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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지환 에세이

임재범 은퇴= 그의 운명

작성자윤지환|작성시간26.01.04|조회수229 목록 댓글 4

임재범이 은퇴한다고 하니 이 글을 쓴다. 사실 20년전부터 쓰려고 하다가 가족이 노발대발해서 안썼다. 연예인 잘못건드려 명예훼손 당하지 마라고 해서다. 가족에게만 한 말을 이제는 쓴다. 
 
임재범의 어린 시절이 불우해서 그가 평생 우울증에 시달렸다고들 말하는데 틀린말이다. 1950-1960년대생 중산층 이상 가정치고 부모가 바람 안피운 년놈들이 없고 첩의 자식이 엄청 많았다. 그의 유년시절은 정신적으로는 불우했으나 돈은 풍족했다. 필자 보다 10배는 잘사는 집 자제였다. 필자 아버지도 중산층 하급 즉 아들 대학 보낼 정도의 상황이었는데도 첩을 두었고 필자 국민학교 때 가정교사로 온 동아대 여대생과 놀아났다. 중산층 이상 가정은 죄다 식모를 두었었고 돈 있는 남자의 자랑이 첩두는 거였다. 국민학교 동기 건우 삼촌은 첩의 자식이었다. 58 년 생이다 조방앞 소방서 맞은편 4층 건물을 건우 아버지가 지었는데 할아버지 유산이다. 첩의 자식이 2명이었는데 건우 아버지는 각자에게 변두리 집 한 채씩주고 자신은 알짜배기에 건물을 지어 1977년부터 세만 받아먹고 살고 있는데 생사는 모른다. 
 
필자 대학 후배도 65년생인데 첩의 자식이다. 부자들의 훈장 첩 만들기는 1970년 이후로 사회적 지탄을 받으니 슬슬 줄기 시작하였다. 간통죄가 해방 후부터 있었으나 실효성이 없었던게 위자료가 형편 없어서다. 1990년대 기준으로 최대가 2천만원 최저가 500만원이다. 당시 연립주택도 5-6천 하던 때다. 해서 여자들이 일단 간통으로 구치소 넣은 뒤 다시 바람피면 재산 얼마 준다는 각서 받고  고소 취하하던가 아님 돈많은 여자들이 남편 버릴 때 쓰는 카드였었다. 간통죄가 제일 활용 많이 되던 때가 2010년 전후하던 시기다. 여자들이 돈을 잘벌자 상호 보복전에 활용하였고 악용이 너무 되자 결국 페지 되었다.
 
임재범은 62년생이다. 다시 말하지만 1950년에서 1965년생들은 한 반에 20-30프로가 본인이 첩 자식이던지 임재범처럼 아버지가 첩을 두고 이복형제가 있던 시절이다. 한 반 인원이 50-60명이었으니 최소 10명은 첩자식이던가 이복형제가 있었다. 임재범의 어린 시절은 불우했다고 할 수 없다. 막말로 부자동네는 죄다 첩을 안둔 놈이 없던 시절이다. 
 
필자가 항상 강조하듯이 유명인 부자에게는 저주가 따른다. 돈에는 항상 뱀이 붙어 다닌다. 막대한 돈을 벌면 인간이 이상해 진다. 박나래 언론보도를 보면 기가막히지 않나? 큰 돈에 따르는 댓가다.
 
필자는 1990년대부터 임재범을 싫어했다. 노래를 잘하는 줄도 모른다. 사실 엄청 잘부른다. ㅎㅎ 싫어한 이유는 노래에 실려나오는 뱀들 때문이다. 즉 저주다. 이는 조용필도 똑같다. 나훈아 노래는 1980년대까지 좋아했었다. 약 20년을 잠적했다가 나오는데 기절할 뻔 했다. 이무기다. 고객인 국악하는 분은 70 이후의 노래가 더 좋다고 한다. 당연히 이무기의 노래니까... 나는 그의 50세 이전 젊을 때가 듣기가 편하다. 
 
임재범이 2000년 초 미국을 돌며 버스킹 하는 예능에 나왔을 때도 티비를 돌렸다. 편집을 했는데도 이상한 행동을 해서다. 이유는 바로 보인다. 사람들은 예술가의 기행이라고 변호를 한다. 사실 연예인들 온전한 사람이 없다. 중국도 지금 최고의 여배우로 우뚝선 조로사 같은 경우 수년간 공황장애를 비롯한 기이한 질환으로 병원치료 받았고 김구라 처럼 정신과 약(마약)먹고 산다고 SNS를 통해 솔직 고백을 하기도 했다. 최고가 된 이유가 뱀신의 축복이다. 동시에 저주다. 우리나라 유명 연예인들도 80% 이상은 약먹고 산다고 보면 된다. 비공식은 주사이모다. 
 
임재범은 신의 선택으로 최고의 가수 중 하나로 인정 받으나 한 1년 히트치면 2-3년 잠수를 탔었다. 1986년 데뷔 후부터 정해진 공식이다. 해서 기획사도 미치고 돌아버린다. 돈 만드는 항아린데 깨진 항아리다. 2001년에 결혼 한 이유도 1년 벌어 3-4년 잠수를 타서 다까먹으니 무슨 결혼이란 말인가? 40세에 결혼 했으나 17년만에 사별했다. 어린 여자로 기억하는데 결혼 할 때도 결혼 생활 불가능이라고 가족들에게 말한 적이 있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결국 거의 10년간 암투병하다가 죽었다. 저주 때문이다. 최민수도 62년생 동갑에 아버지 최무룡이 더 유명해서 결혼을 몇 번이나 했다. 어른들 사이에선 최무룡이 최고 미남이고 그 다음이 신성일이다. 최민수도 똑같은 저주인데 처복이 있어서 그 부인이 지독한 여자다. 뱀들의 공격을 이겨낸 아주 기쎈 여자다. 마구니랑 살면서 돌보고 사는 여자다. 임재범 최민수는 동갑에 똑같은 병을 앓고 있다. 마구니다.
 
정치가를 포함한 유명인들 상류층 치고 저주를 받지 않은 자가 없다. 전세계 공통이다. 큰 돈과 유명세는 반드시 댓가가 따른다. 김성근이 한 말이 있다. 가정사는 그 아내 말고는 아무도 모른다. 남편도 잘 모른다. 다의적 표현인데 이 경우에도 해당한다. 임재범 최민수는 둘 다 단순하고 착하다. 악마는 착한 사람을 더 좋아한다.
 
임재범의 사주는 논하지 않는다. 얼굴만 봐도 다 나왔기 때문이다. 빙의는 운명을 소용없게 만든다. 좋은 운에도 흉한 일이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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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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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아미 | 작성시간 26.01.05 덕분에 조방앞이라는 의미를 알게 되었네요^^
    조방 앞은 조선 후기 동래부 동평면 범천리에 속하였던 동천 하구 지역이었다. 이 지역에 1917년 11월 조선 최초의 근대 면방직 공장인 조선방직이 설립되었다. 조선방직은 범일동 700번지에 자리하였는데, 최초 설립 시에는 공장 부지가 13만 2231.41㎡[4만 평]였으나 1968년 해체 당시에는 26만 4462.81㎡[8만 평]에 달하였다. 건물은 모두 54동으로, 종업원 규모 2,000~3,200여 명에 공장 내에 병원과 기숙사까지 갖춘 최대 규모 공장이었는데, 공장 안으로 철도가 들어가 운송할 정도로 부지가 엄청나게 컸다.

    일제 강점기 조선방직 정문은 지금의 평화 시장 공구 상점 골목 입구에 있었고, 후문은 부산 시민 회관 쪽이었다. 조선방직 정문 앞이 많은 사람으로 붐비면서 자연스레 상점도 늘어나게 된다. 이 때문에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조선방직 앞’이라고 부르고 이를 줄여 ‘조방 앞’이라 하였다.
  • 작성자윤지환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6.01.05 안성기 오늘 오전 사망
    팔자대로 죽었다
  • 작성자jb고스트 | 작성시간 26.01.06 저도 선생님글과 아미님 댓글땜에 조방 이라는 의미를 알게 됐네요
    조방낙지가 어디서 나왔나 했습니다ㅋ
    항상 좋은글 감사드립니다
    늦었지만 새해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세요😀
  • 작성자이룸 | 작성시간 26.01.07 귀한글 잘 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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