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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알림]]청주경씨의 유래를 다시읽혀 드립니다.

작성자경제운|작성시간06.04.24|조회수486 목록 댓글 1

우리나라는 김씨가 5명중에 한명(20%)이고
김,이,박,최,정이 인구의50%가 넘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청주경씨는 우리나라 274(?)성씨중
인구로 104번째입니다 그러니 아주 희귀하지는 않지요
조선시대 초기에 20%이내였던 양반수가
조선말기엔 족보를 사서 양반수가 80%가 되었고
대부분의 명문(?)의 성씨를 샀다고 합니다

자부심으로 청주경씨의 연원을 살펴보면,
옛날 중국 송(宋)대에 하내(河內)지방에 살던
강태사(姜太士)의 후손에서 분파하여 경(慶)씨가 생겨났습니다

고려광종은 호족들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쌍기를 통해 노비안검법(956) 과거제(958) 공복제정(960)을 실시하고,
또한 새로운 문물을 받아드리려고
중국의 유명한 학사들을 초빙하여
고려에 귀화시키고 조정으로 끌어들였는데
그때-고려 광종11년(960년)에-
중국 초빙학자 8학사의 일원으로
경경(慶鏡)-(청주경씨의 비조)이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됩니다
그들은 고려의 관리로 등용되고
파격적인 대우를 받습니다
그 이후 광종의 죽음과 경종의등장으로
호족들이 복수를 하게 되는데
광종의 총애를 받던 신하들은
많은 수가 죽거나 피신했습니다
이후(문종조 경정상을 제외한)
200여년 동안 경씨가 역사서에 안보이다가
무인시대에 경진(청주경씨 시조)과 경대승이 등장하고
경대승이 죽은 후 3,40년 사이의 세계가 또 실전되었습니다
고종조에 제주도 수령 경세봉과 낭장 경원록등이
사기(史記)에 보이나 대수를 알지 못하여
고종조에 호부상서를 지낸 경번을 1세로 하고,
증손 경복흥이 청원(청주의 옛이름)부원군에 봉해졌으므로
청주를 본관으로 삼게 되었습니다.
청주 경씨는 부패한 세도에 용기 있는 저항으로
무맥(武脈)을 이어오면서 고려중기에서부터 조선전기에까지
가문의 성세를 보여온 명문가였습니다.
그이후 청주 경씨는 7세부터 15세까지 분파하여
20개 종파가 있습니다
경 연(慶 延) 징군파 파조 춘천부사
경 수(慶 脩) 청안공파 파조 청안현감
경 준(慶 俊) 서봉공파 파조 좌부승지
경수공(慶秀恭) 교리공파 파조 홍문관 교리
경 상(慶 祥) 월송공파 파조 덕천군수
경 조(慶 祚) 도사공파 파조 의빈도사
경상용(慶翔龍) 적성공파 파조 적성현감
경시경(慶時經) 경력공파 파조 경력관
경 달(慶 達) 아산공파 파조 아산현감
경 혼(慶 渾) 제학공파 파조 좌부승지
경 섬(慶 暹) 칠송공파 파조 호조참판
경 취(慶 ) 신강공파 파조 도승지
경 민(慶 민) 처사공파 파조 숭정처사
경대후(慶大後) 세마공파 파조 진사세마
경 잠(慶 潛) 평택공파 파조 평택현감
경 징(慶 징) 봉화공파 파조 봉화현감
경 임(慶 임) 진주공파 파조 진주목사
경종지(慶宗智) 낭성군파 파조 임실 현감
경유돈(慶由惇) 보성공파 파조 보성군수
경유공(慶由恭) 병사공파 파조 의주목사

--역사속 인물--(우선 간단하게 소개하오니 자세한 행장은 세번째방으로 들어가 읽으세요.)

경 진(慶 珍)-청주 경씨의 시조로 고려 명종때 윤인첨의 막하에서 우군병마사가 되어 조위총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우고, 지문하성사(종 2품 벼슬)를 거쳐 중서시랑평장사에 올랐다.

경대승(慶大升) 일찍이 큰뜻을 품고 아버지가 불법으로 탈취한 토지를 군에 바치고 하나도 취하지 않아 청백하다는 평판을 받았다. 15세에 음서로 교위에 임명된 뒤 차차 벼슬이 올라 장군이 되었다. 1178년(명종 8) 집권 무신들의 횡포에 정중부와 그의 아들인 균과 송유인등을 죽이고 26세 젊은 나이에 정권을 장악했다 왕이 내리는 벼슬도 모두 거절했으며 외모 또한 옥골선풍에 풍채도 뛰어났다 30세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의롭게만 살았고 경대승이 죽었을땐 만백성들이 통곡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또한 후대 조선의 성리학자들의 무인집권자들에 대한 평가에서 유일하게 충신으로 분류되는 인물이다

경 번(慶 蕃) - 청주경씨 1세, 고려 고종조 호부상서

경사만(慶斯萬) - 좌시중으로 번(蕃)의 손자이며 복흥(復興)의 아버지이다. 성품이 소박하였고 명덕태후의 조카사위로 1321년에 좌부대언이 되고, 1324년에 우대언이 되었다. 충숙왕이 참소를 받아 원나라에 억류되어 있을 때 호군 김인연(金仁沇) 등과 왕의 환국을 요청했는데, 이것으로 심왕 고(瀋王暠)일파의 미움을 받아 순군에 갇히기도 했다. 또, 충숙왕이 원나라에 억류되었을 때 본국에서 왕에게 보내는 모든수송을 관리했다.

경복흥(慶復興) 선조들의 의(義)로운 혈통을 이어받아, 조정에서 도성수축의 논의가 일어나자 백성의 피폐를 이유로 반대하여 중지하게 했으며 서북면도순문사가 되어 북방을 방어했다. 공민왕때 원나라 기황후의 오빠로 세도를 남용하여 임금을 좌지우지했던 기철(寄 轍)일당을 퇴살하여 일등공신에 올랐으며 또한 홍건적을 물리친 공으로 수문하시중에 올랐다. 1361년에 다시 홍건적이 침입하자, 왕을 호종하여 복주(지금의 안동)로 난을 피했고 이어 1363년(공민왕 12) 명장 최 영 등과 함께 덕흥군을 받들고 왕조에 반기를 든 최 유(崔 濡)를 물리쳐 문하부의 으뜸 벼슬인 좌시중에 올랐다. 또 신 돈(辛 旽)의 세도를 제거하려다가 유배되기도 했다 그후 청원부원군에 봉해짐에 따라 본관을 청주(淸州)로 삼게 되었다.

경보(慶補) 복흥(復興)의 맏아들로 위화도 회군에 참가하여 조선개국에 공을 세우고, 태종때 검교좌정승에 올라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에 봉해졌다

경진(慶臻) 복흥(復興)의 둘째아들로 정3품 정의대부에 올라 예의 판서를 역임하였다

경의(慶儀) 복흥(復興)의 세째아들로 1388년 좌군도통사 조민수 휘하 계림원수로서 요동정벌에 출정하였다. 위화도회군 뒤 이성계의 집권과정에서 일시 소외되었으나, 1390년(공양왕 2) 무진회군공신에 녹훈되었다. 1392년(태조 1)6월 문하평리로서 중국 남경에 파견되었으며 1393년 7월 참찬문하부사로서 회군이등공신에 녹훈되고, 같은해 12월 하정사로서 요동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그뒤 서북면병마도절제사로 평양윤을 겸하였였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경유공(慶由恭) 병사공파 파조 1467년 이시애의 난이 일어나자 도총사 이준의 군관으로 토벌에 참가하고, 이어서 건주야인(建州野人)정벌에 나아가 큰공을 세웠다 1469년(예종 1) 남이옥사에 연루되어 가산을 적몰당하고 관노가 되었다가 1470년 성종의 즉위로 다시 기용, 가위장이 되고, 가산·노비 등을 환급받았다. 1472년 안주목사, 1475년 행호군등을 역임하고 1478년 경흥도호부사가 되었으나 병을 이유로 사직하였다. 곧 경상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고 1480년 치중장으로 야인정벌에 참전, 공을 세워 가삼자가되고 첨지중추부사에 올랐다.
이듬해 경상도병마절도사, 1483년 다시 첨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하고 1484년 영안남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1489년 의주목사가 되었으며, 1494년 행호군 등을 역임하였다.

경준(慶俊) 서봉공파 파조 1476년(성종 7) 사헌부장령이 되어 허찬, 최영호, 서거정, 현석규,임사홍을 탄핵하였다. 이어 사간원사간에 제수되었는데, 양성지가 대사헌에 제수되자, 불가함을 주장하였다. 그뒤 권력을 농단하며 살인을 자행한 창원군 성(晟)을 탄핵하였고, 또한 당시 지방행정관의 무능함을 지적, 수령의 포폄(褒貶)을 요청하였다. 그밖에 공주들의 가옥이 너무 화려함을 논박하였고, 강원도민의 자염(煮鹽)폐단을 지적하였으며, 대신 김국광의 탐오함을 탄핵하였다. 1483년 충주목사에 제수되어, 3년 동안 재임하면서 형옥과 농정 등에 있어 선정을 폈다. 그 공로로서 당상관에 올랐고, 다시 내직으로 옮겨 장례원판결사가 되었다. 1487년 우부승지·좌부승지 등을 역임하였고 성품이 현철하였고 강직하였으며, 직무에 밝고 성실하였다.

경연(慶延) 징군파 파조,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를 평생동안 정성껏 모셨다. 특히, 아버지의 병환을 구하기 위하여 한겨울에 잉어를 잡아바친 일화가 전한다. 일찍이 생원이 되었으며 그의 효행을 듣고 세조가 그를 기용하기 위하여 불렀으나 나가지 않다가, 1476년 성종의 부름을 받고 사재감주부가 되었다. 성종이 불러들여 효행에 대해 묻자, 마음속에 순(舜)임금의 대효(大孝)와 주공(周公)의 충성을 으뜸으로 간직하고 있으나, 자신은 거기에 이를 수 없다고 하였다. 이산현감과 춘천부사에 역임하였다. 경연의 효행은 드라마로도 많이 나오고 또한 청주에 효촌이란 마을이름이 생겨나게 한 장본인 이기도하다

경세창(慶世昌) 1504년(연산군 10) 이세좌의 옥사에 연루되어 온성·영월 등지로 유배되었다. 중종 때에 관직이 회복되어 홍문관 교리·부응교, 사헌부 장령·집의 등을 거쳐 1510년(중종 5)홍문관부제학이 되고, 이어 대사간·도승지·황해도관찰사·한성부좌윤·호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그가 대사간으로 있던 1512년에는 간쟁을 용납할 것과 사치를 금할 것, 문교(文敎)를 중시할 것, 무비(武備)를 엄히 할 것 등의 10개조에 걸친 정책을 왕에게 상소한 바 있다.

경세인(慶世仁) 군수 경상의 아들이며 경세창의 아우로 어려서부터 조광조(趙光祖)·김대성(金大成)과 막역하였으며,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다. 1519년(중종 14)현량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홍문관에 들어갔다. 이어 정자·저작을 역임하고, 박사가 되어 경연에서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기에 힘썼다. 같은해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파직된 뒤 세상 사람들과 접촉하지 않고 책을 읽고 읊으며 지냈다. 김안로에게 모함을 받아 명천으로 귀양갔고 오결의 탄핵을 받았으나 1538년 석방되어 파주의 두문리에 ‘두문농은(斗文農隱)’이란 농막을 짓고 살면서 평생을 마쳤다. 저서로 《경재유고》·《경연강독록 經筵講讀錄》이 있다.

경혼(慶渾) 제학공파 파조 김안국(金安國)의 문인으로 1544년 사간원사간으로서 기묘사화로 화를 입은 조광조등의 신원을 청하였다. 그뒤 시강원우필선·사헌부집의·승문원판교를 역임하였으며, 홍문관직제학으로서 춘추관편수관을 겸하여 《중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1547년(명종 2) 병조참지, 이듬해 대사간이 되었고, 병조참의를 거쳐 홍문관부제학이 되었다.1551년 문정왕후가 승려 보우를 중용하고 선교양종의 선과를 설치하려 하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고, 기신재의 시행도 적극 반대하였다. 그뒤 충청도관찰사를 거쳐 예조·이조·호조·병조의 참의를 역임한 뒤 좌부승지가 되었다 그는 4조(四朝)에 걸쳐 벼슬하였으며, 언관(言官)으로서 활발한 언론활동을 전개하였다.

경섬(慶暹) 칠송공파 파조 경혼의 손자로 진주사(중국에 주문을 갖고 가는 사신)의 서장관으로 명나라를 다녀와서 남원 부사를 지내고, 홍문관교리로서 통신사 여우길의 부사가 되어 일본에 건너가 임진왜란 후 첫번째 사절로 단절된 국교를 다시 열게 하였으며 임진왜란 때의 포로 1340명을 데리고 돌아와 외교적인 공적을 쌓았다 1618년(광해군 10)호조참판이 되고, 이듬해 장례원행판결사가 되었다. 학문이 뛰어나 삼사의 요직을 두루 거치고 부제학과 호조참판에 이르렀다.

경선행(慶善行) 1616(광해군 8) 조선시대의 수학자. 그는 활인서(活人署)의 별제로 사회에 널리 알려진 산학자(算學者)였다. 김시진의 《산학계몽》 중간본의 출간에 있어서는 국초 인본을 입수하여 간행하였는데, 그 서문에는“지부회사(地部會士)였던 경선행이 파손된 부분을 본래의 모습대로 바로잡았다.”는 기록이 있다. 또, 최석정의 《구수략》에는 “동국(한국)의 대표적인 수학자”로 기록하고 있으며, 조선산학자들의 약력을 소개한 《주학입격안》에도 그에 관한 기록이 나와 있다. 전형적인 중인출신 산학자로서 그가 저술한 산서(算書) 중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은 《묵사집 》뿐이다.

경취(慶 ) 신강공파 파조 1653년(효종 4)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성균관학정으로 재직중 1656년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60년(현종 1)지평이 된 뒤 겸춘추·정언·호남경시관을 거쳐 장령이 되었다. 1667년 사은 겸 진주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어서 다시 정언이 되었으며 장령·승지 등을 거쳐, 1676년(숙종 2)경기도관찰사가 되었고, 1678년 충청도관찰사로 전직하였으며, 그뒤 도승지·판결사등을 역임하였다.

경구(慶구) 1712(숙종 38) 조선 후기의 의관 1735년(영조 11)에 증광의과에 합격하여 영조조에 수의(首醫)가 되었다. 그뒤 현령·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경권중(慶權重) 일제 침략시 의병장, 1907년 고향(충북 괴산)에서 의병을 모아 구례·곡성 등지에서 일본군과 싸웠고, 1919년 3·1 운동 때는 선봉에 섰다가 체포되어 옥사했다.

항열
16세(상,휴:祥 休) 17세(성,래:聖,來) 18세(시,선;時 善) 19세(래,이:來 履) 20세(대,성:大 星) 21세(재,再) 22세(중,重) 23세(석,錫) 24세(호,浩) 25세(기,수:箕 秀) 26세(현,문:顯 文) 27세(규,광:奎 匡) 28세(구,윤:九 允) 29세(제,용:濟 濬) 30세(근,식:根 植) 31세(보,익:晋 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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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꼴라기 | 작성시간 06.04.25 허거걱...이런걸 어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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