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놀
- 잠시 사이, 지기가 술병과 술잔을 들고 알님을 자리에 앉게 한 후 술을 반잔씩 따른다. -
지기 : (술잔을 들고) 이건 우리 두 사람만의 문제는 아니예요.
그렇지 않나요 ?
(술잔을 권하며) 이 시대, 이 사회의 문제,
너무 오래되고 뿌리깊은 ... (술을 마시고 나서)
얼마나 많은 청소년들이, 젊은이들이, 그리고 노인들이 ... 스스로 목숨을 끊고 ...
알님 : 무슨 말인지 이해돼요.
하지만 지기님이 그런 문제로 가슴 아파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나요 ?
지기 : 아뇨, 보고만 있는 거죠.
마치 알님이 자신의 죽음을 보고 있듯이 ... 미안해요 ...
그래서 차라리 미쳤으면 하고 바라는 거죠 ...
그 어떤 무력감 같은 것 ...
알님 : 무력감, 무기력감 ... 그게 뭔지는 알아요.
지기 : 자살은 아니 모든 죽음은 그 어떤 폭력, 눈에 보이건 안 보이건 일종의 폭력의 결과물이에요.
부모 폭력, 형제 자매간의 폭력, 가문과 학벌, 종교적 차별과 폭력, 선생 폭력, 친구, 애인 폭력 ...
은 사회가 차별과 폭력과 잔혹성으로 중독되어 있어요.
너무나 오래되고, 깊어서 이제 일상이 되어버린 것 같은 ...
심각한 전염병에 온 사회가 물든지 오래되었는데도 ...
이제는 그 누구도 그걸 병이라고 보지 않는 ...
마치 김장철에 고춧가루 때문에 눈물이 난 게 당연한 듯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차별과 폭력은 당연한 것인양 ...
일상 생활화 되어버렸어요.
알님 : 그런 생각을 하면서 사는 게 힘들겠네요.
지기 : 아녜요, 힘들기보다는 그냥 아파만 하고 있을 뿐인데요.
(사이, 다시 술을 한 잔씩 따라 알님에게 권하고 자신도 술잔을 높이 들고서)
자, 우리 이제 서로 처음이자 마지막 만나는 사람으로써 한 잔 해요. (술을 마신다)
그리고 이건 정말 중요한 이야기인데 꼭 말씀해 주세요. 네 ?
알님 : 당신은 사람 마음을 묘하게 이끄는 힘이 있나봐요.
하지만 당신을 다 믿지는 말래요.
지기 : 누가요 ?
알님: 내 안의 꼬마, 꼬마 악마가요.
지기 : 와우, 부럽네요. 자신의 분신, 친구 같은 존재잖아요.
알님 : 이상하게 보지 않나요 ?
지기 : 아뇨,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안에 서너 명의 분신을 키우지 않나요 ?
알님 : 자신도 모르는, 아니 잊고 있는 자기도 있을 수 있구요.
지기 : 제가 진짜로 알고 싶은 건요. 알님 !
한마디로 알님을 살게 하는 힘이 무엇인지 그걸 알고 싶어요.
알님 : 살게 하는 힘 ?
죽어야 하는데 살아있게 하는 힘 ?
지기 : 반드시 죽어야 하는 건 아니지만
가족과도 단절하고 그렇게 혼자서 버텨온 오랜 삶 ...
결코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사이) 종교가 있나요 ?
알님 : 없어요.
지기: 믿는 것, 꿈이나 이상 같은 것 ?
알님 : ...... 없어요.
지기: ...... 그럴 줄 알았어요.
알님 : 꼭 알고 싶어요 ?
지기 : ...... (고개를 끄덕인다)
알님 : 난 한번도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어요.
나를 살게 하는게 뭔지... 하지만 지금 떠오르는 건 하나 있어요.
반드시 그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
(사이) 잠깐, 말하면 안된데요, 꼬마가.
지기 : 설득 좀 해봐요. 왜 안된데요 ?
알님 : 모르겠어요.
그 앤, 그냥 명령만 해요.
이유는 따지지 않아요.
하지만 그렇게 강한 목소리는 아니네요.
(사이, 귀를 기울이면서) 뭐지 ? 꼬마가 사라졌어요.
지기 : 말해 줄래요 ?
알님 : 그럼 더 이상 캐묻지 않을 꺼죠 ?
지기 : ...... (고개를 끄덕인다)
- 잠시 사이 -
알님 : (무대 위를 천천히 걸어다니며)
내 가슴 속에는 노을이 한 개 들어와 있어요.
지기 : 노을 ? 저녁놀 아니면 아침놀 ?
알님 : 저녁놀은 싫어요.
슬프고 아파요. 사라지잖아요.
어둠에게 자신을 양보하고 ...
스스로의 운명을 잘 알고 있는 듯이 느껴져요.
마치 붉은 장미가 붉은 색깔에 지칠대로 지쳐서 검붉은 색으로 자신의 절망을 드러내듯,
저녁노을은 그 어떤 비장감을 주어요.
사진은 제자들이 만든 선물
- 평소에도 최헌진 선생님은 소주를 좋아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