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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감상 – 부러진 화살, 2012, 정지영 감독

작성자조해강|작성시간21.03.09|조회수122 목록 댓글 0

영화 감상 – 부러진 화살, 2012, 정지영 감독

 

거의 십년이 지나서 다시 찾아본 영화다. 김명호 교수가 판사를 찾아가서 바르게 판결을 하라는 경고를 주려고 했는데 그 일이 석궁테러라는 이름으로 둔갑되어 재판을 받게 된 이야기다. 이 영화는 사법부의 부당함을 고발하려는 의도로 만들어졌다. 이런 양심적이고 정의감에 불타는 사람들의 노고를 통해 지금 대한민국은 정의와 공정의 문제가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권력을 부당하게 행사한 사람들은 탄핵을 받아 공직에서 물러난다. 여성의 인권을 유린한 사람들은 온 국민의 지탄을 받아 명예와 직위를 상실한다. 공직자로서 알게 된 정보를 이용하여 사적인 이익을 추구한 사람들에게 무거운 책임과 형벌을 요구하고 있다. 비록 어린 시절이라도 남을 괴롭게 한 사람은 성인이 되어 공인으로 나설 수 없다. 많은 이들을 열광하게 하고 영향을 주는 정보를 제공하는 사람들이라도 거짓말이 들통나는 날이면 하루 아침에 외면을 받으며 사과와 함께 퇴장을 해야 한다.

 

전에 포도청이 있었다. 전에 보안사나 안기부 같은 곳이 있었다. 전에 이런 말이 있었다: “조사하면 다 나온다!” 그런데 지금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는’(누가복음 12:2) 세상이 되었다. 지금 시대는 정의와 공정을 요구한다. 아무도 나를 건들 수 없고 누구도 나의 일에 간섭할 수 없다는 확신을 가진 사람들이 은밀한 가운데 행한 일들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있다.

 

LH공사 직원들이 신도시 개발지역의 땅을 미리 사두었다는 땅투기 의혹을 받고 있다. 이에 정부는 정권의 명운을 걸고 이를 발본색원하겠다고 적폐청산의 검을 벼르고 있다. 검찰개혁도 시대적 과제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언론개혁, 사법개혁도 통제되지 않아 자기 멋대로 불의를 일삼은 사람들에 대한 불의와 불법을 바로잡고자 하는 민심의 요구 앞에 불이 붙고 있다. 이 심판의 불이 어디에서 시작된 것일까?

 

사람들은 전부터 검사나 판사, 또는 기자나 언론사를 장악한 사주들로부터 억울한 일을 당해왔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들불처럼 번지는 정의와 심판의 불은 어디에서부터 발화한 것일까? 어쩌면 이 시대적 요구는 불의에 맞서서 싸우다가 자신의 몸을 다치고 명예와 재산을 잃고 죽어간 사람들의 피가 땅에서부터 부르짖어 사람들의 마음에서 불길로 다시 살아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영화 ‘부러진 화살’의 주인공이 사법부에 던진 진실에 대한 요구의 탄원은 판사들에 의해 무시되어 마치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처럼 사방으로 흩어져 없어진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소리는 이렇게 새로운 날을 여는 나팔소리에 합주된 것은 아닐까?

 

본래 개혁이라는 말은 종교개혁에 사용되었다. 종교를 개혁하려는 선한 일꾼들의 몸부림이 있었다. 어떤 이들은 진실을 말하다가 화형을 당했고, 어떤 이들은 옥에 갇혔으며, 공직에서 파면되기도 했다. 사람들은 그들에게 너무 일찍 핀 꽃처럼 시대를 너무 앞서갔다고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그들의 수고와 희생이 모아지고 쌓일 때 마침내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그 강력한 폭음으로 종교계에 개혁을 명령했다. 그리고 진리에 대한 관심이 성경번역과 발행으로 이어졌고, 미신적 신앙에 기대어 음습하게 자라던 관행들이 청산되었다. 그리고 그 힘은 사회 전반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고자 하는 이상으로 이끌어 갔다. 그렇게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그 시대를 열어갈 무리가 탄생했다. 그것이 500년 전에 있었던 종교개혁이었다.

 

미얀마는 지금 군부독재와 사투를 벌이고 있다. 40년 전 우리나라도 그랬다. 우리 선배들이 거리에서 소리를 높이며 외친 민주화의 염원이 오늘날 우리에게 더 투명하고 더 정의로운 사회를 이루고자 하는 세상을 열어주었다. 아직 싸늘하고 황량한 들판에서 봄이 오는 소리를 듣고 여름의 울창한 숲과 가을의 풍요로운 들판을 꿈꾸던 선각자들의 ‘너무 이른’ 외침과 행동 덕택에 우리 사회는 이만큼 발전했다. 그들이 용기를 내지 않았다면 우리도 지금 독재자들의 군홧발에 채이고 있지 않을까?

 

우리 시대가 과제로 인식하는 문제는 점점 그 범위가 넓어지고 있다. 우리는 지금 국가 전체를 작은 마을처럼 느끼고 있다. 그리고 지구촌 전체의 문제도 점차 우리에게 익숙한 일이 되어간다. 이렇게 지구적으로 공동대처해야 할 과제를 풀기 위해서 종교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미로슬라브 볼프는 그의 책에서 전망했다(인간의 번영, 124쪽). 종교적 신념에 기초한 행동이 전 세계적으로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에 희망을 둔 것이다. 하지만 종교가 진리를 추구하여 참됨과 따뜻함을 통해 공생과 공존을 추구할 수 없다면 종교는 인류의 희망이라기보다 그 자체가 더 큰 문제로 등장할 수도 있다.

 

도리어 현재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것은 종교의 유무를 떠나 사회 각처에서 진실을 추구하고 사랑을 실천하고자 하는 선한 양심들의 작은 행동이다. 종교가 희망이 되는 경우는 그것이 누구보다 더 진실과 자비를 실천하는 일에 중점을 두고 행동할 때뿐이다. 그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본보기를 따르며, 성경의 예언자들이 선포한 그 절규를 듣고 순종할 것이다. 종교가 바리새적 선민의식에 빠져 그들과 남을 가르는 울타리를 견고하게 세우려고만 한다면 반드시 심판의 대상이 되고 말 것이다. 도리어 예수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교리적 완고함과 편협함을 벗어버리고 삶의 현장에서 참되고 따뜻하게 사는 삶에 중점을 둔다면 종교는 다시 시대를 위한 희망의 등불이 될 것이다.

 

이처럼 활활 타오르는 시대의 요청은 이미 시작된 심판의 불이 될 수도 있다. 예수께서는 문 밖에서 서서 문을 두드리고 계신다(계 3:20)고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중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편지하셨다. 똑! 똑! 똑! 이 문 두드리는 소리는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는가, 아니면 기대감을 주는가? 예수께서는 교회에게 말씀하셨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 주리라”(계 22:12).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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