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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통영에서 만난 냥이

작성자박미정|작성시간26.06.23|조회수16 목록 댓글 0

통영에서 만난 냥이

통영의 바다는 늘 사람보다 먼저 말을 건넨다. 푸른 물결이 잔잔하게 부서지고, 골목마다 짭조름한 바다 냄새가 스며든다. 여행자는 풍경을 만나러 길을 나서지만, 때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존재가 여행의 주인공이 되기도 한다. 통영의 어느 한적한 길목에서 만난 작은 냥이 한 마리가 그랬다.

햇살이 따뜻하게 내려앉은 오후였다. 길가에는 키 큰 풀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초록빛 파도가 육지 위를 흐르는 듯했다. 그 사이에 주황빛 털을 가진 고양이 한 마리가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처음에는 낙엽인 줄 알았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자 작은 귀가 움직였고, 가늘게 뜬 눈이 나를 바라보았다.

고양이는 경계하지도, 반기지도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 오래 머물러 있었던 풍경의 일부처럼 조용했다. 여행자와 길고양이의 만남은 대개 짧다. 서로 이름도 모르고, 어디서 왔는지도 모른 채 스쳐 지나간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짧은 만남은 오래 기억에 남는다.

녀석은 마른 풀숲 아래 몸을 낮추고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억새 같은 풀잎이 등을 스치고 지나갔다. 마치 자연이 작은 이불을 덮어주는 듯한 모습이었다. 세상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그곳만은 시간이 느리게 흐르고 있었다.

나는 한참 동안 고양이를 바라보았다. 녀석은 눈을 감았다 뜨기를 반복했다. 졸린 것인지, 세상에 대한 경계를 늦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 표정만큼은 평온했다. 어쩌면 인간들이 그토록 찾고 있는 쉼이라는 것이 저런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을 하다 보면 많은 것을 보려고 애쓴다. 유명한 관광지, 아름다운 풍경, 맛집과 문화유산을 찾아다닌다. 하지만 정작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계획에 없던 순간들이다. 이름 없는 길목에서 만난 고양이 한 마리, 우연히 스쳐 지나간 바람 한 줄기, 골목 담장에 기대어 핀 꽃 한 송이가 더 깊은 여운을 남기곤 한다.

통영은 예술의 도시라 불린다. 수많은 화가와 시인이 사랑한 곳이다. 아마 그들이 통영을 좋아했던 이유도 특별한 풍경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바다와 섬, 골목과 사람, 그리고 길 위의 작은 생명들까지 모두가 하나의 시가 되기 때문일 것이다.

고양이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 침묵은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었다.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어떤 계절을 견뎌왔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스쳐 지나왔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눈빛에는 살아온 시간의 흔적이 담겨 있었다. 길 위의 생명만이 가질 수 있는 단단함과 고요함이 함께 머물고 있었다.

문득 여행도 고양이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적지를 향해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머무는 곳에서 잠시 쉬어 가는 일 말이다. 고양이가 풀숲 아래 몸을 기대고 있듯이 우리도 삶의 어느 순간에는 그늘 하나쯤 필요하다. 바람을 맞으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있어야 다시 걸어갈 힘을 얻는다. 통영의 바다는 여전히 반짝이고 있었다. 멀리서 갈매기 울음소리가 들려왔고, 풀들은 바람에 고개를 숙였다. 그 사이에서 냥이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마치 세상의 소란을 모두 내려놓은 수행자처럼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나는 발걸음을 옮기기 전 마지막으로 녀석을 바라보았다. 고양이는 끝내 다가오지도, 멀어지지도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 머물며 한 편의 풍경이 되어 주었다. 여행이 끝난 뒤에도 통영의 바다보다 먼저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햇살에 물든 주황빛 털, 바람에 흔들리던 풀잎,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느긋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작은 냥이의 모습이다. 그날 통영에서 만난 것은 고양이 한 마리가 아니었다. 바쁘게 살아가는 우리에게 잠시 멈추어 쉬어 가라고 말해주는 조용한 위로였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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