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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나눔

십자가의 죽음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 본다

작성자조해강|작성시간25.12.30|조회수23 목록 댓글 0

십자가의 죽음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 본다

 

https://www.youtube.com/shorts/wlbL1_X0LxM

 

 

2024년도에 개봉한 영화 파묘가 있다. 그 영화에서 한국의 무속과 일본의 무속에 대하여 비교하는 대목이 있었다. 한국의 무속은 억울하게 죽은 귀신의 한을 풀고 상생을 도모하는 해원상생을 목표로 한다면, 일본의 무속은 원한을 신격화하여 모심으로 신의 분노를 가라앉히는 방식이다. 무속인들은 굿을 통하여 원혼의 억울한 사정을 들어주고 정성껏 음식을 대접하여 달래서 저승으로 보내는 일종의 심리상담과 같은 역할을 한다.

 

기독교의 희생제사를 상징하는 십자가는 어떤 의미일까? 구약성경을 보면 이스라엘의 제사에서도 짐승이 제물로 바쳐진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죽음을 화목제물로 설명한다. 그러면 성경에서 말하는 제사는 어떤 의미일까? 그리고 그 모든 제사를 완성하고 종결하는 의미에서 십자가는 어떤 의미일까?

 

전통적으로 십자가는 대속의 죽음으로 이해되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으므로 우리는 죄 사함을 받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이 어떻게 우리와 하나님의 화목을 이루는 것일까? 그 중심에는 죄가 있다. 일반적으로 신자들은 하나님을 공의로우신 분으로 믿는다. 그렇기에 죄를 지은 사람에 대하여 하나님은 심판하실 수밖에 없는 분이라고 생각한다. 죄인이 받을 심판과 형벌을 예수님이 대신 받으셨으므로 그 죄인은 이제 하나님 앞에 의인이 되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구원이라는 설명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최근에 나는 도미닉 크로산의 책, ‘하나님과 제국’을 읽었다. 거기서 크로산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전통적인 설명방식을 비판하며 새로운 설명을 제시한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은 무서운 심판자라기보다는 자비로운 아버지와 같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누군가 잘못한 사람에게 반드시 벌을 주셔야 직성이 풀리시는 분이 아니라 잘못한 아들을 발벗고 달려와 맞아 주시는 아버지와 같은 분이시다. 그것이 예수께서 소개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다.

 

그렇기에 십자가를 형벌과 대속으로 설명할 때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우리는 기독교의 하나님을 깊은 원한을 가진 분으로 잘못 그릴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기독교 신앙은 매우 기괴한 무속신앙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즉, 자비와 용서의 종교가 아니라 처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무자비한 종교가 될 수도 있다는 의미다. 실제로 기독교 역사를 되돌아보면 그런 무자비한 행동들을 정당한 것으로 이해되던 때가 있었다. 미국의 소설 ‘주홍글씨’는 청교도들의 그런 숨막히는 신앙전통을 고발한다.

 

하나님은 공의와 사랑의 하나님이시므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동시에 만족되었다는 식의 설명은 존 스토트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래로 신앙인들에게 상식처럼 자리잡은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 말은 뜨거운 아이스크림처럼 모순이다. 한 사람이 가혹하면서 동시에 자비롭다면 결국 그는 가혹한 사람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도미닉 크로산은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십자가와 구약성경의 제사를 새롭게 해석한다. 크로산에 따르면, 성경의 제사제도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새롭게 시작하거나 발전시키고 회복시켜야 할 경우에 필요한 것이다. 거기에는 ‘선물’과 ‘식사’가 필요하다. 사람 사이에도 이 두 가지가 관계를 돈독하게 하는 매개와 수단이 된다. 여기서 선물이라 함은 제물을 의미하고, 식사라 함은 그 제사를 드리고 나서 하나님 앞에서 함께 먹는 것을 의미한다.

 

출애굽기를 보면,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그 기념으로 제사를 드릴 때 제물을 잡고 하나님 앞에서 칠십인의 장로들이 먹고 마셨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바로 그 그림이 이스라엘의 제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보여준다. 제사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돈독하게 하고 회복되었음을 보여주는 외적인 표현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가 화목하게 되었음을 나타낸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한 화목제물이 되셨다는 말이 이런 의미다.

 

나는 엊그제 가족과 함께 1박2일의 송년회를 치렀다. 서울 근교에 있는 펜션에 모여 선물을 나누고 식사를 하면서 한 해를 돌아보았다. 그 모임을 통해서 그 동안 소원했던 관계를 다시 복구하고 마음을 나누며 유쾌한 시간을 보냈다. 그 선물과 그 식사들을 준비하기 위해서 우리는 희생을 치렀다. 하지만 그것으로 말미암아 우리 가족의 관계를 더욱 돈독해졌다.

 

예수님의 죽음이 희생제물로 바쳐진 것은 하나님의 노여움을 풀기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소원해진 관계를 다시 회복하는 희생이었다. 인간의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멀어지게 한다. 죄는 일종의 오염으로서 생명의 피가 그것을 닦아내서 우리를 정결하게 한다. 사랑이 두려움을 이기듯이 생명이 죽음을 몰아내는 것이다. 그렇게 피의 제사가 우리의 땅을 정결하게 하고 그 거룩한 곳에 하나님이 임하시고 다시 우리는 하나가 된다. 그렇게 인간과 하나님은 화목을 이루고 관계는 돈독해진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제물은 그것을 바치는 사람의 죄를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제물이 흘린 피가 제단을 정결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크로산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인과적 보응의 의식이 성경의 제사를 오해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달래는 방식이라고 설명하하게 되었다고 진단한다. 그리고 그런 설명방식이 하나님을 무서운 심판자로 오해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크로산이 말하는 하나님의 공의는 ‘잘못한 만큼 때리는 응보적 정의(Retributive Justice)’가 아니라, ‘깨어진 관계를 바로잡는 회복적 정의(Distributive/Restorative Justice)’하고 할 수 있다.

 

크로산은 이 대목에서 비유를 제시한다. 불이 나서 2층에 갇힌 어린 아이를 구하기 위해서 소방관이 불길을 뚫고 건물로 진입한다. 마침내 아이를 구출하여 2층에서 아래의 소방그물로 던진다. 아이가 구출되는 그 순간 건물이 붕괴되어 그 소방관은 순직한다. 이 소방관의 죽음을 우리는 거룩한 희생이라고 부른다. 그의 죽음이 아이를 건지고 그의 부모에게 돌려주었기 때문이다.

 

크로산은 여기서 우리가 이 일을 설명하는 방식에서 그릇된 방식을 취할 수 있음을 지적한다. 즉, 그 소방관의 희생을 누군가가 원했기에 죽었다는 식의 설명이 그것이다. 또한 소방관이 죽을 때 얼마나 오랫동안 가혹하게 고통을 당했는가에 집착하면서 그것을 귀하게 생각하며 기념하는 것도 이상하다는 것이다. 그의 죽음이 거룩한 희생이 되는 이유는 그 희생으로 생명이 건짐을 받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예수님의 죽음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방식을 돌아보자. 예수님은 왜 죽으셨는가? 도미닉 크로산은 이렇게 설명한다:

 

예수는 우리의 죄를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죄 때문에(Because of our sins) 죽으셨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하나님의 손이 아니라,

인간 문명이 가진 잔혹한 폭력이었다.

 

힘으로 평화를 유지하려는 ‘세상의 방식’이,

하나님의 비폭력적인 사랑을 실천하던 예수를

위험분자로 간주하고 처형한 것이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잔인함을 보여주는 도구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세상의 질서가

얼마나 추악하고 폭력적인지를

만천하에 폭로하는 거대한 거울이다.

 

그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끝까지

사랑과 용서를 포기하지 않으신 예수의 선택이,

처형의 틀이었던 십자가를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희생’으로 변화시켰다.

<끝>.

 

아래는 제미나이가 다시 정리한 글이다.

 

십자가의 죽음에 대하여 다시 생각한다

 

2024년 영화 <파묘>는 한국과 일본 무속의 차이를 흥미롭게 다룹니다. 한국 무속이 원혼의 한을 푸는 ‘해원상생’을 목표로 한다면, 일본 무속은 원한을 신격화하여 그 분노를 달래는 방식을 취합니다. 억울한 사정을 들어주고 음식을 대접해 달래 보내는 무속인의 역할은 일종의 심리상담과도 같습니다.

 

이 대목에서 기독교의 핵심인 십자가 희생제사의 의미를 묻게 됩니다. 전통적으로 십자가는 ‘대속의 죽음’으로 이해되었습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죄에 대해 반드시 심판하셔야 하기에, 예수님이 우리 대신 형벌을 받으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었다는 논리입니다.

 

하지만 도미닉 크로산은 그의 저서 <하나님과 제국>에서 이 전통적 방식을 비판합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반드시 벌을 주어야 직성이 풀리는 분이 아니라, 잘못한 아들을 향해 발 벗고 달려오는 자비로운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형벌과 대속으로만 설명하면, 기독교의 하나님을 깊은 원한을 가진 존재로 오해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이는 자비의 종교를 무자비한 응보의 종교로 전락시킬 위험이 있습니다.

 

존 스토트 이래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십자가에서 동시에 만족되었다’는 설명이 상식처럼 통용되지만, 이는 ‘뜨거운 아이스크림’ 같은 모순입니다. 한 존재가 가혹하면서 동시에 자비롭다면, 결국 그는 가혹한 이일뿐입니다.

 

크로산은 제사를 ‘관계의 회복’으로 새롭게 해석합니다. 성경의 제사 제도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새롭게 시작할 때 필요한 ‘선물’과 ‘식사’의 과정입니다. 시내산 언약 제사에서 장로들이 하나님 앞에서 먹고 마셨던 것처럼, 제사는 관계가 회복되었음을 보여주는 외적 표현입니다. 최근 우리 가족이 송년회에서 선물을 나누고 식사하며 소원했던 관계를 회복했던 것처럼, 예수님의 희생 역시 하나님의 노여움을 풀기 위함이 아니라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소원해진 관계를 복구하는 희생이었습니다.

 

여기서 제물의 피는 죄의 대가가 아니라, 죄로 오염된 관계를 닦아내어 하나님이 임하시도록 정결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크로산은 하나님의 공의를 ‘잘못한 만큼 때리는 응보적 정의’가 아닌, ‘깨어진 관계를 바로잡는 회복적 정의’로 보았습니다.

 

그는 이를 순직한 소방관의 비유로 설명합니다. 2층에 갇힌 아이를 구하고 숨진 소방관의 죽음을 보고, “누군가 소방관의 죽음을 원했기에 죽었다”거나 “그가 당한 고통의 양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의 죽음이 거룩한 이유는 오직 ‘생명을 건졌기 때문’입니다.

 

결국, 예수는 우리의 죄를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죄 때문에(Because of our sins) 죽으셨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하나님의 손이 아니라, 힘으로 평화를 유지하려던 인간 문명의 잔혹한 폭력이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잔인함을 보여주는 도구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세상의 질서가 얼마나 폭력적인지를 폭로하는 거대한 거울입니다. 그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끝까지 사랑과 용서를 포기하지 않으신 예수의 선택이, 처형의 틀이었던 십자가를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희생으로 변화시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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