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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 칼럼

분노, 해야 한다면 정확하게!

작성자최선을다하는삶|작성시간24.08.16|조회수69 목록 댓글 0

목회칼럼: 분노, 해야 한다면 정확하게!

 

“소크라테스”를 철학적 계보를 잇는 사람은 역시 “플라톤”입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중세의 철학과 신학에 미친 영향은 플라톤을 능가합니다.

 

오늘 이야기는 그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야기로 출발합니다. 그는 우리가 정의롭기 위해서는 “중용(中庸)”의 덕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해하고 있는 것처럼 중용이란 중도(中道)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어중간한 상태는 중용이 아닙니다.

 

헬라어(그리스어)로 중용이란 화살이 정확하게 과녁의 중심을 맞추었을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즉, 객관적인 사실에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고 딱 부합하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중용은 냉철한 “지성”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사람은 화낼 수 있다. 그것은 쉬운 것이다. 그러나 올바른 상대에게 화를 내는 것, 올바른 방법으로 화를 내는 것, 적재적소에서 화를 내는 것, 그리고 올바른 목적으로 화를 내는 것, 그것은 누구나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절대로 쉬운 것이 아니다.”

 

한마디로 객관적인 확신이 없으면 화를 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막의 은둔수도사인 “모세 압바”의 유명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어느 수도사가 죄를 지어, 그의 잘못을 심판하기 위해서 지도자들이 모였습니다. 그들은 의논 끝에 그들의 스승인 모세 압바를 초청하기로 했습니다. 아마 그들이 결정하기에도 역부족이었나 봅니다.

 

하지만 모세 압바는 몇 번이나 그들의 초청을 거절합니다. 그러나 끈질기게 초대하는 제자들의 요청에 모세 압바는 드디어 재판정에 나오기로 합니다.

 

그가 도착한 날, 그는 뒤로 구멍이 난 모래주머니를 어께에 메고 재판정으로 들어옵니다. 그리고 이야기합니다. “내 죄가 내 뒤로 흘러내리고 있는데도, 나는 그 죄들을 보지 못한다네. 허나, 오늘 나는 다른 사람의 죄를 심판하러 왔네.”

 

이 말에 지도자들은 크게 깨우치고,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용서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분노나 정죄는 알고 보면, 분노하는 사람이나 정죄하는 사람의 인격의 그릇에 문제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무조건적으로 용서하거나 관용을 베풀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역사의 청산 과정에서 프랑스는 엄중히 매국노를 처단했고, 독일은 진정으로 사죄하였습니다. 그러나 한국은 얼렁뚱땅 관용을 베풀었고, 일본은 건성으로 사죄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아직도 풀리지 않은 매듭과 앙금으로 고통스러워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쉽지 않습니다. 그만큼의 균형과 안목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분노는 분노하는 우리를 상하게 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분노하기 전에 정확한 객관적 사실에 근거해서 결정을 해야 합니다. 어렴풋하고 어설픈 정보로 분노하게 되면 나만 손해를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분노할 객관적 사실이 미약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마음만 바로 세우면, 분노할 일은 별로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 또한 그 보다 더 부족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분노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정확한 객관적 사실의 근거위에서 엄중하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내 맘이 상한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제와 오늘 “분노를 처리하는 방법”을 나누었습니다. 이 작은 칼럼으로 여러분이 조금이나마 행복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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