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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도 설교

2025-12-21 설교: 제국의 폭력인가, 하나님 나라의 자비인가?

작성자조해강|작성시간25.12.21|조회수56 목록 댓글 0

주일 설교안 (2025.12.21)

 

https://youtu.be/H_arx9SCMCI?si=-gh7hFnThEzaesQx

 

 

설교 제목: “제국의 폭력인가, 하나님 나라의 자비인가?”

본문: 요한복음 18:3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1. 빌라도의 나라와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오늘 본문에 대한 도미닉 크로산의 해설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그의 저서 『하나님과 제국』 서문에서 그는 예수님의 답변에 담긴 진의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① 침묵 속에 담긴 제국 비판 예수님은 로마의 속주 유대에서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사형 선고를 받으면서도, ‘로마’라는 국호나 ‘빌라도’라는 이름을 직접 언급하지 않으십니다. 이는 특정 국가나 개인을 넘어선 ‘제국주의라는 시스템 전체’에 대한 거대한 대항임을 시사합니다.

 

②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말의 흔한 오해들 우리는 흔히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오해하곤 합니다.

  • 내세주의: 이 땅이 아닌 ‘천국(하늘)’에만 존재하는 나라라는 오해입니다.
  • 미래주의: 지금이 아닌 ‘먼 미래’에나 올 나라라는 생각입니다.
  • 내면주의: 외부 세계가 아닌 개인의 ‘마음 수양’에 불과한 나라로 치부하는 것입니다.

 

③ 크로산이 밝히는 예수님의 ‘진짜 의도’ (비폭력의 정의) 예수님은 이어지는 문장(“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웠을 것이다”)을 통해 위의 오해들을 단번에 깨뜨리십니다.

  • 기원의 차이: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말씀은 장소(어디에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근원과 방식(어떤 원리로 움직이느냐)의 문제입니다.
  • 방식의 대조: 로마 제국이 ‘폭력’이라는 불의한 수단으로 유지되는 나라(빌라도의 군대)라면, 하나님 나라는 ‘비폭력’이라는 정의로운 수단으로 세워지는 나라(싸우지 않는 예수의 제자들)임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④ 결론: 제국에 대한 정면 도전 결국 예수님은 빌라도 앞에서 이렇게 선언하고 계신 것입니다. “빌라도여, 너의 로마 제국은 폭력적 불의에 기초하고 있지만, 나의 신성한 나라는 ‘비폭력적 정의’에 기초하고 있다. 내 나라는 너의 나라와 운영 원리 자체가 다르다.”

 

⑤ 설교 목적 이번 주일 설교에서 저는 도미닉 크로산을 따라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와 이 세상 나라에 대하여 정리해 보려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무엇이며, 우리가 그 나라 백성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2. 폭력의 정상성, 제국이 통치하는 방식 (팍스 아메리카나와 현대 국제 정세)

 

오늘의 세계는 어떻습니까? 미국인들은 스스로 자기 나라가 오늘날의 로마 제국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로마의 평화라는 뜻의 ‘팍스 로마나(Pax Romana)’에 빗대어, 오늘의 세계를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라 부르며 자신들이 세계의 평화를 지키는 나라라고 자부합니다. 하지만 로마의 평화가 그랬듯이, 오늘날의 세계도 전쟁이 끊이지 않으며 그 안에서 착취와 억압은 여전합니다. 트럼프 2기는 아예 세계의 평화는 대통령 개인의 전리품에 지나지 않는다는 듯 ‘아메리카 퍼스트’나 ‘MAGA’라는 구호를 앞세워 노골적인 착취를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예수님이 사시던 2천 년 전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 속에서 예수님은 빌라도 총독 앞에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두 번씩이나 말씀하십니다. 도미닉 크로산은 그 의미를 명확히 합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의 지배 원리인 ‘폭력에 의한 질서’가 아니라, ‘비폭력과 정의에 의한 평화’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 나라를 내세나 미래, 혹은 내면의 세계로만 오해합니다. 그 결과,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바르게 살 수 있는 능력과 지혜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세상”은 어떤 곳입니까? 그곳은 폭력, 즉 힘으로 통치하는 세상입니다. 강한 자가 자기 마음대로 하는 곳입니다. 도미닉 크로산은 이를 ‘폭력의 정상성(The Normalcy of Violence)’이라 불렀습니다. 로마 제국이 군사적 폭력과 경제적 착취를 제도화했듯이, 오늘날의 강대국들도 로마 제국의 논리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국제 질서에서 당연히 일어나는 일, 즉 ‘정상’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강한 나라가 불평등한 조약을 맺고, 나라를 지켜준다는 명목으로 ‘방위비 분담금’이라는 이름의 천문학적인 돈을 가져갑니다.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은 우리에게 너무 불리하여 정부가 개정을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최근의 관세 협정 역시 성공적이라 자평하지만, 현장에서 우리 관리들은 제국주의라는 ‘폭력의 정상성’을 뼈저리게 실감했을 것입니다. 이 세상은 국가 간에도 위협하고 착취하는 곳입니다.

이 세상의 지배 원리인 ‘폭력의 정상성’은 힘에 의한 평화입니다. 미국은 천조국이라 불릴 만큼 막대한 국방비를 지출하며, 그로 인해 국민들의 복지나 의료는 소홀히 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처해 있습니다. 북한의 무기 개발을 비판하지만, 미국 역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세계는 힘을 갖추지 못하면 생존할 수 없기에 모두가 더 많은 무기를 갖추려 동분서주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힘으로 힘을 제압하면 더 큰 힘이 필요할 뿐입니다. 폭력은 폭력을 낳습니다. 이것이 ‘폭력의 점증하는 특징(escalatory violence)’입니다. 2001년 9.11 테러 이후 미국은 이라크 전쟁을 벌였으나, 그 결과 더 강경한 폭력을 행사하는 이슬람국가(IS)가 탄생했습니다. 도미닉 크로산은 미국이 범인을 색출해 처벌하는 경찰의 방식을 택했다면 좋았을 것이라며 아쉬워합니다. 9.11 테러보다 이라크 전쟁으로 인한 인명 피해와 경제적 손실이 훨씬 컸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폭력에 의한 지배가 만들어내는 비극적인 현실입니다.

 


 

3. 진보의 역설과 ‘축의 시대’가 던진 질문 (기술적 진보와 정신적 자양분)

 

도미닉 크로산은 『하나님과 제국』 서문에서 인류가 고대 제국의 습성을 버리지 못했음을 일깨우는 로버트 브레이드우드의 말을 소개합니다.

“인류가 돌도끼의 모양을 개선하는 데에는 100만 년이 걸렸지만, 비행기를 발명한 지 수소폭탄을 만들기까지는 50년도 채 걸리지 않았습니다.”

 

크로산은 이 말을 다음과 같이 다시 정리했습니다.

“천연석에서 돌도끼를 만드는 데 100만 년, 돌도끼에서 철검까지 5,000년, 철검에서 기관총까지 500년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비행기에서 수소폭탄까지는 단 50년이 걸렸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온 영리한 유인원치고는 그리 나쁘지 않은 진보(progress)입니다.”

종교의 기원을 연구한 카렌 암스트롱은 그의 저서 『축의 시대』(원제: The Great Transformation)에서 인류가 폭력의 시대에서 자비와 공감의 시대로 나아가는 길을 발견한 기간을 소개합니다. 기원전 900년에서 200년 사이의 이 ‘축의 시대’에 세계의 네 지역에서 위대한 종교와 철학이 동시다발적으로 탄생했습니다. 중국의 공자와 노자, 인도의 석가모니, 이스라엘의 엘리야와 이사야, 그리스의 소크라테스 등이 그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가 폭력으로 멸망하지 않도록 일반 은총 속에서 자비의 마음을 심어주셨습니다.

축의 시대는 극심한 폭력에 대한 반작용으로 출현했습니다. 무기가 정교해지고 전쟁이 끊이지 않던 시대에, 현자들은 피 흘리는 제사 대신 인간의 내면과 윤리에 집중했습니다. 그들의 공통된 결론은 ‘내가 당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 하지 말라’는 자비와 공감의 정신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황금률이 바로 그 정신입니다. 공자 역시 자기가 당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 하지 말라는 ‘서(恕)’의 도덕적 감수성이 인류를 구원할 것이라 믿었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로마서 12장에서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고 권면했습니다.

문제는 오늘날의 종교가 이 소중한 가르침을 잊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국 개신교는 미국의 복음주의를 많이 닮아 있는데, 미국 복음주의 교회의 70%가 이라크 전쟁을 지지했다고 합니다. 보수화되고 극우화된 신학 아래에서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한 책임과 비전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휴거’ 신학에 물들면 이 세상을 관리해야 할 본분을 망각한 채, 그저 이 땅에 남겨질 것만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4. 대속(Substitution)을 넘어 모델(Model) 신앙으로 (크로산 신학의 핵심 비판과 제안)

도미닉 크로산은 기독교의 대속 신앙 자체에도 문제를 제기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해 십자가를 지셔야만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어왔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하나님께서 반드시 ‘피의 제사’를 통해서만 인간을 용서하시는 분이라는 의미라면, 하나님은 보응하고 보복하시는 분이 됩니다.

크로산은 이런 신학이 하나님을 제국주의적 정신을 가진 분으로 왜곡한다고 주장합니다. 하나님을 힘으로 제압하는 분으로 오해할 때, 교회는 불의에 대하여 쉽게 폭력을 사용하게 됩니다. 9.11 이후 많은 그리스도인이 전쟁을 지지했던 배경에는 이러한 오해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돌아보면 저 역시 율법주의에 물들어 있을 때, 자녀들을 매우 엄격하고 너그럽지 못하게 대했습니다. 저도 모르게 심판자의 자리에 앉아 있었던 것입니다. 제가 하나님을 그런 분으로 생각했기에 제 행동도 그랬음을 반성합니다. 결국 신론(神論)이 인간의 운명을 결정합니다.

크로산이 주장하는 바는 ‘모델 신앙’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정신을 가르치고 실천하시다가 제국주의 폭력에 희생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 비폭력으로 정의를 세우기 위해 십자가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단순히 개인의 죄를 씻는 ‘영수증’이 아니라, 제국의 폭력에 끝까지 비폭력으로 저항하여 승리하신 ‘새로운 삶의 이정표’입니다.

 

예수님은 로마 제국의 힘의 질서 속에서 전혀 새로운 정신과 질서를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복음입니다.


 

5. 다시 길을 찾는 사람들, 비폭력 정의의 행진 (결론 및 실천적 권면)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세상의 지배 원리가 무엇인지, 우리가 속한 하나님 나라의 통치 원리가 무엇인지를 바르게 배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어느새 폭력과 힘을 숭배하는 세상 풍조를 따르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지탄받는 이유는 우리가 예수님의 정신을 잊고 세상의 가르침에 젖어 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다시 배워야 합니다. 전쟁으로 인류가 멸망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탄생한 종교의 진리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이미 세계는 다시 혐오와 전쟁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올해 초 기준, 러우 전쟁으로 인한 러시아군 사망자는 60만~70만 명, 우크라이나군 사상자는 30만~50만 명에 달하며 민간인 사망자도 수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됩니다.

 

세상은 힘과 폭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며, 평화를 위해 전쟁을 준비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 신자들부터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하는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해야 합니다. 저는 이러한 목적으로 도미닉 크로산의 『하나님과 제국』을 읽으며 우리의 신앙을 점검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이 여정에 큰 진전이 있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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