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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개의 질문에 대답한 복음 (20) 영원한 상급이란 무엇인가?

작성자조해강|작성시간14.08.09|조회수92 목록 댓글 0

20개의 질문에 대답한 복음

20. 영원한 상급이란 무엇인가?

자신의 재산을 천국으로 가지고 가기를 원한 어떤 사람에 대한 오래된 이야기가 있다. 그의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그것을 가져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저는 해 보겠습니다.” 죽음이 임박했을 때 그는 자신의 모든 소유를 팔아 두 개의 금괴를 산다. “내 금을 나와 함께 묻어주시오”라고 말한다. 그의 계획은 이루어져 천국 문 밖에서 자신이 아끼던 금과 함께 자신이 있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금괴 두 개를 들고서 성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한다: “보세요, 이것을 받으세요.” 그러나 성 베드로는 이상하게 여기면서, “도로포장용 돌을 가져오셨군요?!”라고 말한다.

이 농담이 유효한 까닭은 천국의 부귀에 대하여 우리로 하여금 혼동하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천국에서 상급이 있을 것을 안다. 그 이유는 예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상급이란 어떤 것일까? 어떤 사람들이 하는 말에 의하면, 하나님은 보물과 저택을 나눠주실 것이라고 하고, 심지어 충성된 자들에게는 도시를 주실 것이라고 한다. “내가 하는 이 힘든 일에는 어떤 보상이 있을 거야-최소한 금 별 정도는 있겠지-그렇지 않다면 내가 애쓸 이유가 뭐야?” 다른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상급은 전혀 없을 것이라고 한다. “모든 것이 우리에게 은혜로 온다. 그러므로 노력에 대한 보상은 없을 것이다.

나는 이 두 견해 모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금 별을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문제점은, 우리가 아들인데 종의 정신을 장려하시는 분으로 하나님을 생각하게 한다는 점이다. 상급이 없다고 하는 견해가 가지는 문제점은, 예수께서 다음과 같이 하신 말씀에 배치되기 때문이다:

하늘에 너희 보물을 쌓으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할 수 없고 도적이 뚫고 들어와 훔쳐가지도 못할 것이다.( 6:20)

바울도 이와 비슷하게 말했다:

심는 자와 물 주는 자는 한 마음으로 한 것이지만 각각 자기가 일한대로 상을 받으리라. (고전 3:8)

자기가 일한대로 상을 받으리라? 그것이 어떻게 은혜의 경제학에 맞을 수 있는가? reward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값을 지불하다 또는 임금을 준다는 의미다. 하나님이 돈으로 사람을 부리는 사람a paymaster처럼 우리에게 봉급을 주실 것인가?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까?

영원한 상급이나 천국의 보화의 문제는 의문부호가 붙은 수수께끼다. 어떤 사람들이 잘못 사용하는 주제이기도 하고(“하늘에 보화를 쌓아두려면 내 사역에 헌금하라”) 다른 사람들은 너무 어려운 일이라고 포기한다. 은혜 중심의 사람들은 특별히 보상을 얻는다는 말에 거부반응을 보인다. 그리고 그런 반응에 대해 이해가 되기도 한다. 은혜와 보상은 함께 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은혜의 예수님과 은혜의 사도인 바울은 함께 갈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당신은 이 본문을 잘못 읽은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모든 것의 상속자임을 모르세요? 우리가 무슨 보상을 받을 필요가 있나요?” 예수께서 우리의 상급이신데 무슨 더 큰 상급이 있겠는가 하는 말도 맞는 말이다.

믿음이 없이는 누구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는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분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11:6, GNB)

하나님을 찾는 자들이 찾은 것 외에 무슨 보상이 있을까? 당신이 하나님을 찾는다면 당신은 그분을 찾을 것이고 주께서는 당신의 지극히 큰 상급이 되실 것이다( 15:1). 천국의 보화가 무엇이든지 간에, 예수님과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찾는 모든 사람들에게 상급이 되신다. 이것이 저택을 얻기 위해 종처럼 애쓰는 사람들이 잘못 하고 있다는 이유가 된다. 예수님이 당신의 집이 되시는데 저택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지금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물려 받을 유산에 대하여 말하는 시간이 아니다. 당신이 알아야 할 것은 그것이 좋다는 것뿐이다! 당신이 이제 막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이든 열한 시에 일하러 온 품꾼이든, 당신은 오래 믿고 가장 충성된 성도들만큼 풍성하게 복을 받을 것이다. 영원한 나라에서는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로 나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구별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상급이 되신다는 것과 예수께서 하늘에 상급을 쌓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바울이 말한 상급은 우리의 수고에 따라 주어질 것이다. 은혜를 죽이는 말처럼 들리는 위험은 있지만, 이렇게 말해 보겠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스러운 유산을 받을 것이지만, 어떤 사람들은 영원한 상급도 받을 것이다. 거기에는 차이가 있다. 우리의 유산은 은혜로만 우리에게 주어지지만, 영원한 상급은 일한 것에 대한 대가요 쌓이는 것이다.

그러나 영원한 상급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하늘의 상급은 무엇인가?

만약 하늘의 상급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것일까? 어떤 이들은 말하기를 물질적인 부유함이라고 한다. “당신은 그것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미리 보낼 수는 있습니다.” 그래서 금괴에 대한 옛날 농담은 농담이 아니다. 그러나 당신이 영원히 돈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을 어떻게 사용할 수 있을까? 천국에 극장이나 식당 또는 소형 골프장이 있을까? 백만 년 이후에 당신의 돈을 다 사용하고 나면 어떻게 될까? 천국의 주식시장에서 일하는 이가 아무도 없다면, 결국에는 모두가 가난하게 되지 않을까?

이런 것이 바보 같은 질문인 까닭은 바보 같은 시나리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늘 그렇게 설교해 왔다. 나의 천국 잔디밭에 천막을 치고 살게 될 나태한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나는 이야기하곤 했다. 나는 저택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고(내가 열심히 일하고 있으니까) 그들은 소형 천막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한 건가?

다른 사람들은 하늘의 보상을 권세 있는 지위라고 말한다. 이 땅에서 잘 하면 하늘나라에서는 도시나 고을을 얻을 것이다. 시장이나 도지사가 되고 싶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원하지 않는다면 그다지 좋은 보상은 아니리라. 그리고 다스릴 도시가 충분히 많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인가: “다스릴 도시는 다 떨어졌으니 당신을 위해 운동장 경비직을 만들겠다”그렇게 하면서 영원히 즐거워하시라.

문제가 되는 큰 부분은 우리가 하늘의 상급을 땅의 가치를 가지고 생각한다는 점인데,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다. 땅에서 가치 있는 것으로 평가된 것이 천국에서는 가치가 적은 것a hill of beans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이것을 하늘 아버지의 관점으로 볼 필요가 있다.

영원한 보상이 무엇인가? 하늘의 보화는 무엇인가? 그 대답은 당신을 놀라게 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사람들이다.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다. ( 127:3)

이 시는 생물학적 자녀들에 대한 것만은 아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위해 더 위대한 계획을 갖고 계시며 그 계획은 영적인 자녀들과 관련된다. 수많은 자녀들이다. 수십, 수백, 수천, 수백만이 될 것이다. 하나님을 제한하지 말라. 아브라함이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이라고 부르심을 받은 것처럼, 당신도 그렇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많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될 것이라고 하셨다. 어부의 보상은 무엇인가? 물고기요, 이 경우에는 사람을 말한다.

좋은 씨를 뿌리고 물을 준 사람의 보상은 무엇인가? 사람의 추수다.

결코 닳아지지 않고 훔쳐갈 수 없는 보화는 무엇인가? 사람들이다.

하나님이 나에게 이런 계시를 주신 것은 나와 아내 카밀라가 이렇게 질문하고 있을 때였다: “우리 아이를 하나 더 가질까?” 아이를 갖는 것은 부부에게는 중대한 결정이다. 당신은 이런 질문을 해 보아야 할 것이다: “집에 또 다른 사람을 수용할 방이 있는가? 우리는 자녀를 양육할 여유가 있는가?” 하나님은 이런 질문이 곤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가? 주께는 충분한 공간이 있고 추가로 만드는 데 어려움이 없다.

내 마음에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나는 더 많은 아이들을 원한다! 나는 항상 더 많은 아이들을 원한다!” 주님의 마음은 사랑으로 넘쳐흐르고 그 사랑을 나타내기를 갈망하신다. 화가가 그리고 싶어하고 작가가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것처럼, 아버지는 아빠 노릇을 하고 싶어 한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그것이다. 나는 얼마나 많은 자녀들을 양육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나보다 훨씬 더 위대하신 아버지시다. 제한이 없으시다. 주님의 마음은 이렇게 외치신다: “나는 자녀들이 소중하다. 많을수록 더 좋다!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우리의 하늘 아버지라고 소개하셨다. 마태복음 6장에서,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답해 주시는 아버지시라고 하셨다. 아버지의 보상은 무엇인가?  자녀들이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보물을 하늘에 쌓아놓으라고 하셨다. 비록 하나님이 우리의 보물이시지만, 주께서는, “하나님을 쌓으라”고 하시지 않으셨다. 우리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주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자녀를 많이 낳고 번성하라. 그러면 이 좀먹고 수전노 같은 세상이 없어질 때 너희는 하늘에 보화를 가지게 될 것이다. 그 보화란 영적인 자녀들, 손자들, 그리고 증손자들일 것이다.[1]

이것이 다소 생소한 계시라는 점을 인정한다. 나는 보통 크기의 가족에서 자라나 나 정도의 보통 크기의 가정을 가질 것을 계획했다. 그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보통의 꿈을 가진 보통의 아버지가 아니시기 때문이다. 주님의 꿈은 세계에서 가장 큰 가족을 가지는 것이다. 당신이 그것을 알게 되면 명백한 일이지만, 나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바울의 상급은 무엇이었는가?

우리가 수고한대로 상을 받을 것이라고 바울은 말한다. 자녀를 낳는 수고보다 더 큰 보상이 있을까? 자연계에서와 같이 영적인 세계에도 그렇다. 새 생명을 창조하기 위해 하나님과 함께 수고하는 것보다 더 만족스러운 일이 있을까? 당신이 누군가에게 복음을 들려주며, 계속 빛을 비추며, 얼굴에 미소를 머금으면, 당신과 성령님이 무언가 특별한 일을 해 낸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조금 전에 이 사람은 예수님의 위대한 상급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주님의 생명과 함께 빛나고 있다. 그들은 새 사람이 되었다.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된 것이다. 그것은 진실로 기적이다.

하나님이 갖고 계신 아버지로서의 심장은 바울에게도 강렬하게 고동치고 있었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을 전할 열망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저택을 얻거나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을 얻기 위해 그렇게 한 것이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고전 9:19)

바울은 영적인 자녀들을 양육하고자 하는 깊은 갈망이 있었다. 복음으로 그는 고린도인들의 아버지가 되었고 데살로니가인들의 어머니가 되었다. 그는 디모데나 오네시모 같은 사람들을 주 안에서 자기 아들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이 견고하게 자라는 것을 볼 때 그는 “이제는 우리가 살 것 같다(살전 3:8b-현대인의성경)”고 말했다.[2]

사람들이 은혜를 받는 것을 보는 것은 이 땅에서 가장 큰 기쁨이다. 나는 사람들이 고침 받는 것을 보았고, 가족이 회복되는 것도 보았으며, 중독이 풀리는 것도 보았다. 바로 어제 나는 은혜를 나누어줌으로 결혼한 한 가정이 깨지지 않도록 도와주었다.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주님이 가장 큰 상급이시지만 주님을 제외한다면, 성령님과 동역하면서 그리스도의 생명을 다른 사람들 안에 재현하는 것보다 더 큰 상급은 없다. 바울은 이것을 이해했으며 다음과 같이 이에 대하여 자랑했다: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살전 2:19~20)

아마도 당신은 하나님이 당신의 사진을 하나님의 지갑 속에 넣고 다니신다는 말을 들었을 것이다. 그럼, 바울은 데살로니가인들의 사진을 그의 지갑에 간직한다. 그들은 주 안에서 바울의 자녀들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이 당신을 기뻐하시듯이 그는 그들을 기뻐하였다. 그들은 바울의 면류관이었고 그의 기쁨이었으며 그의 영원한 상급이었다.

솔로몬이 말하기를 자녀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상급이라고 했을 때, 그는 옛 언약의 법을 인용한 것이었다( 28:4). 만약 자녀들이 율법이라고 하는 죽음을 다루는 사역 아래서도 상급이라면, 은혜를 주는 생명 아래서는 얼마나 더 많이 자녀들을 기대해야 하겠는가? 율법에는 생명이 없고 은혜에는 풍성하다. 은혜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좋은 열매를 재생산하는 것이 은혜의 특성이다.

 

영원한 친구들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예수께서 들려주신 가장 이상한 비유는 한 남자가 자신의 사장을 속이고 나서 그렇게 한 것 때문에 칭찬을 받는다는 이야기다( 16:1~8). 영리한 청지기라는 이 비유는 다소 이상하다. 예수께서는 무엇을 우리에게 말씀하시려는 것일까? 회계장부를 거짓으로 꾸며도 좋다는 말인가? 숫자를 바꾸어도 좋다는 건가? 화이트칼라 범죄에 관여해도 좋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예수께서는 부정을 장려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주님은 우리들에게 미래를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 16:9)

이 구절의 알맹이는 “친구를 삼으라”는 말인데, 진짜 친구는 당신을 영주할 처소로 영접할 것이다. “재물이 없어질 때”는 죽을 때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생을 사는 동안 우리는 우리를 내세에서 영접할 친구를 삼을 기회가 있다. 우리는 그 일을 어떻게 할까? 우리를 사람들에게 투자함으로, 사랑을 보여줌으로, 그리고 은혜를 베풂으로 할 수 있다.

문제는 우리가 종종 다른 사람들에게 시간을 내기에 너무 바쁘다는 점이다. 우리의 삶은 자질구레한 일과 시험, 청구서, 마감일, 그리고 모임 약속 같은 것들로 가득 차 있어서 사람들을 위해 시간을 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관계는 문자 메시지를 보내는 것으로 축소되고, 페이스북에 “좋아요”를 붙이는 정도로 약화되었다. 오늘날처럼 바쁜 시대에,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그 어느 때보다 많이 들을 필요가 있다. “이 청지기처럼 지혜롭게 행하여 내세에도 지속하는 보답을 얻을 수 있도록 이 세상의 자원을 사용하라.

이 이야기에서, 지혜로운 청지기는 다른 사람들의 채무를 깎아주었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하는 일이 바로 그 일이다. 우리는 희년the year of Jubilee을 선포하고 죄의 청산을 선포한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아무 것도 묻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당신 편이시며 당신이 죄와 수치에서 해방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채무를 의식하는 세상에 자유를 제공하는 행복한 일을 맡은 사람들이다.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16:10a)

“작은 것”이란 불의한 재물을 말한다. 우리가 삼은 친구들은 “큰 것”을 말한다. 이 세상의 재물은 영원하지 않다. 좀과 동록과 도적이 줄어들게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친구들은 영원하다. 친구들은 당신이 가지고 갈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와 닮았거나 행동이 비슷하거나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친구로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신과 전혀 닮지 않은 사람들을 친구로 삼으셨고 그들에게 자신과 같이 될 수 있도록 능력을 부어주셨다. 주께서는 삭개오와 같은 비뚤어지고 키 작은 도둑에게 은혜를 베푸셨고, 그 삭개오도 베푸는 자가 되었다. 예수께서는 사울이라는 어두운 영혼을 가진 사람에게 빛을 비추셨고, 그 사울은 복음의 횃불이 되었다. 예수께서는 친구들을 위해 사셨고 죽으셨다. 주님은 원수들조차도 친구로 삼으셨다.

친구를 삼는 것은 언제나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일을 어떻게 하는지 보여주셨다. 주께서는 사람들을 위해 시간을 내셨다. 그들의 파티와 결혼식에 참석하셨다. 그리고 그들의 삶에 늘 함께 하셨다. 예수께서는 친구를 삼는 좋은 방법은 잔치를 여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 ( 14:13~14)

이 세상에서 사람들은 다른 사람과 격의없이 교제하고 네트워크를 만들기 위해 파티를 연다. 그들은 다른 사람을 초대할 때 그들로부터 어떤 것을 되돌려 받을 것을 기대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영원한 친구를 삼을 때는 우리에게 갚을 것이 없는 사람들을 초대하라고 하셨다.

어떻게 우리가 의인들의 부활 시에 갚음을 받을까? 친구들을 통해서 받는다. 아시겠는가? 궁핍한 사람들은 영원히 궁핍하지 않게 될 것이다. 어느 날 그들은 영광 가운데 빛날 것이고, 그들은 생명을 함께 나누게 해 준 것에 대해 당신에게 감사할 것이다.

당신이 은혜의 복음을 전할 때는 강대상이 필요하지 않다. 당신은 그냥 테이블과 그 위에 먹음직스런 음식과 조금의 포도주 또는 당신의 기호에 따라 주스를 준비하면 된다. 예수께서 사람들과 함께 드시던 일이 얼마나 자주 있었는지 생각해 보라. 주께서는 아마도 앉아서 먹기를 서서 설교하신 것보다 더 많이 하셨을 것이다. 그것이 예수께서 친구를 삼으신 방법이다.

 

가난한 사람들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이제 우리는 가장 좋은 보상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았다. 즉 우리가 사귄 친구들이요 우리가 양육한 자녀들이다. 예수께서 왜 그렇게 가난한 사람들에게 매달리셨는지를 우리는 이해하기 시작했다.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라, 가난한 자들을 초대하라. 가난한 자들을 도와주라.” 하나님이 부자보다 가난한 자들을 더 사랑하시는 것은 아니다. 가난한 자들에게 투자하는 것이 더 낫기 때문이다. 그들은 낮은 곳에 달려 있는 즉시 딸 수 있는 열매와 같다.

복음에 관해서, 가난한 자들은 부자보다 더 좋은 위치에 있다. 그들은 이 세상이 제공하는 거짓되고 헛된 위로에 무감각해지지 않았다. 그들의 필요를 알아보라. 우리의 모든 필요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공급하신다고 약속하시는 분을 그들이 만날 준비가 되어 있다. 주께서 공급해주시는 식탁에는 모든 것이 놓여 있지만, 오직 배고픈 사람들만이 감사드릴 뿐이다.[3]

무엇을 해야 영생을 소유할 수 있겠냐고 예수님께 여쭈었던 청년을 기억하는가? 예수께서는 그에게 계명을 아느냐고 물으셨다. 그리고 그 청년은 그런 것은 어렸을 때부터 지켰다고 대답한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를 보시며 사랑하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네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 보물이 하늘에 쌓이리라. 그리고 나를 따르라. ( 10:21)

여기에 이중의 불운a double whammy이 있다. 우선, 그 젊은이는 자신이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예수께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아신다. 그는 우상숭배자요 불확실한 부를 의지하는 사람이다. 둘째로, 그는 영원을 계획하고 있지만 잘못된 방법으로 그것을 구하고 있다. 그는 자신과 자신의 의로운 행위를 투자하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청년을 사랑하신다. 예수께서는 그가 은혜에서 빗나가지 않기를 바라셨다. 그래서 우선 주께서는 그에게 율법을 주시고 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하셨다. 그리고 나서 예수께서는 그에게 영원한 친구를 사귀는 법을 알려주셨다.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짓밟힌 사람들과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잔치를 열라.” 예수께서는 그 청년을 그냥 천국으로 인도하려고 하지 않으셨다. 예수께서는 그의 많은 친구들과 함께 영생을 누리는 사람으로 세워지는 것을 원하셨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는 것은 당신을 의롭게 하지 않지만, 당신이 영원한 친구들을 사귀는 데는 도움이 된다. 그것은 부자 청년에게만 해당되는 좋은 충고가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도 동일한 말씀을 하셨기 때문이다: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둑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 12:33)

예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가난한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함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우리들에게 실제적인 제안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영원히 지속되는 보화를 모으는 법을 알려주신다. 좋은 집과 차를 소유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당신의 삶에서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이 좀먹고, 녹슨 장난감뿐이라면, 당신은 지혜롭게 사용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친구들과 아이들로 가득 찬 삶을 살 수 있음에도, 당신은 열등한 투자를 하고 있으며 허무한 삶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가난한 자들을 도우면 천국에서 주님의 마음에 썩 들게 할 수 있을 것brownie points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그것이 맞는 이야기라면, 왜 예수께서는 그렇게 하셨는가( 13:29[4])?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비위를 맞출 필요가 없는 분이셨다. 예수께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가가신 것은 그것이 해야 할 지혜로운 일이기 때문이었다. 주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가난한 사람들이 은혜에 반응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복음을 모든 사람들에게 전파하셨으나 복음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선포하는 것을 중시하셨다( 11:5[5]).

이것과 돈은 어떤 관련이 있는가? 왜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나눠주라고 권고하시는가? 선물은 나눠주는 사람을 위해 문을 열어주기 때문이라고 우리는 생각할 것이다( 18:16[6]). 그러나 진짜 이유는 우리가 마음을 쓰기 때문이다. 우리의 마음이 사람들을 위하지만 우리의 보물이 있는 곳에 우리의 마음도 있을 것이다. 당신이 사람들을 사랑하면, 그들에게 투자할 것이다. 그래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하고 싶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것은 복음을 전할 기회를 얻기 위함이 아니다. 그것은 속임수이며 그것으로 속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가 그렇게 하는 것은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며 다른 이유는 없다. “내가 가진 모든 것으로 가난한 자를 위해 구제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3). 그러므로 잔칫상에 전도지를 두지 말고 손님들에게 기습적인 설교를 하지 말라. 단순하게 그들을 사랑하라. 그들을 위해 돈을 지불하라. 당신이 준비할 수 있는 최고의 음식을 제공하고 식탁에 꽃을 두라. 예수께서 식사에 오시는 식탁이라고 생각하고 그에 맞게 준비하라.

“하지만 폴, 우리가 손님들에게 복음을 말하지 않으면 어떻게 그들이 들을 수 있겠어요?” 당신은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 일이 이루어지도록 애쓰거나 억지로 하지 말라. 단지 성령의 인도를 따르고 물 흐르듯 나아가라. 당신은 기회를 얻어 예수님에 대해 말하거나, 병을 고칠 수 있을 것이다. 혹시 그런 기회가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반대급부로 어떤 것을 얻기를 기대하지 말고 사랑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을 과제로 삼지 말라. 무조건적인 사랑이 이 세상에는 정말 귀하다. 그것이 설교보다 더 크게 외치는 것이고 좋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잘 보여준다.

예수께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셨다. 바울도 똑같이 그렇게 했다. 예수님처럼, 바울은 가난한 사람들의 중요성을 이해했고 그들에게 열심을 다해 베풀었다: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 ( 2:10)

바울은 종교적인 의무나 율법 준수자들을 기쁘게 하려고 가난한 자들을 돕지 않았다. 그가 그렇게 한 것은 그들을 사랑했고 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들을 얻기 위함이었다. 은혜는 그것을 가장 많이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멀리 나아간다는 것을 이해했다. 예수께서도 아픈 사람들과 죄인들을 위해 오셨으며 하나님의 나라가 가난한 자들을 위한 것임을 바울은 알고 있었다.[7]

이 책을 시작할 때, 나는 이렇게 물었다: “당신의 아버지는 누군가? 이제 마지막에 다다라서, 나는 이렇게 물어야 할 상황이 되었다: “당신의 자녀들은 누군가?” 하나의 질문은 다른 것을 따라온다. 당신의 하늘 아버지의 마음을 더 많이 알수록, 당신은 스스로 더 많이 아버지나 어머니가 되고 싶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사랑이 역사하는 방식이다. 우리는 그 사랑을 받았고, 그 사랑에 의해 변화되었다. 그러니 그 사랑을 나눠 주어야 한다.

어쩌면 당신의 인생 이야기는 열매가 없거나 많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어쩌면 당신은 복음을 전하려고 노력했지만 적은 사람만이 돌아왔을 수 있다. 당신이 노력하는 것을 멈추고 당신의 하늘 아버지의 사랑 가운데 쉬라고 내가 제안해도 되겠는가? 여기에는 압박감이 없다. 천국에서 당신의 자리는 예수님만큼 확고하며, 그 안에서 당신은 이미 모든 것을 상속받을 사람이다. 당신은 어느 것도 증명할 필요가 없다. 이것은 당신이 일을 하는 것에 대한 것이 아니라 당신의 일에 은혜를 두라는 것이다. 그것을 당신이 어떻게 할까? 나는 당신에게 말해 줄 수 없다. 나에게 작동되는 것이 당신에게 작동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지혜가 부족하지 않으시다. 예수께 집중하면 당신에게 꼭 맞는 은혜의 모험으로 주님이 당신을 인도하실 것이다.

당신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나는 잔치를 열어야겠어. 나는 영원한 친구를 사귀어야겠어.” 그러나 당신이 환대의 은사가 없다면 당신은 형편 없는 주인이 될 수도 있다. 당신은 결코 잔치를 열지 않을 수도 있다. 당신은 전에 누구도 해 보지 않은 완전히 새로운 것을 할 수도 있다. 당신의 하늘 아버지를 제한하지 말라. 그분께서 당신을 만드셨고, 당신을 아시며, 당신이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에 대한 생각도 갖고 계신다. 주님께 보여달라고 기도하라. 그리고 나서 용기를 내라. 왜냐하면 내가 장담하건대 하나님의 아이디어는 당신 자신이 생각해 낸 어떤 것보다 더 크고 더 훌륭하기 때문이다.

은혜의 복음이 모든 열매 없는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인 까닭은, 그 복음이 우리로 하여금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부담감에서 해방시켜 주고 우리가 한번도 해 보지 못한 일들을 할 수 있는 힘을 우리에게 주기 때문이다. 은혜는 우리를 열매로 가득하게 한다.

인간이 만든 종교는 당신에게 어떤 일을 행하여 그 일을 이루어내라고 말하지만, 은혜는 단순히 이렇게 말한다: “예수님을 신뢰하고 주께서 주님의 생명을 당신을 통하여 나타내시도록 내어드리라.” 종교는 당신으로 하여금 열매 없는 좌절 가운에 울부짖게 만들지만, 은혜는 당신으로 하여금 노래하고 기뻐 외치게 한다!

 

 

 

 

 

 

 

감사의 글

이 책을 쓸 수 있도록 도와주신 많은 분들에게 감사한다. 여기에 사용된 어떤 자료는 Escape to Reality에 올린 글에 근거한 것이다. 나는 수백 명의 E2R 독자들에게 감사 한다. 그분들은 나의 글에 논평을 하기 위해 시간을 내 주었다. 그들의 페이스북은 나의 생각을 명확하게 하고 나의 글이 다듬어지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이 책의 각 장을 출판하기 전에 많은 사람들이 읽어 주었다. 내가 감사하고 싶은 사람들은, Steve Baker, Jnnie Lawson, Cornel Marias, Steve Hackman, Tommy Hackman, Brandon Petrowiski, 그리고 Peter Wilson이다. 이분들은 건설적인 피드백을 해 주었으며 이 글의 초안 작업을 할 때 격려를 해 주었다. 또한 예리한 눈으로 교정을 맡아준 세 사람에게 감사 드린다: Camile Lee, Judy Fake, 그리고 Kristy Chaignon이 그들이다.

항상 그랬듯이 내가 가장 감사하고 싶은 사람은 나의 아내 Camilla. 그녀의 사랑 어린 지원과 믿기지 않을 정도로 큰 은혜가 아니었다면, 이 책은 빛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Escape to Reality

은혜의 복음에 대해 질문이 더 있는 분은 Paul Ellis의 웹사이트에서 대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scapeToReality.org를 방문하면 다음과 같은 것을 발견할 것이다:

-       은혜에 기초하여 쓴 거의 400개의 문서

-       40개 이상의 은혜에 관한 책에 대한 논평

-       개인이나 그룹 성경공부를 위한 자료들

-       은혜로 말미암아 근본적으로 삶이 바뀐 사람들의 간증



[1] 사람을 보화로 보는 이런 관점은 오래된 것이다( 7:6, 14:2, 26:18). 하나님의 눈에는 사람들이 보화다.

[2] 바울은 고린도인들에게, “내가 복음으로 너희에게 아비가 되었다”(고전 4:5)고 했다. 데살로니가인들에게는,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유모가 자기 자녀들을 기름과 같이 친절했다”(살전 2:7)고 말했다. 그리고 부모처럼, 그들이 주 안에서 건강하게 자라는 것을 보고 기뻐하였다(살전 3:8).

[3] 물론, 나는 어느 정도 일반화를 여기서 하고 있다. 가난하다고 해서 반드시 우리의 필요를 은혜로 깨닫게 된다는 것은 아니다. 이는 부자라고 해서 우리의 필요에 대해 무지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나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을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 가운데서 더 쉽게 만날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스스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는 더 찾기 어려울 것이다( 6:24를 참조하라).

[4]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가 쓸 물건을 사라 하시는지 혹은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하더라( 13:29)

[5]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11:5)

[6] 사람의 선물은 그의 길을 넓게 하며 또 존귀한 자 앞으로 그를 인도하느니라

[7]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가난한 자들이 복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6:20)라고 하셨다. 사실, 천국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지만, 자신이 가난하고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만이 들어갈 수 있다. 자신이 의롭다고 여기는 부자들은 자신들이 은혜를 필요로 하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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