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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나눔

넷플릭스 〈참교육〉을 보고 십자가를 생각하다

작성자조해강|작성시간26.06.20|조회수64 목록 댓글 0

넷플릭스 드라마 〈참교육〉 시청 소감

 

넷플릭스 〈참교육〉을 보고 십자가를 생각하다

 

조해강 목사

 

이틀에 걸쳐 넷플릭스 드라마 〈참교육〉을 시청했다. 10부작으로 제작된 이 드라마를 보면서 교사들의 권리가 얼마나 위태로운 상황에 처해 있는지를 보았고, 학교라는 공간에서 벌어질 수 있는 일들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목격하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처음에는 문제 행동을 하는 학생들을 통쾌하게 지도하는 모습에 열광했고, 교사의 입시 비리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학부모들의 과잉 행동이 어떻게 교사를 위축시키는지를 보며 분노했다. 그리고 학교 안에서 마약과 도박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지 보며 정말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드라마가 현실을 얼마나 반영하는지, 얼마나 많은 학교에서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극 중 사건들의 개연성은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학교는 결국 축소된 사회이기 때문이다.

 

목회자로서 나는 이 드라마를 보는 내내 일그러진 학교의 모습 위로 겹쳐 보이는 교회를 생각했다. 오랫동안 문제가 있었음에도 정면으로 다루지 않고 지내오다가, 이제는 더 이상 손쓸 수 없을 만큼 커져 버린 상황. 그것이 현재 학교의 모습이자, 동시에 교회의 모습이 아닐까 싶었다. 어쩌면 나사렛 예수와 사도 바울도 기존의 사회적 문제를 온전히 인식하고 마주하다가 자신의 삶을 희생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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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십자가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벌어지고 있던 해묵은 문제들에 정면으로 도전한 예수의 삶이 다다른 결론이다. 예수님은 성전 지도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거짓된 행동을 하고 있으며, 그 결과 힘없는 백성들이 착취당하고 있다고 지적하셨다. 하나님이 그 악한 지도자들을 심판하실 것이라고 예수께서는 소리를 높이셨다.

 

사도 바울은 헬라 철학과 히브리 교육에 정통한 사람으로서, 자기 시대에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깨달은 사람이었다. 그는 정통 바리새인으로서 예수 운동이 성전과 율법의 권위를 흔들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다메섹에서의 경험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새롭게 깨달았다. 그가 깨달은 시대적 과제는 자기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 곧 ‘하나님의 경륜’이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를 통해 유대인과 이방인을 하나로 아우르는 공동체를 만드시고, 그 둘이 상생 공존하는 새로운 시대를 여신다고 확신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에게 진실과 자비를 회복하라고 촉구하셨다면, 사도 바울은 온 세상의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한 형제요 가족이며 시민으로 살아가자고 촉구했다. 나사렛 예수와 사도 바울은 자신들이 깨달은 비밀이 곧 예언자들에게 보이신 하나님의 계획이며, 태초부터 예정된 뜻이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그 확신에 자신의 삶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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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참교육〉에서 어떤 부모들은 교육을 오로지 명문대 입학을 통한 출세 수단으로만 이해한다. 사실 이런 생각은 과거부터 대물림된 것이다. 나 역시 중학교 시절, 동창의 아버지가 학교 연단에서 하신 말씀을 지금도 기억한다. 그것은 바로 ‘사당오락(四當五落)’이었다. 네 시간 자면 합격하고 다섯 시간 자면 불합격한다는 그 말씀이 마음에 얼마나 깊이 박혔던지, 책상 앞에 붙여 놓았던 기억이 난다.

 

나의 학창 시절에도 그랬다. 교육은 언제나 출세의 수단이었고, 가문을 위한 보은의 길이었다. 온 가족의 후원과 희생을 뒤로하고 도시에 올라가 공부하는 것 자체로 이미 교육의 목적은 자명했다. 그런데 그런 오래된 관습이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다는 사실이 내 마음속 깊은 아픔을 다시금 끄집어내는 듯했다.

 

내가 고등학교 3학년이었을 때, 서울에 있던 형은 나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희생하는 가족을 위해 공부한다는 부담감을 내려놓고, 네 스스로의 인생을 위해 공부하라”는 내용이었다. 광주에서 그 글을 읽고 조금은 위안을 받았지만, 섬마을과 객지에서 온 가족이 감당하고 있던 희생을 완전히 잊을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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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자신의 환경과 경험을 떠나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없다. 우리들의 생각과 가치관, 판단 기준은 모두 과거의 경험과 현재의 상황에 깊이 연결되어 있다. 그렇기에 교육에 대한 생각도 다를 수밖에 없고, 교회의 존재 목적과 운영 방향에 대해서도 이견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다양한 생각이 모두 옳은 것은 아니다. 어떤 생각은 삶을 갉아먹고 생명을 죽음으로 내몬다. 누가 옳고 어떤 길이 바른지 아는 방법은 명확하다. 바로 ‘생명을 살리는 길이냐, 생명을 죽이는 길이냐’ 하는 것이다.

 

아무리 부모에게 한이 되는 가치와 목적이 있다 한들, 그것이 자식의 생명을 죽이는 일이라면 강요해서는 안 된다. 교회의 운영과 목회 방향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오래된 교리와 전통이 있다 한들, 그것이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가는 일이라면 우리 시대에는 ‘악한 일’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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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무지와 완악한 마음으로 현실을 비틀고 사람들을 억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 악한 행동은 학생들 사이에도 있고, 부모와 기성세대 가운데도 존재한다. 문제가 사람들의 삶을 갉아먹고 있음에도 우리가 잠잠하다면 사태는 더 심각해질 뿐이다. 예수님과 사도 바울로부터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이 바로 이 사태를 바로잡고자 하는 ‘용기’다.

 

드라마를 보면서 예수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만일 너희가 잠잠하면 이 돌들이 일어나 소리를 지르리라!”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나 문제는 있다. 잘못된 행동이 분명한데도 버젓이 그것을 고수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것은 학교에서도, 교회에서도, 우리 사회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구성원들이 그 문제를 인식하고도 잠자코 있다면 상황은 더욱 악화될 뿐이다.

 

기독교의 십자가가 ‘생명’인 이유는, 예수께서 이처럼 생명을 질식하게 만드는 기존의 악습과 관행에 도전하셔서 사람들이 다시 숨 쉬고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열어주셨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예수님의 제자들도 산헤드린이라는 공식 재판정에서 담대히 진실을 증언할 수 있었다. 그 결과 교회는 세상의 생명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오늘날 교회에서 십자가는 일종의 ‘생명의 부적’으로 전락했다. 여기서 말하는 생명이란 오직 내세(來世)의 삶만을 의미하며, 십자가는 그 삶을 보장하는 티켓이 되어버렸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현실의 문제에 도전하여 사람이 살 수 있는 세상을 여는 길이었는데, 오늘날의 교회는 십자가를 죽은 후에나 들어가는 세상을 여는 열쇠로만 생각한다. 그렇기에 기독교의 십자가가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하늘에서 이 상황을 보시면 과연 뭐라고 하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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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참교육〉에서 주인공은 “학교에 오는 목적은 행복해지기 위함”이라고 소리친다. 학교생활을 행복하지 않게 만드는 것은 무엇이든 학생과 교사의 생명을 앗아가는 ‘악’이라고 드라마는 고발한다. 그것은 학부모들의 과잉 행동으로 드러난 탐심이며, 일부 학생들의 무지와 제어되지 않은 망나니 같은 행동이며, 일부 교사들의 비겁하고 은밀한 욕심이다. 그것이 학교 안에 도사린 악의 실체다.

 

2,500년 전 그리스의 비극작가 에우리피데스(Euripides)는 “나쁜 시작이 나쁜 끝을 낳는다”라고 말했다. 이 말을 긍정적으로 바꾸면 ‘시작이 좋으면 끝도 좋다’가 되겠지만,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나쁜 시작’이 존재한다. 예수께서는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하셨다(마태복음 7:18). 여기서 말씀하신 ‘나쁜 나무’는 뿌리가 부패하여 문드러진 나무를 뜻한다.

 

헬라어로 ‘나쁘다’를 뜻하는 일반적인 형용사는 ‘카코스(kakos)’다. 하지만 본문에서 사용된 ‘나쁜 나무’의 형용사는 ‘사프로스(sapros)’이다. 이 단어는 고름이 차서 썩어가는 상처, 혹은 상해서 악취가 나는 생선이나 고기를 표현할 때 쓴다. 즉, 예수님이 말씀하신 ‘나쁜 나무’는 마음의 동기 자체가 부패한 사람을 가리킨다.

 

부패한 마음(sapros)을 가진 학생은 학교를 어지럽히고, 썩어 문드러진 마음을 가진 교사는 억울한 학생들을 양산한다. 악취가 나는 마음을 가진 부모는 자기 자녀와 교사들에게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준다. 그 마음을 고치지 않는 한 학교에서 ‘참교육’을 실현하기는 어렵다. 그 마음을 치료하지 않으면 교회 역시 생명의 터전이 되기 어려울 것이다. 좋은 시스템과 제도는 결국 ‘좋은 마음’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마음을 어떻게 가꾸고 다듬을 수 있을까? 그것이 참교육의 시작이자, 오늘날 교회가 다시 찾아가야 할 길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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