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빛 형형하신 최헌진 선생님은 생명굿 마당이 시작되면
무대로 나온 주인공들에게 종종
" 이 년 .. 멋진 년이네.. 재미있는 년이네.... 훌륭한 년이네 ... " 하는 말씀을 하시곤 했다.
처음 그 말씀을 들을때에는 속으로
" 욕을 왜 저렇게 잘하실까 ? ㅎ " 싶었는데
지나고 보니, 그 멘트들은 참가자들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한 최선생님 나름의 배려 섞인 의도셨던 것 같다.
최선생님이 하신 말들 중에서 가장 큰 칭찬은 바로 " 미친년 " 이었다.
그 말 뜻을 자세히 풀어보면,
그 뜻은 자유롭고, 얽매이지 않는 강한 내면의 주권의 힘을 가진 사람을 뜻하는 말이었다.
새벽놀
지기 : 제가, (객석 위쪽을 가리키며) 저기 조명기사 분에게 그 색 조명을 부탁해 볼까요 ?
알님 : 마음대로 하세요.
지기 : (큰 소리로) 어이, 여기 저녁 노을, 황혼녘을 표현해 줄 수 있겠어요 ?
- 잠시 사이, 무대 뒷편에 하얀 스크린이 내려오면서 무대 조명이 어두워진다.
사이, 스크린 쪽으로 황혼녘의 황갈색 조명 빛이 비추어진다. -
지기 : 비슷하나요, 느낌이 ?
알님 : 어두운 건 아닌데 ... 어둡기보다는 짙은, 묽은 ?
- 사이, 황갈색이 더욱 짙어진다. -
알님 : (스크린을 가리키며 지기에게)
왠지 비장한 느낌을 주지 않나요 ?
이제는 떠나야만 하는, 그동안 정들었던 세상을 뒤로 하고 떠날 수 밖에 없는
그 속 깊은 마음이 밖으로 번져나와 온 하늘을 물들이고 있는 ... (사이)
내 마음 때문인가요 ?
눈물이 나려고 하네.
지기 : 이별, 헤어짐, 작별, 사라짐 ... 모두가 그 어떤 필연성들에 의해서 일어나는...
그래서 사람마다 그 느낌은 달라도 공통적으로는 뭐랄까요.
일종의 비극이 ? 아련하고 애틋한 ...
알님 : (고개를 끄덕이며) 하지만 아침 노을은 달라요.
아침놀은 아름다워요.
아니 신비하고 우아해요.
어떻게 같은 하늘, 같은 해일텐데 그렇게 다른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내는지 ...
- 잠시 사이, 지기가 조명실에 손짓하면 스크린에 아침 여명의 빛이 환하게 비추인다. -
알님 : 아니예요, 이건 너무 환해요. (사이) 이것도 아니예요.
- 조명이 여러번 달라지지만 알님은 계속해서 아니라고 말한다. -
알님 : 그냥 됐어요.
비추지 않아도 돼요.
아마 인공적으로는 그 자연스런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어려울 꺼예요.
지기 : 미안합니다.
알님 : 아니예요. 아침, 그 새벽 노을은 이미 내 가슴 속에 들어와 있거든요. (눈을 감으며)
이렇게 눈을 감고 들여다 보면 보여요.
처음 제가 만났던, 그때의 그 황홀했던 모습으로 ... 날 반겨줘요.
노을은 날 아는 것 같아요.
내가 왜 잠을 못 자고, 날이 새기를 기다리며 ...
어스름 밝아오는 동녘 하늘을 눈이 빠지도록 쳐다보고 있는지 ...
나를, 내 마음을 다 알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니 그렇게 ... 몸이 아픈 나를 ...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포근히 감싸 안아 주는 것이겠죠.
지기 : ......
알님 : 아, 그건 마치 하늘만큼 큰 어미 새가 자신의 새끼를 가슴으로 품어 안는 ... 느낌 ...
아니면 그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무한의 사랑으로 날 받아 주고 껴안아 주는 느낌 ...
(사이, 지기를 의식하고) 아마 이런 느낌이 날 살게 해주는 힘이 되지 않았을까요 ?
지기 : 죄송하지만, 그런 느낌의 새벽 노을이 알님에게 처음 들어온 게 언제죠 ?
몇 살 때 ?
알님 : (못 들은 척) 나만 그러는 걸까요 ?
다른 사람들도 다 자기 나름으로 하나 둘씩, 뭔가를 가슴에 담아두고 살아가는 건 아닐까요 ?
지기 : 마음의 옹달샘 같은 것 말이지요.
알님 : 네, 그래요. (사이) 이제 됐죠 ?
저 가도 되는 거죠 ?
지기 : 왜 좀 더 알고 싶고 궁금한 건 물어보아서는 안 돼죠 ?
알님 : 말했잖아요. 내 속에 든 건 아무것도 없다고 ...
지기 : 그건 말이 안 되는 소리예요. 왜냐하면 과거가 없는 사람은 ...
알님 : 난 과거가 없어요, 됐어요 ?
지기 : 진짜 무엇 때문에 그렇게 도망을 다니는지 모르겠군요.
알님 : 도망이라구요 ?
지기 : 그렇지 않나요 ?
낮과 밤이 아니라 새벽녁으로,
삶이 아니라 죽음으로, 가족으로부터, 사회로부터 ...
나아가 모든 사람들... 나까지도 ...
알님 : ......
지기 : (더욱 열성적으로)
무엇보다도 알님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끊임없이 벗어나려고 하고 있어요.
특히 자신의 과거, 어린시절로부터 ...
- 사이, 알님이 천천히 뒷걸음치다가 무대 밖으로 나가는 계단을 향해 걸어간다.
지기가 뛰어가서 알님의 앞을 가로 막는다.
알님이 지기를 피해 걸어간다.
다시 지기가 가로 막는다.
알님이 서자 지기도 선다. -
지기 : 알님, 당신, 이러려고 여기 온 건 아니잖아요 ?
자신이 원하는 답만 알면 다에요. 네 ? 그런 사람이에요 ?
아니잖아요.
당신은 이 곳이 무엇하는 곳이라는 걸 충분히 알고 왔고, 또 이야기를 해주었어요.
정말 고마워요. (객석을 가리키며)
여기 계신 모든 분들도 모두 같은 마음일 것이라고 생각해요.
- 알님이 지기를 밀치고 나가려고 한다.
지기가 알님의 팔을 잡는다.
알님이 차츰 격렬하게 반응하면서 팔을 빼내려고 한다. -
지기 : 제발, 제 말 좀 들어봐요.
알님 : 난 갈꺼야 !
지기 : 안 돼요, 지금 가면 안 돼요.
알님 : 당신이 뭔데 ... 왜 ? 왜 ?
지기 : 좋아요,
이야기를 하죠.
하지만 이 상태로는 어려워요. (사이)
제가 잡은 손을 놓을테니까 도망가지 않겠다고 약속해요.
그리고 (무대를 가리키며) 저기로 내려가 앉아서 말하기로 해요, 네 ?
(사이, 알님을 잡은 손을 놓는다)
- 알님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무대로 내려가서 의자에 앉는다.
지기가 그 뒤를 따른다. -
지기 : 고맙습니다. (자리에 앉는다)
저는 알님을 지키는 알님지기입니다.
말하자면, 모든 알님, 생명의 존재를 귀히 여기고 존중하는
그래서 생명가치를 하찮게 여기는 것들에 대항해서 싸우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 착하거나 자애로운 사람은 아닙니다.
오히려 나쁜 사람, 고집스러운 사람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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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희곡 내용은 대략 이렇게 지기와 알님 사이의 대화가 진행되고 있는 것 같다.
알: 나는 새벽 노을 생각만 하면 마음이 편해져요.
그건 그냥 예쁜 장면이에요.
지기: 그 노을, 언제 처음 본 거예요?
그때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요.
그냥 아름다우면 되는 거죠.
지기: 그런데 왜 그렇게 딱 “그 느낌 ” 만 남아 있을까요?
이야기나 기억은 없고요 ??
알: 이야기로 만들면 그 느낌이 깨질 것 같아요.
그냥 이대로 두고 싶어요.
지기: 그러니까 그 기억을 건드리면 힘들어질까 봐,
일부러 “예쁜 이미지” 로만 붙잡아 둔 건가요 ?
알: … 그냥 그렇게 두는 게 안전해요.
그 안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아요.
지기: 그럼 이 노을은 당신을 살게 하는 걸까요,
아니면 어떤 아픈 기억을 못 보게 막아주는 걸까요?
알: 저는 몰라요. 그냥…
이건 제 안에 있는 유일하게 따뜻한 거예요.
하지만 알이 마음에 품고 있는 노을을 역할로서
무대에 세워보면 어떨까 ?
즉, 알님과 노을이 대화하게 하는 것이다.
참고 : 아래 내용은 원작 희곡에 대한 해석이라기보다,
사이코드라마의 관점에서 장면을 다른 방식으로 이해해보고 경험해본 개인적인 시도입니다.
무대 위에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 “노을의 자리” 로 설정된다.
지기: 여기는 당신이 말한 그 노을이 있는 자리입니다.
그 노을은 지금 ‘하나의 존재’ 로 여기 있습니다.
(알을 바라보며)
알님, 이제 그 노을을 “보는 것” 이 아니라
“만나는 것” 입니다.
(사이)
알님, 그 노을에게 말을 걸어보시겠어요?
알님: (망설이다가)
…… 너는 거기 있니 ?
노을 : 있어.
(짧은 침묵)
알님: 너는 왜 그렇게 내 안에 남아 있어 ?
노을 : 나는 남아 있는 게 아니라,
네가 나를 계속 부르고 있었던 거야.
알님: 나는 너를 놓고 싶었던 걸까?
노을 : 아니.
너는 나를 놓을 준비가 안 된 게 아니라,
나 없이도 서는 방법을 아직 몰랐던 거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