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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나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리는 법

작성자조해강|작성시간22.04.13|조회수33 목록 댓글 0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리는 법

 

고난주간은 일종의 추도(追悼)의 기간이다. 추도는 죽은 사람을 생각하며 슬퍼하는 것이다. 고난주간에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을 생각하며 슬퍼하고 주님의 삶과 정신을 기린다.

 

하지만 멜 깁슨의 영화 패션오브크라이스트(Passion of Christ)에서 두드러진 것처럼 예수님의 수난 장면이 영화 전체를 삼켰듯이 고난주간에 우리가 예수님을 추도하는 내용도 예수님의 수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하지만 추도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것은 고인의 삶과 정신이 아닐까? 아무리 비참한 죽음을 당했을지라도 고인이 어떤 정신과 뜻을 가지고 살았는지를 기리고, 죽음에 이르게 한 그의 삶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생각하는 것이 추도의 알맹이다.

 

예수님은 왜 죽임을 당하셨을까? 예수님은 왜 죽음을 피하지 않으셨을까? 왜 죽음의 자리로 나아가셨을까? 이런 질문에 대하여 우리는 성급하게 신약성경 서신서의 몇 구절을 인용한다. 즉, 우리의 죄를 사하시려고 죽으셨다고 당연하다는 듯이 우리는 위의 질문에 대답한다.

 

사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님의 생애와 죽음에 대하여 들려준다. 마태와 누가는 예수님의 탄생부터 죽음까지 전 일생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했다. 복음서를 읽으면서 우리는 예수님의 생애에 대하여 알게 된다. 예수님이 어떤 일을 하셨는지, 그리고 무엇을 꿈꾸셨는지, 예수님이 죽기 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우리는 사복음서를 통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었는지 생각해 볼 수 있다.

 

예수님은 서른살 때까지 고향 나사렛에서 사셨다. 그리고 세례 요한에게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후에, 사십일 동안 광야에서 기도하시고 갈릴리로 돌아와 제자들을 불러 모으시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셨다. 예수님은 병든 사람들을 치료하시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율법을 새롭게 해석하여 그 근본 정신이 무엇이었는지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이렇게 보면 예수님은 예언자들처럼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라고 자기 백성을 일깨우는 일을 하셨다. 복음서에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여러 형태로 담겨 있다. 특히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서 장차 우리가 꿈꿀 수 있는 미래의 모습을 들려주셨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결국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셨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사셨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는 세상이다. 그 나라는 마치 겨자씨와 같이 작게 시작될지라도 마침내 온 세상에 충만한 나라가 될 것이다. 그 나라에서는 자비와 공의가 가득하며 그 두 가지 정신을 실천한 사람들이 칭찬과 존경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악을 행하는 자들은 그 나라에서 쫓겨날 것이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는 시편의 복 있는 사람에 대한 설명과 유사하다.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며 병든 사람을 돌보아 주고 외로운 사람의 친구가 되어준다. 그들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면서 그 뜻을 따른다. 당연히 그들의 모임은 거룩한 처소가 되어 하나님도 그들 가운데 함께 하신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과 함께 친밀하게 살아가는 세상이다. 그곳에서는 하나님의 율법이 완성된다.

 

예수님이 이렇게 사셨으므로 불의와 거짓, 위선과 탐심에 찌든 사람들은 예수님을 싫어했다. 예수님도 그들을 향하여 그 길에서 돌이키라고 여러 말로 일깨우려고 노력하셨다. 예수님은 일상에서 가르치시고 행동으로 보여주셨고, 마침내 이스라엘의 중심지 예루살렘에 들어가셔서 그 백성들을 일깨우고자 하셨다. 바로 그 일 때문에 예수님은 반대자들로부터 죽임을 당하셨다.

 

우리는 빛나는 삶을 살았던 조상들을 기리기 위해 거리의 이름에 그들의 이름을 담는다. 퇴계로는 이황을 기리기 위해, 을지로는 을지문덕 장군을 기념하고, 충무로는 이순신 장군을 기린다. 해군도 나라를 위해 충성하신 분들을 기리기 위해 함정 구축함과 잠수함의 이름을 지을 때 그분들의 이름을 사용한다. 광개토대왕함, 을지문덕함, 양만춘함, 충무공이순신함, 문무대왕함, 대조영함, 세종대왕함, 율곡이이함, 서애류성룡함은 구축함이다. 장보고함, 최무선함, 박위함, 손원일함, 정지함, 안중근함, 유관순함은 잠수함의 이름이다.

 

퇴계로나 을지로 또는 충무로를 거닐면서 이황이나 을지문덕, 그리고 이순신 장군을 기억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세월은 기억을 희미하게 하고 조상들의 정신마저 잊어버리게 한다. 그러나 인간은 기억하고 기념하는 존재다. 그것을 통해서 과거로부터 배운 교훈을 현재에 적용하고 그런 방식으로 미래를 열어간다. 하지만 바쁘게 살아가노라면 우리는 거리명에 새긴 조상의 얼도 잊고 살기 십상이다.

 

예수님에 대한 기억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우리는 십자가를 목에 걸고 십자가를 건물에 세우고도 예수님에 대해서 기억하지 못한 채 살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절기가 필요하다. 절기는 시간의 길 위에 세워진 이정표다. 우리는 시간의 길을 여행하다가 그 이정표 앞에 멈추어 서서 우리의 방향을 다시 점검한다. 고난주간은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이 무엇을 위함이었는지를 생각해 보는 절기다.

 

어떤 이정표나 표지판은 오랜 세월 동안 수리를 하지 않아서 희미해지기도 하고 심지어 기둥이 부러지거나 아예 방향 표지판이 틀어지기도 한다. 2천년 동안 한 자리에 서 있던 이정표라면 어떨까? 수많은 여행자들이 그 앞에서 머무르며 길을 찾았고 쉼을 통해 새 힘을 얻었다. 어떤 여행자는 표지판에 자신의 기념품을 걸기도 하고 낙서나 흔적을 남기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나중에 온 사람들은 그 표지판을 잘못 읽기도 한다. 우리 신앙 여정을 보여주는 절기 표지판도 오랜 세월을 지나왔으므로 수리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

 

고난주간과 부활절을 맞이하여 우리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생각한다. 그 첫번째 생각은 예수님의 정신과 뜻, 그리고 지향점과 목표가 무엇이었는지 살펴보는 것에서 시작해 보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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