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약화·소멸시켜야 할 처(處), 살려야할 근(根)
자, 이렇게 되면 고(苦)와 고의 멸을 연결하는 논리적 고리가 필요하게 되겠지요. 이는 말을 바꾸면 고(苦)를 발생시키는 십이연기 순관을 고를 소멸시키는 십이연기 역관으로 전환하는 것이 중요한 사안이라는 겁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요? 어쩌면 십이연기 열두 항목 자체에 그 열쇠가 숨어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그 중 어디를 어떻게 파고들어야 고를 없애는 열쇠를 찾을 수 있을까? 무명이 있어서 행(行)이 있는데 어떻게 무명을 없애서 행이 없는 상태를 만들 수 있는가? 무명 존재인 우리가 무명에 곧바로 손을 쓸 수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무명 존재가 아니라는 얘기가 되는데 이는 논리적으로 모순 아닌가? 또 식(識)이 명색을 가지고 노는데 명색인 우리가 식에다 직접 손댈 도리가 있을까?
하여튼 십이연기 순관이 십이연기 역관으로 바뀔 수 있는 장치는 반드시 십이연기 그 자체 내에 있어야 합니다. 담마라면 모름지기 자체 완결성이 갖춰져 있어야 하니까요. 십이연기에서 그 길을 찾지 않고 단지 앉아서 정(定)을 닦거나 고행을 한다고 해서 해탈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부처님이 나오실 필요도 없고 담마를 설하실 필요도 없었다는 얘기가 됩니다. 정을 닦는 사람이 없어서 부처님이 나오신 것도 아니고, 고행하는 사람이 없어서 부처님이 나오신 것도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너무나 많았지요. 그토록 모두가 노력을 했건만 시행착오의 연속일 뿐, 해탈·열반은 요원하기만 했습니다. 그런 노력으로는 오히려 해탈·열반을 왜곡시키고 엉뚱한 길로 가버리는 결과만 초래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도리어 탐·진·치(貪瞋癡), 삼독심(三毒心)의 씨앗을 뿌리고 있었던 것 아닙니까?
고(苦)를 없애려면 십이연기의 역관이 불가피한데 그렇게 만드는 결정적 계기가 십이연기 그 자체 내에 함장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고(苦)를 벗어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 계기는 다름 아닌 명색과 육처에서 발견됩니다. 그중에서도 핵심은 의(意)입니다. 의는 육처 가운데 의처로 드러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