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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나눔

낡은 수건을 벗고, 비폭력의 예수를 마주하라

작성자조해강|작성시간25.12.20|조회수18 목록 댓글 0

낡은 수건을 벗고, 비폭력의 예수를 마주하라

 

 https://youtube.com/shorts/VgIRVbXsIxU

 

여러분, 시인 예이츠는 탄식했습니다. “우리는 환상으로 심장을 먹여 왔고, 그 먹이 때문에 심장은 잔인해졌네.” 오늘 우리는 이 문장과 함께, 존 도미닉 크로산이 그의 저서 『하나님과 제국』에서 던진 예언자적 질문을 마주해봅니다. 우리의 신앙은 혹시 우리를 잔인하게 만들고 있지는 않습니까?

 

[간디의 용서와 더 큰 범죄]

1948년, 인도의 성자 간디는 종교 극단주의자의 총탄에 쓰러졌습니다. 그 찰나의 순간에도 간디는 이마에 손을 얹으며 암살자를 용서한다는 몸짓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인도 정부는 나중에 그 암살자를 교수형에 처했습니다.

 

크로산은 이를 두고 선언합니다. 그 교수형은 간디가 자신의 암살보다 더 큰 범죄라고 여겼을 법한 행위였다.” 평생 비폭력을 가르친 스승의 삶을 다시 ‘폭력’으로 응징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스승의 정신을 살해하는 신학적 범죄이기 때문입니다.

 

[대속 신앙이라는 환상]

이것은 우리 기독교의 ‘대속 신앙’을 향한 거울입니다. 전통 신학은 하나님이 인류의 죄 값을 받기 위해 아들을 제물로 삼으셨다고 가르쳐왔습니다. 하지만 크로산은 묻습니다. 하나님이 간디만도 못한 존재입니까? 피를 보고서야 화를 푸는 분입니까?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피의 보복’을 통해서만 정의를 세우는 분으로 믿는다면, 우리는 제국의 폭력적 논리를 하나님의 성품으로 둔갑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이츠가 말한 ‘심장을 잔인하게 만드는 환상’입니다.

 

[바울이 말한 ‘수건’을 벗으라]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3장에서 영적 무지에 갇힌 상태를 ‘얼굴에 수건을 쓴 것’에 비유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가 쓴 수건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죄를 지었으니 누군가 피를 흘려 벌을 받아야 한다”는 ‘율법주의라는 베일’, 그리고 ‘응징과 보복이라는 제국의 베일’입니다.

이 낡은 수건은 우리의 눈을 가려, 십자가 위에서 “저들을 용서하라”고 외치시는 비폭력의 예수를 보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바울은 선포합니다.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우리가 이 징벌적 신학의 수건을 벗어 던질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이 피를 원하는 분이 아니라, 폭력의 연쇄를 끊으시는 ‘평화의 하나님’임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한국 교회의 근본적 개혁]

이것은 단순한 신학 논쟁이 아닙니다. 북한을 향해 ‘징벌적 기도’를 드리고 폭력을 정당화하는 우리 안의 극우적 신앙은, 여전히 하나님을 제국의 통치자로 오해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제 우리는 개혁되어야 합니다. 예수는 우리 대신 벌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보여주기 위해 죽음을 불사하며 사셨습니다. 우리의 역할은 그 죽음 뒤에 숨어 죄 용서를 쇼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걸었던 그 위험한 비폭력의 삶에 직접 참여하는 것입니다.

 

[클로징] 수건을 벗고 주님을 보십시오. 징벌이 아닌 회복을, 증오가 아닌 평화를 꿈꾸십시오. 우리가 쓴 제국의 수건을 벗을 때, 비로소 이 땅의 평화와 통일의 길도 열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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