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이연기에 나오는 모든 항목은 다 없어져야 할 것, 부정적인 것들입니다. 올바른 걸음[정도(正道)]과 그릇된 걸음[사도(邪道)]으로 나누어 볼 때 십이연기 순관으로 전개되는 게 그릇된 걸음입니다. 무명 때문에 행이 있고, 그 행 때문에 식이 있고, 식 때문에 명색이 있고, 명색 때문에 육처가 있습니다. 안·이·비·설·신·의, 여섯 감각기관인 육처가 색·성·향·미·촉·법, 육경을 상대로 매 순간 탐·진·치(貪瞋癡)를 짓고 있으니, 이게 그릇된 걸음입니다.
반면 십이연기를 역관하는 것이 바른 걸음입니다. 《상윳따 니까아야》의 <행도 경 Paṭipadā sutta>에 분명히 못 박혀 있습니다.
무엇이 바른 걸음[정도(正道)]인가 무명이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기 때문에 제행이 소멸하고 제행이 소멸하기 때문에 식이 소멸하고 ……, 이와 같이 일체 고온(苦蘊)이 소멸한다.
이를 바른 걸음이라 한다.
그런데 이 내용이 아함경에는 안 나옵니다. 아함경을 읽을 때는 성급한 단정을 짓지 말고 조심스레 읽어 나갈 필요가 있겠습니다. 아함경을 읽었으니 빠알리 경을 또다시 읽을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식으로 생각한다면 중요한 포인트를 놓칠 위험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요약하면 육처(六處)와 육근(六根)의 차이 역시 이렇게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 기능을 약화·소멸시켜야 할 경우에는 ‘처(處)’를 쓰고, 개발·육성해야할 경우에는 ‘근(根)’을 씁니다. 그러니까 같은 안·이·비·설·신·의도 육처가 될 때는 인간을 탐·진·치, 삼독심(三毒心) 덩어리로 만드는 원흉이 됩니다. 예를 들어 눈과 대경과 안식, 셋의 화합에서 삼독심을 일으키는 나쁜 역할을 할 때는 안(眼)처(處)입니다. 우리가 육처의 기능을 최소화하고, 그로부터 자유로워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가령 우리가 땅에 넘어져 다칠 때, 땅은 나쁜 놈이 되지요. 그러나 일어나려면 역시 그 땅을 짚어야 합니다. 그렇게 짚을 때 땅은 긍정적 기능을 하는 겁니다. 짚고 ‘일어날 때의 땅’, 그때 땅의 긍정적 면은 근(根)의 긍정적 면과 상통한다고 보아도 무난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