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설교안 (2025.12.28)
설교 제목: “성경이 그려주는 하나님의 참 모습”
본문: 시편 136:1~2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신들 중에 뛰어난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 서론: 제국의 논리를 넘어 하나님 나라의 정신으로
나는 이번 주간에 존 도미닉 크로산의 책, ‘하나님과 제국’(God & Empire: Jesus Against Rome, Then and Now)을 읽으면서 그 내용을 요약했다. 지난 주에는 제국의 논리에 물들지 말고 하나님 나라의 정신을 따르는 삶을 살자는 메시지를 전했다.
이번 주간에 내가 정리한 자료는 다음과 같다:
1. 성탄절 관련하여, 제국을 뒤흔든 위험한 아기의 탄생, 마리아의 찬가 – 로마의 피라미드를 전복하는 혁명의 노래
2. 분배와 평등으로 읽는 창조 이야기 – 에누마 엘리시, 안식일, 채식 명령
3. 제국의 독을 빼는 시간 – 하늘의 언어 배우기(길가메시 서사시, 가인과 에노스)
4. 에덴의 두 나무 – 원죄를 넘어 도덕적 소명으로
5. 성경 속 폭력적인 하나님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창조, 노아, 바벨탑, 아브라함, 엘리야, 아모스, 계시록의 피 묻은 옷)
6.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사역 비교(관찰자 vs. 참여자, 독점 vs 프랜차이즈, 작은 자 vs. 큰 자)
7. 십자가, 누가 누구를 죽였는가? (for~ vs. because of~)
이 글들은 모두 위의 책을 읽으면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물론 나는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는 것을 골랐다. 도미닉 크로산은 그의 책에서 불법의 폭력으로 통치하는 제국의 방식과 진리의 비폭력으로 통치하는 하나님 나라의 방식을 비교한다. 그는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을 폭력적인 분으로 읽어서는 안 되며 폭력과 비폭력의 긴장이 벌어지는 전쟁터임을 기억하라고 조언한다. 구약성경을 어떻게 읽어내느냐는 무척 중요하다.
2. 로마 제국의 ‘퀴리오스’와 복음의 ‘주님’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도미닉 크로산이 소개할 때 진정한 왕은 예수님이시며 그분이야말로 구약성경이 예언한 바로 그 구세주시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강조했던 기존의 방식과는 달리, 그 퀴리오스(주님)가 로마 황제에게 붙여졌을 때와 어떻게 다른지를 비교하여 설명한다. 로마 제국의 폭력성과 불법성을 대체하고 그것을 뛰어넘는 하늘의 통치이념을 복음서는 제시하는 것이라고 강조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이 크로산의 특징이라고 하겠다. 크로산은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포함한 복음서의 이야기를 당시의 상황이라는 매트릭스 속에서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그에게 성경의 사건이 일어나는 시간과 장소는 단순히 배경이 아니라 끊임없이 등장인물과 상호교류하는 매트릭스였다.
3. 고대 근동 신화와 성경적 창조의 대조
창조 이야기에서 크로산은 근동의 창조 이야기와 성경의 창조 이야기를 대조하여 설명한다. 바벨론의 창조설화인 에누마 엘리시에 두드러진 특징은 전쟁과 승리를 통한 질서의 확립이다. 그것은 다분히 제국주의적인 가치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안식일 제정과 채식 명령은 성경이 본래적으로 비폭력적인 평화를 계획했음을 보여준다.
아래의 글은 고대근동의 창조 이야기와 성경의 창조 이야기가 어떻게 다른지를 보여준다:
① 티아마트(어머니 신)의 살해: 잔혹한 전쟁
신화의 절정은 젊은 신들의 대표인 마르두크가 혼돈의 상징이자 어머니 신인 티아마트를 죽이는 장면이다. 여기서 묘사되는 폭력은 매우 구체적이고 파괴적이다.
[인용문] “그(마르두크)는 화살을 쏘아 그녀의 배를 갈랐고, 그녀의 내장을 끊었으며 심장을 꿰뚫었다. 그는 그녀를 굴복시키고 그녀의 생명을 앗아갔다. 그는 그녀의 시체를 내던지고 그 위에 올라탔다.” (에누마 엘리시, 제4판 중)
- 해설: 마르두크는 티아마트가 입을 벌릴 때 거센 바람을 불어넣어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한 뒤 화살을 쏘아 죽인다. 이는 평화로운 말씀의 창조가 아니라, 물리적인 힘으로 상대방을 완전히 파괴하는 ‘전쟁을 통한 승리’를 묘사한다.
② 시체를 찢어 세상을 만듦: 파괴된 육체로서의 세계
성경에서 하나님은 “빛이 있으라”는 말씀으로 세상을 만드시지만, 마르두크는 죽인 어머니 신의 시체를 찢어 하늘과 땅을 만든다.
[인용문] “주신(마르두크)은 티아마트의 사체를 살피며 잠시 쉬었다. 그는 그 사체를 교묘한 솜씨로 나누어 경이로운 것들을 만들기로 했다. 그는 그녀를 말린 물고기처럼 둘로 쪼개어 그 절반으로 하늘의 지붕을 만들었다.” (에누마 엘리시, 제4판 중)
- 해설: 세계의 재료 자체가 ‘패배자의 시체’다. 이는 제국주의 관점에서 볼 때, 질서란 곧 강자가 약자를 짓밟고 그 위에 세우는 것임을 상징한다.
③ 인간의 창조: 반역자의 피와 노예의 운명
에누마 엘리시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고귀한 존재가 아니다. 반역한 신 ‘킹구(Qingu)’를 처형하고 그 피로 인간을 만드는데, 그 목적은 오직 ‘신들의 노동을 대신하기 위해서’다.
[인용문] “그들이 그(킹구)를 묶어 마르두크 앞으로 끌고 왔다. 그들은 그에게 죄를 물어 그의 혈관을 끊었다. 그(마르두크)는 그의 피로 인류를 만들었다. 신들의 고역을 떠맡기고 신들에게 안식을 주기 위함이었다.” (에누마 엘리시, 제6판 중)
- 해설: 인간은 ‘반역자의 피’로 만들어진 비천한 존재이자, 신(통치자)의 안식을 위해 노동을 전담하는 노예적 존재로 설정된다.
4. 제국의 언어와 하늘의 언어: 가인과 에노스의 후예
제국의 독을 빼는 시간과 하늘의 언어를 배우는 글에서 나는 가인의 후예와 에노스의 후예가 대비되는 창세기 이야기에 주목했다. 그것은 성경 이야기에 면면이 흐르는 땅의 정신 곧 제국주의적인 정신을 따를 것이냐 아니면 하늘의 정신을 따를 것이냐의 문제이며 그것은 마치 외국어를 배우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우리가 기존에 사용하는 언어가 어떤 특징이 있으며 우리가 새롭게 배울 언어가 어떤 특징이 있는지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다. 그 후에 진정한 대결이나 싸움이 가능할 것이다.
성경은 독특하게 문명의 창시자로 가인의 후예를 든다. 그들은 도시를 건설하고 농경에 필요한 기구를 만들고 거기에 각종 도구와 악기를 만든다. 이것은 문명의 상징이다. 농경과 정착생활, 도시의 건설 등은 문명화의 바탕이 된다. 그런데 성경은 그런 문명화가 도시화이며 그것은 결국 폭력으로 귀결된다고 일깨워준다. 가인의 후예인 라멕의 시대에 폭력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폭력은 더 큰 폭력을 낳을 뿐이다. 노아의 시대에 그 폭력은 절정에 다달았다.
5. 에덴의 두 나무: 도덕적 소명과 주체적 존재
도미닉 크로산의 성경해석은 비범한 데가 있다. 그 중에서 에덴동산의 두 나무에 대한 이야기는 가장 독특하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그 두 나무 중에 하나만을 선택할 수 있다. 영생의 나무냐 아니면 도덕의 나무가 그것이다. 그런데 영생의 나무는 먹으면 영생하는 것이고, 도덕의 나무는 먹으면 자신의 벌거벗음을 깨닫게 된다.
크로산은 영생하는 것이 무엇이라고 설명하는가? 그것은 죽음을 모르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동물들이 그렇다는 것이다. 인간이 그 나무의 열매를 먹었다면 죽음을 몰랐으리라는 주장이다. 그렇게 되면 두려움도 없고 갈등도 몰랐으리라는 것이다. 그럼 선악을 알게 하는 도덕의 나무는 무엇인가? 크로산은 그 나무가 인간이 도덕적인 판단에 의하여 선택을 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의미로 이해한다. 즉, 그는 자신이 죽을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그는 이제 무한히 자기를 확장하는 대신에 모든 사람이 같은 운명을 겪게 되고 반드시 죽을 것이므로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사는 길을 선택하게 된다.
크로산에게 인간이 선악과를 먹은 일은 비극이 아니라 도리어 도덕적인 선택을 할 수 있는 소임을 받은 주체적인 존재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바로 그 도덕성 때문에 인류는 멸종되지 않고 보존될 수 있다. 그들은 더 이상 본능으로 살지 않고 무엇이 옳은 것인지를 가늠해 보고 선택하는 존재가 되었다. 그것은 인류에게 주어진 특권이자 사명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유한자적 존재임을 깨닫고 영원하신 하나님을 갈망하면서 살아갈 때 우리는 비로소 이 세상에서 영생불사를 약속함으로 우리를 속이는 제국의 거짓말을 분별할 수 있다. 진시황의 불로초처럼 오늘날 우리는 황금만능주의라는 불로초를 찾아 헤매는 것은 아닐까?
“제국은 우리에게 영생불사할 것처럼 힘을 기르라고 말한다. 황금으로 죽음의 두려움을 덮으라고 속인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가 '벌거벗은 존재'임을 정직하게 보게 한다. 벌거벗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서로의 벌거벗음을 덮어주는 것, 그것이 제국의 독을 뺀 하늘 나라의 공동체다.”
이렇게도 이해할 수 있다. “내가 영원히 산다고 착각하면 우리는 끝없이 탐욕을 부린다. 하지만 ‘나도 언젠가 죽는다’는 것을 진심으로 깨닫는 순간, 내 곁에 있는 사람도 나처럼 연약하고 유한한 존재임을 알게 된다. 죽음에 대한 인식은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고, 서로를 불쌍히 여기게(Compassion) 만든다. 그래서 도덕은 죽음의 인식 위에서 피어나는 꽃이다.”
어쩌면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그 유한자적 한계를 깊이 인식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과 더불어 하나 될 때, 즉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할 때 비로소 우리는 영원한 생명에 들어간다는 것을 확신하셨던 것은 아닐까? 십자가는 바로 그 확신과 추구와 소명이 낳은 결과라고 할 수 있다.
6. 구약성경의 발전: 피의 종교에서 윤리의 종교로
이런 식으로 성경을 읽는다면 우리가 그 동안 전제로 삼았던 원죄론과 심판론은 다시 평가되어야 한다. 사실 우리가 성경을 그렇게 읽었기에 마르시온처럼 구약의 하나님은 폭력과 무자비의 하나님이시므로 예수님의 하나님이 아니시라는 결론에 이르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도미닉 크로산의 관점으로 구약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구약성경 자체가 하나님의 폭력성과 비폭력성이 갈등을 하면서 발전했음을 파악할 수도 있다.
사실 하나님은 인간을 지으셨음을 후회하셨다. 그리고 바벨탑 이야기에서는 염려하신다. 신인동형동론적 표현이기는 하지만 이 이야기에서 하나님은 새로운 길을 열어주신다. 노아 시대의 심판으로도 인간의 마음은 새롭게 되지 않았다. 바벨탑의 심판도 인간에게는 무위가 될 것이 틀림없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새로운 방식을 시작하신다. 그것이 아브라함과 사라 부부를 부르시고 그들을 통하여 천하만민에게 복을 줄 것이라는 약속이다.
이런 변화는 예언자들의 이야기에서도 발견된다. 엘리야와 엘리사는 하나님의 소명을 받아서 통치자들의 악행에 대하여 물리적인 심판을 명한다. 그러나 예언자 아모스는 하나님의 본심이 폭력이 아니라 정의를 하수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같이 흐르게 하라고 전파한다. 그렇게 유대교는 피의 종교에서 정의와 자비를 행하는 윤리의 종교로 성장한다.
시편 136편은 바로 그것을 노래한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이 구절은 반복되는 후렴구인데 그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준다고 하겠다. 이 말은 우리가 성경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고 할 때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가장 명료하게 보여주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7. 요한계시록의 역설: 피 묻은 옷과 비폭력의 승리
도미닉 크로산은 요한계시록에 묘사된 어린 양의 전쟁에 대하여 소개한다. 계시록에서 이 세상의 원수들은 심판을 받는다. 그런데 그들을 멸하러 말을 타고 온 예수님의 옷에는 이미 피가 묻어 있다. 그것은 그 원수들의 피가 아니요 자신의 피였다. 이 세상이 바르게 되려면 더 큰 폭력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끝까지 비폭력으로 사랑을 실천한 이들의 산 제사를 통해서 새 창조가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그것을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그 눈은 불꽃 같고 그 머리에는 많은 관들이 있고 또 이름 쓴 것 하나가 있으니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고,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요한계시록 19:11~14)
이것이 도미닉 크로산이 성경을 읽는 눈이며 태도다. 그에 따라 성경을 읽을 때 우리가 발견하는 하나님은 자비와 긍휼의 하나님이시며, 그리고 정의와 공평의 하나님이시다.
8. 결론: 하나님의 대리인이자 치유의 동역자
도미닉 크로산이 세례 요한과 예수님을 비교할 때도 바로 이 대목이 두드러진다. 세례 요한에게 하나님은 임박한 심판주시다. 인간이 할 일은 그분을 기다리며 근신하는 것이다. 도미닉 크로산은 요한의 이런 상황을 정의와 도덕으로는 최고의 경지에 이른 모습이라고 치켜 세우면서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례 요한과는 달리 행하시고 가르치셨다는 점에 주목한다. 세례 요한이 관찰자라면, 예수님과 제자들은 참가자요 하나님의 대리인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병고치는 능력을 주셨다는 말씀도 어떤 비범한 능력을 부어주신 것이라기보다는 병으로 소외되고 고통을 받는 사람들을 찾아가 품어주고 공동체 안에서 당당하게 살 수 있도록 그들의 손을 잡아 주는 것이라고 이해될 수 있다.
이렇게 도미닉 크로산의 글은 우리에게 성경이 그려주는 하나님을 이런 모습으로 그려준다. 또한 우리가 주님 앞에서 주님을 섬기는 대리인이며 동역자며 왕 같은 제사장이라면,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의 진실한 이웃이 되어주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치유를 받을 수 있다.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늘 그 앞에서 기도하고 그 앞에서 경배하는 그 하나님의 모습이 바로 다음과 같기 때문이다:
“여호와께 감사하십시오. 그분은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십니다!”