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무명(無明)이 있어서 고(苦)가 있다’ 하고 끝내면, ‘너희는 무명 존재니까 만날 윤회나 하라’는 소리가 되지 않습니까? 그러면 십이연기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만날 윤회만 하는 것이 그 전부라면 십이연기는 있으나 마나지요. 문제를 제기했으면 그와 동시에 그 해결 방안까지도 제시해야 참 가르침이 되지 않겠습니까. 십이연기 순관(順觀)이 고(苦)를 만들어내는 연쇄과정이라면 연기법 안에 그것을 멈출 방법이 담겨 있어야 마땅합니다. 이런 연쇄 과정을 멈추는 것이 십이연기 역관(逆觀)입니다.
노사(老死)가 없으려면 생(生)이 없어야 된다.
생이 없으려면 유(有)가 없어야 된다.
유가 없으려면 취(取)가 없어야 된다.
취가 없으려면 애(愛)가 없어야 된다.
애가 없으려면 수(受)가 없어야 된다.
수가 없으려면 촉(觸)이 없어야 된다.
촉이 없으려면 육처(六處)가 없어야 된다.
육처가 없으려면 명색(名色)이 없어야 된다.
명색이 없으려면 식(識)이 없어야 된다.
식이 없으려면 행(行)이 없어야 된다.
행이 없으려면 무명(無明)이 없어야 된다.
이것이 십이연기의 역관입니다.
부처님이 설하신 사성제는 십이연기(十二緣起)와 팔정도를 양축으로 하고 있으며 이 둘은 사실상 하나의 체계입니다. 십이연기를 순관하면 고성제, 집성제입니다. 그리고 십이연기를 역관하면 멸성제, 도성제입니다. 도성제는 곧 팔정도입니다. 결국 십이연기는 고(苦)의 발생과 고의 소멸과정 모두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달리 말하면 ‘십이연기는 알아야 할 그 무엇을 아는 체계이고, 팔정도는 행해야 할 그 무엇을 행하는 체계이다’라는 말이 될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알아야 할 것과 행해야 할 것을 모두 말씀하셨기에 마침내 부처님은 ‘나는 고와 고의 멸을 말할 뿐 달리 다른 말은 하지 않는다’고 명확히 말씀하실수 있으셨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