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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회복

진리란 무엇인가?(2) (예비묵상)

작성자조해강|작성시간18.09.14|조회수695 목록 댓글 1

2018 9 16 주일 메시지 (예비 묵상)

시리즈 주제: 공동체의 회복을 위한 가르침과 배움

 

다섯 번째 설교

제목: 진리란 무엇인가?(2)

 

 

설교를 위한 묵상

파커 파머의 , 가르침과 배움의 영성, 122

 

예수님은 우리를 부르시는데, 어떤 신조나 신학이나 세계관으로 부르시는 것이 아니다. 이 진리로의 부르심은 공동체로의 부르심이다. 그분과의 공동체, 다른 사람들과의 공동체, 창조세계와 창조주의 공동체로의 부르심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우리와 분리된 추상적이고 비인격적인 어떤 것이라면, 그것은 진리일 수 없다. 왜냐하면 진리는 인식주체와 인식 대상 사이의 개방적이고 신실하고 모험적인 상호 침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말에서 우리가 신앙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다시 생각해 보고자 한다. 우리는 여기서 진리를 어떤 신조나 신학이나 세계관으로 간주하는 오류를 피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것은 인격이 배제된 어떤 진술로 사람을 구별한다. 그리고 구별은 동시에 담벼락이 되고 차별이 되고 비인간적인 대우를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말하자면 종교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폭력이 발생한다.

 

또한 여기서 신앙은 어떤 것을 배우되 단지 사실이 아니라 공동체로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행위라는 사실이다. 부르심은 먼저 하나님과 사귀는 공동체, 다른 사람들과 사귀는 공동체, 그리고 창조세계와 창조주와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로 우리를 부르는 부르심이다. 그러기에 신앙은 언제나 명제보다는 관계가 중시된다. 관계가 배제된 명제는 자칫 사람을 죽이는 문자가 있다. (참고.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성령은 사람을 살립니다. - 고후 3:6-공동번역).

 

그러면 신앙의 입교자에게 묻는 질문은 어떤 신조나 교리로 이루어지지만, 내용은 당연히 위의 관계들로의 부르심에 대한 반응을 점검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새로운 관계들로 나아가겠다는 결단이야말로 진정한 회개라고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근본 정신을 다시 써야 한다고 나는 확신한다.

 

나의 이런 생각이 옳음을 위키사전에서 다음과 같이 확인한다. 위키백과사전에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대한 설명에 추가된 부분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문서들(웨스트민스터 대소요리문답) 미국으로 건너간 청교도들에 의해 미국 장로교회(PCUSA) 교리적 표준문서로 인정되었고, 한국에는 장로교 선교사들이 가지고 들어와 한국 장로교 교회의 표준문서로 통용되고 있다. 그러나 1970년대 미국연합장로교회(UPCUSA)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포기하고 카를 바르트의 화해신학적 교회론을 구성하는 비정통적이며 비개혁주의 신조인《1967 신앙고백서》를 발간함으로써 신신학을 근간으로 하는 자유주의적인 신앙고백을 천명했다.

출처: 위키백과[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최근 우리나라에서 헌법개정에 대한 논의가 일고 있다. 헌법에 어떤 정신을 담느냐는 전문과 세부조항의 성격과 방향을 결정한다. 나는 376년이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작성되던 시절에 시대적 필요성에 부응하려던 신앙인들의 상황과 지금은 너무나 많이 달라져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율법조문적 또는 명제적 진리에 갇히지 말고 인격적 진리, 화해신학적 교회론을 중심에 새로운 신앙고백서가 필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는 “1967 신앙고백서 내용을 좀더 공부할 필요가 있다.

참고: 미국장로교회 헌법: 1신앙고백서[한글 번역판 전문-pdf]

 

파커 파머가 말한 대로, 진리가 인식 주체와 인식 대상 사이의 개방적이고 신실하고 모험적인 상호침투라면, 우리는 인격을 다하여 진리를 알고자 하며, 또한 진리가 우리를 알게 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의 인격 전체를 가지고 우리와 세계를 본래의 사랑의 형상으로 재형성시켜주는 관계들을 추구하는 것이다(131).

 

우리가 진리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는 것이 필수적인지를 파머는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추상적 관념은 하나의 말이다. 그런데 말은 인간의 목소리를 통해 나온다. 그러므로 어떤 관념을 연구할 때, 우리는 그것을 추상으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소리로 대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첫 질문은 그 사상이 얼마나 논리적인가?가 아니라, 그 뒤에 누구의 목소리가 있는가? 그 사상을 출현시킨 인격적 실재는 무엇인가? 어떻게 나는 그 사상가가 맺고 있는 관계에 들어가 거기에 응답할 수 있을까?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질문들은 논리와 비판적 지성을 배제시키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앎은 육체 없는 지성으로 데이터를 평가하는 일 이상을 의미한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는 것이다. 진리에 대한 지식을 가지려면, 반드시 인식 주체와 인식 대상 사이의 인격적인 대화, 즉 인식 주체가 세계에 순종으로 귀기울이는 대화가 필요하다.- 148

 

이것은 성경을 연구할 때도 필요한 태도다. 흔히 배경을 연구하라는 말로도 표현된다. 예를 들어,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7:21) 말씀을 가지고 율법주의적으로 사람들을 옭아맨다면 종교는 사람을 질식시키는 무거운 짐을 지우는 굴레가 되고 것이다. 반대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10:13) 구절을 빙자하여 자신이 예수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는 사실 만으로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사랑의 법을 외면하는 철면피적 신앙인이 있다면 그는 자기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다.

 

문제는 이런 오류가 지속적으로 우리의 공동체에 문제를 일으켜 무질서가 심화될 있다는 점이다. 이미 우리나라 안에는 WCC논쟁이나, 3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National Action Plan: NAP) 대한 반대시위, 예멘 난민의 제주도 입국에 대한 입장 차이, 북한의 비핵화와 관련된 남북관계를 바라보는 입장 차이 각종 현안에 대한 평가가 진영마다 개인마다 다르다. 그런데 사람이 아니라 말이나 논리만 가지고 문제를 생각하는 끝없는 논쟁이 되거나 어떤 생각에 굳게 붙들린 과격한 사람들의 행위가 정당화되는 공동체가 되고 것이다. 거기에는 다시 폭력이 정당화되는 비극이 발생할 있다.

 

이런 점에서 본문연구에 충실하지 못한 조직신학적 진술은 언제나 다시금 검토되어야 한다. 사실 어느 시대나 인간의 인식이나 해석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과제에 대한 대답을 추구하기에 만고불변의 진리를 담아낼 수는 없다. 우리는 점을 겸손하게 인정하고 시대는 자기 시대에 주어진 이전의 전통을 소중하게 물려받아 그것을 공부하고 점검하고 다시금 재해석한 후에 후배들에게 정성껏 물려주어 그들의 평가를 받고 그들이 열어가는 세상의 지표를 삼기 위한 밑거름이 되는 일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 점에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능력은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지식이나 진술이나 명제 또는 교리나 신조들 그리고 가치관들을 배우고 외우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능력은 전통이 생겨난 시대의 사람들의 상황을 생각해 보고 그들과 다른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 우리에게 바르게 적용하는 능력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인식 주체로서 인식 대상과의 개방적이고 신실하고 모험적인 상호침투가 필요하다. 우리가 인식 주체라면 인식 대상은 멀게는 성경시대의 사람들이며, 가까이는 우리와 더불어 살아가는 선배들이요 동료들이다.

 

성경시대의 인물들과의 개방적이고 신실하고 모험적인 교류를 가로막는 유일한 장애물은 인식 주체로서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편견일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대화와 교류를 나눌 때에도 쌍방간의 편견이 장애물이 있다. 그래서 소통을 포기하고 마는 경우가 생긴다. 그러나 진리를 향한 불굴의 걸음은 결국 십자가로 귀결될 것이다. 사람의 희생으로 새로운 희망의 세대가 일어날 것이다. 아니면 진실되게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결국 십자가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게 하면서 저들에게 죄를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기도 드리시던 예수님의 길을 따를 것이다.

 

그러나 파커 파머는 속에서 우리가 언약의 공동체 안에서 진리에 순종할 것을 권면한다:

객관주의는 세계가 그 자신에 대해서 무엇이라 말하는지에는 귀기울이지 않고, 그저 일방적으로 세계에게 그것이 무엇인지를 말한다. 반면 주관주의는 오로지 자신의 말만 듣겠다는 독단이다. 그러나 진리는 우리에게 순종 안에서 서로 귀기울일 것을, 들은 말에 응답할 것을, 언약공동체의 끈들을 인정하고 재창조할 것을 요구한다. 153

 

위의 말은 다음과 같이 앞부분에서 말한 파머의 말에 대한 메아리다:

 

이러한 종교 상호간의 이해의 문제는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편협하고 승리주의적인 영성들이 자연과 인류의 우주적 공동체에 대한 주된 장애물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은 더 중요하다. 주된 장애물은 다름 아니라 우리 모두를 사물로 만들어 버리려는 객관주의다. 이 객관주의는 종교적 혹은 세속적 이데올로기들의 자극을 조금만 받아도 쉽게 분리, 조작, 압제와 같은 정치적 사회적 프로그램으로 바뀐다. 오늘날 [기독교의 도덕적 다수파 혹은 이슬람 근본주의자들과 같은] 몇몇 분파주의 운동들이 공동체에 가하는 위협은, 그들의 영적 전통의 중심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편이 아닌 사람들 모두를 가능하다면 개종의 대상으로, 필요하다면 제거의 대상으로 환원시키는 객관주의로부터 유래한다. 예수님 안에 구현된 인격적 진리는 그러한 모든 왜곡과 맞선다. 그것은 그분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왜곡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126

 

파커 파머의 글은 오늘 한국 사회에서 보수 개신교회에 속한 사람들이 그렇게 쉽게 몇몇 가짜 뉴스에 속아 왜곡된 생각을 퍼뜨리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국가인권기본계획의 입법을 저지하는 것을 필생의 사명으로 여기고 삭발투혼을 발휘하는 모습이나 시위대 속에서 외치는 모습을 어디에 비유해야 할지. 예루살렘을 향해 탄식하시던 예수님의 모습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그리스도인들을 색출하려고 혈안이 청년 사울에 견주어야 하나. 나는 후자라고 생각한다.

 

인간으로서 우리의 소명은 인간과 비인간 존재의 유기적 공동체에 인격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며, 진리의 다른 이름인 돌봄과 책임성의 관계망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파커 파머의 관점에서 보면(130), 진리는 지금 교회 안에서 발견하기 쉬운가 아니면 시민운동단체나 깨어 있는 언론단체에서 쉽게 발견되는가? 교회를 가리켜 바울은 진리의 기둥과 터요 하나님의 (딤전 3:15)이라고 했는데, 집은 이미 황폐하게 솔로몬 성전은 아닌지 심히 우려된다. 아무리 휘황찬란해도 헤롯의 예루살렘성전은 예수님의 탄식거리일 뿐이었다. 그리고 세대가 지나기 전에 그렇게 폐허가 되었다. 그것은 거기에 진리를 좇는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명성교회에 대한 언론의 지적은 이미 자정능력을 상실한 명성교회를 향한 회개촉구를 담은 예언자의 외침이 수도 있다. 다행스러운 점은 이번 9 11일과 12 양일에 걸쳐 이루어진 예장통합 총회에서 명성교회 담임목사직의 세습 문제를 바로잡을 결단을 것이다. 총회에서 많은 토론자들은 헌법의 자구(字句) 아닌 정신을 되새겨야 한다 말했다고 한다. 세상의 빛이 되어 심화되어가는 갈등과 인류적 난제들 앞에서 해법을 제시하고 공동체의 동참을 이끌어내는 일에 선구자가 되어야 교회가 자신의 난맥상에 묶여 있으니 어찌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있겠는가!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특별했던 청년 사울이 하나님의 계획에 가장 장애물이 되었던 것처럼, 평화와 약자를 위한 배려를 행동에 옮기려는 정부의 노력(NAP) 가로막는 가장 장애물은 스스로 진리의 터전이라고 주장하는 일부 보수적 개신교회라고 나는 생각한다. 승리주의적인 영성은 마치 다메섹으로 말을 타고 달리는 사울의 모습이라고 있다. 그의 말발굽 소리에 신자들은 마음을 졸였고, 그와 더불어 말을 달리는 사람들은 자신들을 정의의 사도라고 자부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가장 밝은 정오에 밝은 빛에 의해서 사울은 말에서 떨어져야 한다. 그리고 혈안이 그의 육신의 눈은 감겨야 한다. 그리고 그의 눈을 덮고 있던 사상의 비늘이 벗겨지고 새로운 시각을 얻어야 한다. 그렇게 우리는 다시 태어나야 한다.

 

세계에서 가장 교회를 지향한 교회들이 하나같이 이처럼 말에서 떨어져 부축을 받아야 하는 실정이다. 그들은 승리자의 말발굽을 굴리면서 요란하게 달음질하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리고 오로지 그들만이 옳으며 진리를 붙들고 있다고 확신하겠지만, 실은 그들은 말에서 떨어질 것이며 그들 스스로 영적 소경임을 깨닫게 것이다. 그들이 떨어지는 까닭은 금전적 문제, 세습문제, 그리고 편협하고 왜곡된 신앙 때문일 것이다. 어느 때나 예언자들은 멀리에서 들려오는 심판의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현재의 평화와 번영이 시들고 폐허와 빈곤으로 전락할 것을 미리 보았을 것이다.

<계속>.

 

첨부파일 공동체의 회복을 위한 가르침과 배움5-진리란 무엇인가 (2)(예비 묵상) (1).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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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조해강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8.09.15 예수님이 진리라고 말씀하셨다고 해서, 예수님의 이름을 자주 부르는 사람이 진리를 안다고 할 수 있는 걸까? 그것은 진리에 대한 모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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