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의 미학
밤새 하늘의 문이 열렸나 보다. 아침에 눈을 뜨니 세상은 온통 하얀 침묵 속에 잠겨 있다. 마당으로 나서니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함박눈이 어제의 흔적을 지우고, 그 위에 정갈한 수묵화 한 점을 그려놓았다. 시선이 멈춘 곳은 마당 한쪽, 낮은 돌담에 둘러싸인 장독대다. 옹기종기 모여 앉은 장독들은 저마다 하얀 고깔을 눌러쓰고 함초롬히 눈을 맞고 있다. 그 풍경이 하도 포근하여 발걸음을 멈추고 한참을 바라본다.
장독대는 우리네 어머니들의 성소(聖所)였다. 이른 새벽, 정화수 한 그릇 떠 놓고 가족의 안녕을 빌던 곳이며, 사계절 내내 햇살과 바람을 모아 식구들의 건강을 빚어내던 생명의 보고였다. 눈 덮인 장독들을 보고 있자니, 장다리꽃 피는 봄부터 찬 바람 부는 겨울까지 그 곁을 떠나지 않던 어머니의 투박한 손마디가 떠오른다. 반짝이게 닦인 독 어깨 위로 쏟아지던 햇살과, 장맛이 변할까 노심초사하며 비가 오면 달려 나와 뚜껑을 덮던 그 지극한 정성이 저 눈 아래 고스란히 저장되어 있을 것만 같다.
장독들은 마치 눈싸움을 하다 잠시 멈춘 아이들처럼 해맑다. 크고 작은 옹기들이 어우러진 모습은 조화롭다. 배가 불룩한 큰 독에는 묵직한 된장이, 날렵하게 생긴 작은 단지에는 보석 같은 고추장이 담겨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옹기를 '숨 쉬는 그릇'이라 부른다. 흙으로 빚어 불 속에서 단련된 이 투박한 그릇은 겉으로는 무뚝뚝해 보여도, 속으로는 끊임없이 외부와 소통하며 발효의 시간을 견뎌낸다.
발효는 기다림의 예술이다. 서두른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계절이 바뀌고 달이 차고 기우는 시간을 묵묵히 받아들여야 비로소 깊은 맛이 난다. 장독대 위의 눈은 그 기다림을 축복하는 하늘의 선물 같다. 차가운 눈이 독을 덮고 있지만, 그 안에서는 여전히 생명의 기운이 꿈틀대며 익어가고 있을 것이다. 진정한 성장은 화려한 밖이 아니라, 이토록 고요하고 깊은 안에서 이루어지는 법이다.
고개를 돌려보니 뒤편의 초가집들도 하얀 눈 이불을 덮고 포근히 누워 있다. 둥글게 깎인 지붕의 곡선이 장독의 곡선과 닮았다. 자연에서 온 재료로 지어진 집과 그릇은 눈 내린 산야와 어우러져 이질감이 없다. 문득 곁에 있는 매화나무 가지를 본다. 아직은 삭풍이 매섭지만, 사진 속 한 송이 백매처럼 가지 끝엔 이미 분홍빛 설렘이 맺혀 있다. 눈 속에서도 꽃을 피울 준비를 하는 매화와, 눈 아래서 맛을 익히는 장독은 같은 결의 인내를 지녔다.
눈 덮인 장독대가 있는 풍경은 우리에게 '멈춤'의 미학을 가르쳐준다. 앞만 보고 달려가는 세상 속에서, 가끔은 이렇게 눈 속에 갇혀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해주는 듯하다. 차가운 눈 아래서 뜨겁게 익어가는 장맛처럼, 우리의 삶도 때로는 시련이라는 하얀 눈 아래서 더 깊고 풍요로워지는 것이 아닐까.
안개 자욱한 산등성이를 배경으로 눈을 맞고 선 장독들을 보며 마음 한구석이 훈훈해짐을 느낀다. 저 장독대 어딘가에서 어머니가 금방이라도 된장 한 술을 크게 떠내어 보글보글 찌개를 끓여주실 것만 같다. 그 구수한 냄새가 그리움이 되어 눈 위로 번진다. 겨울은 결코 죽어 있는 계절이 아니다. 장독 안에서, 그리고 매화의 눈 속에서 봄은 이미 치열하게 준비되고 있다.
눈 내린 장독대를 뒤로하고 돌아서는 길, 내 마음에도 하얀 고깔 하나가 씌워진 듯 평온하다. 이제 막 봄을 데리고 온 백매의 소식과 함께, 장독대의 고요한 발효는 계속될 것이다. 기다림이 깊을수록 그 뒤에 찾아올 봄은 더욱 향긋할 것임을, 저 눈 덮인 장독들은 온몸으로 증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