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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나눔

십자가의 의미를 새롭게 해설하다 - 존 도미닉 크로산

작성자조해강|작성시간25.12.29|조회수46 목록 댓글 0

📽️ 제1부: 하나님은 정말 ‘판사’일까? (대속 신앙의 재구성)

 

https://www.youtube.com/shorts/yPMdXPgBjdI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보며 우리는 무엇을 느꼈나요? 채찍에 찢기는 육체와 처절한 비명을 보며, 많은 그리스도인은 깊은 죄책감과 동시에 공포를 느꼈습니다. 그리고 당연한 듯 믿어왔죠. “우리의 죄 때문에 하나님이 진노하셨고, 그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독생자가 저 매를 대신 맞아야만 했다.”

 

이것이 우리가 배운 ‘대속적 속죄’의 풍경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법정에 앉아 죄의 무게를 다는 차가운 ‘심판관’으로 묘사됩니다. 마치 인간 판사가 기소된 죄인을 그냥 돌려보낼 수 없듯, 하나님도 누군가의 피를 대가로 받지 않고는 우리를 용서할 수 없는 분처럼 그려집니다.

 

하지만 잠시 멈춰 질문해 봅시다. 정말 하나님이 그런 분일까요?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의 가장 본질적인 이름은 심판관이 아니라 ‘아버지’입니다. 인류의 법정에서도 아버지가 자기 자녀를 재판하게 되면, 그는 판사석을 내려와 변호인석에 앉거나 자녀를 부둥켜안습니다. 우리는 한 존재가 동시에 ‘냉혹한 심판관’이자 ‘무한한 사랑의 부모’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 속에 자리 잡은 ‘분노하시는 하나님’은 사실 인간이 만든 응보적 정의의 그림자일지도 모릅니다. “피에는 피, 벌에는 벌”이라는 세상의 논리가 거룩한 하나님의 얼굴을 가려버린 것이죠. 예수가 보여준 하나님은 우리를 벌하기 위해 벼르는 분이 아니라, 집 나간 자녀를 마중 나가기 위해 신발도 신지 못한 채 달려 나오는 아버지였습니다.

 

그렇다면 예수가 짊어진 그 참혹한 십자가의 고통은 대체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이 정말 하나님의 노여움을 가라앉히기 위한 형벌이었을까요? 아닙니다. 우리는 ‘희생’이라는 단어를 다시 정의해야 합니다. 십자가는 형벌의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끊어진 우정을 잇기 위해 준비된 거룩한 식탁의 시작입니다. 다음 편에서, 그 ‘거룩한 식사’의 신비를 풀어보겠습니다.

 

 

 

📽️ 제2부: 희생은 잔치가 된다 (선물, 식사, 그리고 소방관)

 

https://www.youtube.com/shorts/xwTu9vPPhb4

 

여러분은 ‘희생’이라는 단어에서 무엇을 보시나요? 아마도 끔찍한 피 흘림이나 고통스러운 죽음을 떠올리실 겁니다. 하지만 그건 ‘희생’의 껍데기일 뿐입니다. 희생의 라틴어 어원인 ‘사크룸 파케레(Sacrum Facere)’는 전혀 다른 세계를 가리킵니다. 그것은 바로 “거룩하게 만든다”는 뜻입니다. 고통이 본질이 아니라, ‘거룩함’이 본질입니다.

 

고대인들에게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법은 의외로 우리 삶과 닮아 있었습니다. 바로 ‘선물’과 ‘식사’입니다. 가장 귀한 것을 드려 마음을 표현하는 ‘선물’, 그리고 주인이 손님을 초대해 우정을 나누는 ‘식사’. 동물 제사는 이 두 가지가 만나는 가장 거룩한 예식이었습니다.

 

여기서 N.T. 라이트의 놀라운 통찰을 더해볼까요? 그는 제단의 피가 ‘죽음’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오염된 세상을 닦아내는 강력한 ‘생명의 에너지’라고 말합니다. 왜 닦아낼까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식사’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다시 우리 가운데 임재하실 수 있도록, 피라는 생명의 비누로 우리 사이의 오염을 씻어내어 거룩한 식탁을 준비하는 과정이 바로 제사였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사례로 이 신비를 풀어봅시다. 불길 속에서 아이를 구하고 숨진 소방관의 죽음을 우리는 ‘희생’이라 부릅니다. 왜일까요? 그분이 즉사해서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면 희생이 아닐까요? 아닙니다. 그 죽음이 희생인 이유는, 자신의 생명을 내놓아 타인의 생명을 살린 그 ‘사랑의 선택’이 그 죽음을 세상에서 가장 특별하고 거룩한 사건으로 격상시켰기 때문입니다. 희생은 형벌이 아니라, 가장 소중한 것을 내어줌으로써 삶을 거룩하게 빚어내는 행위입니다.

 

결국, 십자가 위의 예수는 하나님의 화를 가라앉히기 위해 벌 받는 죄인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는 우리를 하나님과 다시 만나게 하려고 자기 자신을 기꺼이 ‘선물’로 내어주신 분입니다.

 

그분의 피는 우리를 정죄하는 흔적이 아니라, 하나님이 당신을 다시 식탁으로 초대하실 수 있도록 우리 삶의 얼룩을 닦아내는 생명의 물입니다. 십자가는 도살장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류를 향해 차려내신 가장 거룩한 우정의 잔치입니다.

 

 

 

📽️ 제3부: 십자가, 문명의 폭로 (예수가 죽은 진짜 이유)

 

https://www.youtube.com/shorts/0z6CZ88np6U

 

 “예수는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 이 익숙한 고백 앞에서 우리는 때로 혼란에 빠집니다. 마치 하나님이 예수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죠. 하지만 존 도미닉 크로산은 이 문장을 혁명적으로 고쳐 읽습니다. 예수는 우리의 죄를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죄 때문에(Because of our sins)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하나님의 손이 아니라, 인간 문명이 가진 잔혹한 폭력이었습니다. 힘으로 평화를 유지하려는 ‘세상의 방식’이, 하나님의 비폭력적인 사랑을 실천하던 예수를 위험분자로 간주하고 처형한 것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잔인함을 보여주는 도구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세상의 질서가 얼마나 추악하고 폭력적인지를 만천하에 폭로하는 거대한 거울입니다. 그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끝까지 사랑과 용서를 포기하지 않으신 예수의 선택이, 처형의 틀이었던 십자가를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희생’으로 변화시켰습니다.

 

이 십자가를 들고 바울은 로마 제국 한복판으로 나갔습니다. 로마의 황제가 외치던 “폭력을 통한 평화”에 맞서, 예수의 “정의를 통한 평화”를 선포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여전히 힘과 폭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세상의 방식을 따르겠느냐, 아니면 고통 속에서도 사랑을 선택하여 삶을 거룩하게 빚어내는 하나님의 방식을 따르겠느냐?

 

십자가는 우리가 대신 벌 받았다는 법정의 기록부도, 하나님께 바친 뇌물도 아닙니다. 인간의 폭력이 만들어낸 깊은 상처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덮어버린 ‘거룩한 초대장’입니다.

 

이제 공포와 죄책감이 가득한 차가운 법정에서 걸어 나오십시오. 아버지가 당신을 위해 사랑의 식탁을 차려놓고 당신의 이름을 부르고 계십니다. 십자가는 형벌의 끝이 아니라, 당신과 함께 식사하고 싶어 하시는 아버지의 간절한 환대입니다.

당신이 믿는 하나님은 여전히 판사입니까, 아니면 당신을 식탁으로 초대하는 아버지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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