲바닥에 내려앉는다.

고목의 몸통을 바라본다. 울퉁불퉁한 껍질은 매끄럽지 않다. 상처가 있었고, 비바람에 깎였으며, 번개와 혹한을 견뎌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흔적들은 흉터가 아니라 훈장처럼 보인다. 삶도 그렇다. 우리는 상처 없는 인생을 원하지만 정작 사람을 깊게 만드는 것은 상처를 견딘 시간들이다.

젊은 나무는 푸르고 아름답다. 하지만 고목에게는 젊음이 흉내 낼 수 없는 품격이 있다. 그것은 오래 버틴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무게다. 누구도 대신 살아줄 수 없는 세월을 묵묵히 견뎌낸 결과다.

고목은 두 줄기로 나뉘어 있다. 한 뿌리에서 시작했지만 서로 다른 방향으로 자라났다. 문득 가족이 떠오른다. 부모와 자식, 형제와 자매도 한 뿌리에서 태어나지만 각자의 하늘을 향해 자란다. 때로는 멀어지고 때로는 다른 길을 걷지만,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하나의 뿌리로 연결되어 있다.

사람들은 종종 혼자라고 말한다. 그러나 세상에 완전히 혼자인 존재는 없다. 나무도 땅속에서는 수많은 뿌리와 균사체로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보이지 않을 뿐이다. 우리의 관계도 그렇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정과 사랑이 삶을 지탱한다.

고목 아래를 바라보니 낙엽과 솔잎이 쌓여 있다. 누군가는 그것을 쓰레기라 여기겠지만, 자연은 버리는 법이 없다. 떨어진 잎은 흙이 되고, 흙은 다시 나무를 키운다. 끝은 곧 시작이 된다.

인생에서도 실패와 상실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른 모습의 양분이 된다. 눈물은 공감을 낳고, 아픔은 이해를 키우며, 외로움은 성숙을 만든다. 우리가 겪은 고통은 결코 헛되지 않다.

고목의 가지는 하늘 가까이 닿아 있다. 하지만 시작은 작은 씨앗이었다. 바람에 흔들리고 짐승에게 밟힐 수도 있었던 작은 생명이 오늘의 거목이 된 것이다.

삶이 힘겨울 때면 우리는 결과만 바라본다. 그러나 자연은 과정의 가치를 가르쳐 준다. 나무는 서두르지 않는다. 하루아침에 자라지 않는다. 계절을 건너고 세월을 통과하며 조금씩 높아진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조급함은 삶을 지치게 하지만 기다림은 삶을 익게 한다. 꽃은 피는 때가 있고 열매는 맺는 시기가 있다. 아직 피지 않았다고 해서 실패한 것은 아니다.

고목을 올려다보니 하늘이 잘 보이지 않는다. 무성한 잎들이 하늘을 대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득 깨닫는다. 나무는 자신만 자란 것이 아니다. 수많은 새들에게 그늘을 내주고, 곤충들에게 집을 제공하며, 사람들에게 쉼터가 되어 주었다.

진정한 성장은 혼자 높아지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를 품을 수 있을 만큼 넓어지는 것이다. 많이 가진 사람보다 많이 품는 사람이 더 큰 사람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흔히 늙음을 두려워한다. 주름이 생기고 힘이 약해지는 것을 안타까워한다. 그러나 고목은 말한다. 늙음은 쇠퇴가 아니라 완성에 가까운 시간이라고.

나이테는 잃어버린 시간이 아니다. 살아낸 시간이다. 그 시간 속에는 기쁨도 있었고 슬픔도 있었으며 수많은 선택과 후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 모든 것이 모여 지금의 나를 만든다.

고목은 여전히 하늘을 향해 서 있다. 더 이상 빠르게 자라지 않아도 좋다. 그저 그 자리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숲의 중심이 된다.

사람 역시 그렇다. 젊은 날에는 무엇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어느 순간에는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지가 더 중요해진다. 곁에 있는 사람에게 위로가 되고, 누군가 기대어 쉴 수 있는 나무 한 그루가 되는 것. 그것이 삶의 깊이가 아닐까.

숲을 떠나며 다시 한번 고목을 바라본다. 거대한 몸통은 말없이 서 있고, 초록 잎들은 바람에 흔들린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가벼워진다.

아마도 위로란 거창한 말이 아닐 것이다. 고목처럼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키며 살아가는 것, 그리고 그 모습만으로도 누군가에게 힘이 되어 주는 것. 그날 숲에서 만난 고목은 그렇게 조용한 위로를 내게 남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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